나도 누군가에게 예술가가 될 수 있을까?
함께 하는 식사가 주는 위로와 행복

▲ 그날 밤, 마을 사람들이 모인 소박한 회백색 식탁 위에 화려한 프랑스 요리들이 가득 오른다. 영화 ‘바베트의 만찬’.
 휴일 아침 느지막이 잠에서 깬다. 배가 고파서 홈서비스로 햄버거 세트를 주문한다. 고기 패티에 트러플 마요네즈가 뿌려져 있다. 햄버거에 송로버섯이라. 아무리 그래도 패스트푸드에 웬 최고급 식재료“ 한 입 베어 무는데 역한 향이 난다. 내 입맛은 그다지 고급스럽지 못한 건가. 소스를 최대한 걷어내고 먹어보지만 이미 양상추에도 빵에도 뒤범벅. 억지로 반쯤 먹다 결국 포기하고 남은 빵조각을 식탁 구석에 멀찍이 치워둔다. 메뉴 선택 실패다. 감자튀김이나 집어먹자.

 그래도 난 이렇게 혼자 밥을 먹는 시간이 좋다. 식탁 위에 먹고 싶은 것들을 잔뜩 늘어놓고 라디오를 듣거나 TV를 보면서 하나씩 천천히 해치운다. 너무 많이 먹는 거 아니냐고 핀잔을 주는 사람에게는 “먹어야 풀리는 스트레스가 있을 뿐이야.”라고 대답한다. 변명처럼 들리지만 사실이다. 아무리 좋아하는 일을 하고 취미 활동을 해도,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글을 쓰고 음악을 듣고 해도 풀리지 않는 스트레스가 존재한다. 적어도 나한테는 먹는 것이 모든 것을 뛰어넘는다.
 
▲“추억은 뭔가 같이 먹을 때 생긴다”

 생각해보면 학교 다닐 땐 혼자 밥 먹을 자유가 없었다. 점심시간, 교사의 지도에 따라 급식실에 빽빽이 들어앉아서 온갖 소음과 함께 밥을 먹다보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다른 애들은 모르겠지만 난 급식시간이 전혀 즐겁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처럼 혼자 먹는 게 좋다. 하지만 대부분의 식사를 혼자 해결하고 있는 지금에 와선 이렇게도 생각한다. 어쨌든 인생에서 누군가와 함께 하는 식사는 적당히 필요하다고. 혼자 먹는 밥은 또 다른 종류의 외로움을 낳는다.

 문득 아주 조용히 찾아오는 그런 외로움에 나는 당황한다. 아마도 인간의 영혼은 다른 사람과 나누는 대화가 어느 정도 필요한가보다. 친구나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할 때면 느낀다. 추억은 역시 뭔가 같이 먹을 때 생긴다. 그리고 함께 먹는 음식과 약간의 대화는 어떤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위로를 준다. 식탁 앞에 앉아 아무 화제나 툭 던지면 눈덩이 굴리듯 대화가 이어진다. 마지막 수저를 내려놓을 때는 어떤 큰 감동 같은 것이 만들어져 식탁의 공기가 따뜻하다.

 “내가 만든 따뜻한 롤빵을 좀 드시지요. 뭘 좀 드시고 기운을 차리는 게 좋겠소. 이럴 때 뭘 좀 먹는 일은 별것 아닌 것같지만 도움이 될 거요.”
 - 레이먼드 카버,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中
 
▲맛있는 빵 몇조각…위로는 결국

 토요일 오후, 앤은 제과점에서 아들 스코티의 여덟 번째 생일 케이크를 주문한다.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초콜릿 케이크로. 빵집주인은 퉁명스럽고 무뚝뚝했기에 앤은 그와 필요한 대화만을 주고받았다. 생일날 아침 스코티는 차에 치인다. 파티는 당연히 취소되고 아이는 병원으로 후송된다. 가벼운 뇌진탕이라던 아이가 좀처럼 깨어나질 않자 부부는 두려움에 휩싸인다. 앤과 남편이 집과 병원을 번갈아 다니며 아이 옆을 지키는데, 모르는 번호로 자꾸만 전화가 온다. 받으면 하는 말. “케이크 찾아가시오.” “스코티 일은 잊어버리셨소?”

 생일 케이크 같은 건 이미 새까맣게 잊어버린 앤과, 이 사실을 전혀 모르는 남편 하워드. 안 그래도 심각한 상황에 계속 걸려오는 미친놈의 장난전화로 부부는 속이 끓는다. 스코티는 결국 며칠 뒤 죽는다. 앤과 하워드는 슬픔과 허탈감에 휩싸여 집에 돌아온다. 그런데 또 울리는 전화벨! 앤은 그제야 케이크와 빵집주인을 기억해낸다. “그 개자식, 죽여버릴거야.” 부부는 함께 제과점을 찾아간다. 앤은 빵집주인에게 막무가내로 화풀이하며 분노를 쏟아낸다. 그때, 그녀의 코끝을 스치는 따스하고 달콤한 냄새.

 사정을 알게 된 빵집주인은 따뜻한 차와 갓 구운 시나몬롤을 내온다. 주인은 부부에게 자신의 무지로 인한 실수를 사과한다. 그는 자신과 자신의 인생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부부는 먹고 마시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왔고, 접점이라곤 없었던 부부와 빵집주인은 그렇게 서로를 이해했다. ‘인간은 먹지 않으면 죽는 동물이다’라는 냉정하고도 가혹한 진리. 그럼에도 살기 힘들 때 먹는 것만큼 도움이 되는 것도 없다. 맛있는 빵 몇 조각과 따뜻한 차 한 잔. 위로는 결국 이런 별 것 아닌 것들로부터 오는 것일까?

 “안토닌이 그 집에 있는 유일한 방의 문턱을 넘자마자, 그 둘 모두 전혀 예기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그 방안은 한 사람에게는 눈을 감고도 익숙한 분위기였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색다른 세계였다. 토니오는 테이블에 접시를 놓고 나이프와 포크를 가지런히 놓았으며 그 옆에는 잔을, 또 그 옆에는 포도주 병을 놓았다. 그리고 빵도 내왔다.”
 - 존 버거, ‘바위 아래 개 두 마리’ 中
 
▲“예술가는 가난하지 않아요”

 마드리드 북쪽 엘 레켄코 계곡. 깨진 바위가 널려 있는 사이로 너도밤나무들이 군데군데 서 있는 산록에 토니오의 오두막이 있다. 마치 기대어선 무덤처럼, 테이블 끝에 웅크려 앉은 사람처럼. 근처에는 소몰이꾼 안토닌이 아내가 죽고 혼자 살고 있다. 토니오와 안토닌, 두 사람은 담배를 피우거나 물을 마실 때만 겨우 몇 마디 이야기할 뿐이다. 하루는 토니오가 함께 식사를 하자고 안토닌에게 권한다. 안토닌이 이에 응하고 토니오의 오두막에 들어선다. 밖에는 안토닌의 개 두 마리가 바위 그늘 아래 앉아 있다.

 안토닌은 오랜 세월 일이 전부인 인생을 살았고, 토니오 역시 오랫동안 홀로 식탁 앞에 앉았을 테다. 말주변 없고 무뚝뚝한 두 남자가 어색함 속에서 식사를 시작한다. 올리브기름을 두른 토마토, 감자와 베이컨, 포도주. 조촐하지만 따뜻한 음식을 들며 함께 이야기하는데, 소복소복 쌓여 있는지조차 몰랐던 오랜 외로움이 가슴속에서 움찔. 식사가 끝나고 안토닌은 현관에서 한참을 머뭇거린다. ‘이 고마움을 어떻게 전하지?’ 안토닌은 이내 주머니에서 꾸깃꾸깃 지폐 한 장을 꺼내 내민다. 토니오는 손사래 친다. 한참 실랑이를 벌이다 눈이 마주치고, 둘은 울며 부둥켜안는다.

 저마다 카메라 렌즈 앞에 앉아서 무언가 맛있게 먹어대는 이 시대를 나는 멀찍이 떨어져서 구경중이다. 처음엔 무슨 짓일까 싶었지만 요즘은 재밌기도 하다. 어차피 어제 세상 오늘 세상 다르고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많다.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들을 이해할 필요도 허락할 의무도 내겐 없다. 그저 관망하면서 편하게 중얼댄다. ‘각자의 허기를 저마다의 방식으로 해소할 수 있다면 된 거겠지. 그걸로 돈도 좀 번다고 해서, 자본주의 시대에 딱히 나쁜 행동도 아니잖아.’

 그럼에도 공허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한 사람이 방 안에서 혼자 식사를 시작한다. 렌즈 너머 수천 명이 그 한 명 먹는 모습을 본다. 주인공인 사람은 외롭지 않다. 이미 모두와 함께 있으니까. 게다가 돈도 벌고. 밥 먹으면서 돈도 벌 수 있는 시대라니, 정말 꿈같군. 확실히 그런 꿈같은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수천 명쯤 어딘가에서 혼자 밥을 먹으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다. 세상에는 딱 그만큼의 돈과 딱 그만큼의 외로움이 존재한다고 느낀다.

 “예술가는 가난하지 않아요.”
 - 바베트의 만찬 中
 
▲남을 위해 만들 때 마음이 녹는다 

 덴마크 바닷가 외딴 작은 마을에 나이 지긋한 자매가 산다. 독실한 청교도 집안의 두 딸은 마을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풀며 검소하게 살아왔다. 폭풍이 치던 어느 날, 자매에게 바베트라는 여자가 찾아온다. 프랑스에서 온 그녀는 내전으로 남편과 아이를 잃었다. 자매의 새로운 가족이 되어 일을 돕고 산 지 14년, 바베트는 우연히도 엄청난 액수의 복권에 당첨된다. 그녀는 그 돈으로 자매와 마을 사람들을 위해 만찬을 준비하기로 결심한다. 그날 밤, 마을 사람들이 모인 소박한 회백색 식탁 위에 화려한 프랑스 요리들이 가득 오른다.

 누군가 복권에 당첨된 돈으로 나를 위해 호화로운 요리를 만들어 대접한다면 난 얼마나 행복할까? 아니지, 내가 만약 그렇게 큰돈을 손에 쥐게 된다면 난 그 돈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한 끼 식사에 모두 쏟아 부을 수 있을까? 남에게 무엇을 바라기 전에 먼저 내가 해줄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자. 바베트가 말한 ‘예술’이란 무엇일까?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자매를 위해 얻은 돈을 다 쓰겠다는 결심, 마을 사람들에게 화려하고도 다채로운 맛들을 경험하게 해주겠다는 각오. 예술은 나를 위해서가 아닌 남을 위해서일 때 비로소 예술이 되는 것일까?

 혼자 밥 먹는 것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만 글쎄, 굳이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으라고 강요하는 것도 폭력 아닌가. 안 그래도 다들 살기 힘든데 그런 것까지 신경 쓰면서 내 사회성을 유지하고 관리해야 할 필요 없잖아. 혼자 하는 식사와 함께 하는 식사로 생은 채워지니, 그때그때 맛있는 식사를 한다면 어느새 행복한 인생이 완성될 테다. 그래도 더 바란다면, 내 영혼이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무언가 요리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사실 정성들여 음식을 만드는 것도 정신적으로 성장한 사람이라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 대단치 않은 것들이라도 남을 위해서 만들 때 언 마음이 녹는다. 차가운 입에 따뜻한 음식이 들어가면 의외로 달콤한 말들이 새어나온다. 사람은 먹고 마시며 속을 털어놓고 위로를 주고받으며 힘을 얻는다. 삶은 퍽퍽하고 복권에 당첨되는 행운도 쉽게 찾아오지는 않는다. 조촐한 것들이라도 함께 나누면 위로가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래서 행복하다. ‘하지만, 정말 만약에라도 비현실적인 행운이 날 찾아온다면’하고 상상해본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 행운을 남에게 베풀만한 영혼을 가진 사람인지.

 초저녁쯤 길을 걷다보면 남의 집에서 흘러나오는 저녁밥 짓는 냄새를 맡게 될 때가 있다. 그 순간 외로움이 나를 쿵 때린다. 잠시나마 그 집 식탁 위를 상상한다. 냄비에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를, 작은 접시 위에 놓인 조기구이나 갈치 한 토막을. 그런 풍경은 이제 추억이 됐다. 차려줬던 그 수많은 밥상은 내 뇌 속에 각인되어 있다. 투정부리는 건 일찌감치 그만뒀다. 다만 가만히 그때를 그리워한다.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속으로 되뇐다. 그리고 내게 묻는다. ‘나도 누군가에게 예술가가 될 수 있을까?’라고.
김연우 <조선대 국문과 3년, 청년인문학 소피움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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