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육인가, 본성인가?

▲ 클림트의 ‘엄마와 아기’
 아이들이 큰 소리로 책을 읽는다
 나는 물끄러미 그 소리를 듣고 있다
 한 아이가 소리 내어 책을 읽으면
 딴 아이도 따라서 책을 읽는다
 청아한 목소리로 꾸밈없는 목소리로
 “아니다 아니다!” 하고 읽으니
 “아니다 아니다!” 따라서 읽는다
 “그렇다 그렇다!” 하고 읽으니
 “그렇다 그렇다!” 따라서 읽는다
 외우기도 좋아라 하급반 교과서
 활자도 커다랗고 읽기에도 좋아라
 목소리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고
 한 아이가 읽는 대로 따라 읽는다
 
 이 봄날 쓸쓸한 우리의 책 읽기여
 우리나라 아이들의 목청이여
 - 김명수 ‘하급반 교과서’
 
 부모의 믿음은 때로 아이의 자기 자신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게 한다.

 피아노를 그만두게 된 배경이 있다. 더듬더듬 건반을 누르는 누나가 신기했던지 장기에 한창 빠져있던 세 살 터울 남동생이 엄마를 졸라 같은 학원에 등록했다. 그것이 발단이었다. 3개월이 지나자 동생은 나와 진도가 같아졌고, 6개월이 지나자 교본을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질투심에 몸부림치던 나는 피아노를 그만 두겠다고 엄마에게 선전포고를 했고 그 이후 내 수준은 ‘나의 살던 고향은’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얼마나 알량한 자존심인가하며 아직도 종종 헛웃음 짓지만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같은 판단을 되풀이 할 것이다. 2000년 이전이란 남자와 여자에게 기대하는 재능과 소질의 영역이 달라서, 남동생은 태권도와 바둑과 장기를, 나는 피아노와 미술을 공부하기를 할아버지는 바랐었다. 그러나 동생은 운동 이외의 모든 잡기를 좋아하는 방구석 ‘샌님’, 나는 가방을 던져놓고 마실 나가면 배가 고프다 못해 아파야 돌아오는 ‘탕아’였다.

▲재능·선천성은 고려되지 않은 교육

빈 서판, 사이언스북스.
 
 끌끌 혀를 차는 할아버지의 따가운 눈총을 뒤로 하고 나는 나대로 동생은 동생대로 살았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인간에게는 고유의 인생이 따로 있으니 너네는 너네대로 ‘알아서 살라’는 주의였던 부모님께 감사드린다. 엄마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와는 영 동떨어진 분이셨다. 맹자의 어머니는 현모의 대표적 본보기이며, ‘환경이 인간을 만든다’는 경험론의 시초라 할 만하다. 무덤 근처로 집을 옮기니 아이가 매일 곡소리를 흉내 내며 놀고, 시장 근처로 옮기니 값을 흥정하며 놀고 서당 근처로 옮기니 천자문 소리를 따라 공부에 몰입하더라는 일화. 만약 구성지게 곡하며 노는 나를 보았다면 엄마는 어떻게 했을까? 맹자의 어머니는 학문을 닦아 이름난 학자가 되거나 무예를 익혀 세상을 호령하는 장수야말로 인간다운 인간의 전형이라 보았으니 세 번 집을 옮겼을 터. ‘무엇이 되거나 어떻게 살거나’의 기준이란 따로 있는 게 아니라고 믿었던 엄마라면 “얘가 여기 소질이 있네”하고 신기해하셨을 것이다. 물론 안타깝지만 백년을 무덤가에 살더라도 내가 소리를 하게 될 일은 없다. 난 자타공인 고음불가 음치니까. 마찬가지로 한때 시장 너머에 살았지만 내가 물건 값을 흥정하고 노는 일도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숫자라면 질색이니까. 마지막으로 우리 집이 서당 근처였다면 어땠을까? 아이들을 모아 김홍도 그림처럼 ‘훈장님과 매 맞고 우는 아이’ 놀이를 했겠지. 하지만 그건 환경의 영향이라기보다는 내가 가지고 태어난 자질, 선천적 본성의 힘이 더 크다. 그래서 생각해본다. 환경에 자기를 찰떡궁합 맞춰 적응했던 맹자는 진정 수재였을 거라고.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인간이 노래와 수, 글월에 두루 심취할 수 있단 말인가. 또 한편 갸웃해본다. 맹자가 문장 아닌 타고난 소리꾼이거나 개성상인처럼 불세출의 급전능력과 시류를 내다보는 사업능력을 가지고 태어났다면 어땠을 것인가. 그럼에도 어머니는 곡진한 사랑으로 서당에서 학당으로, 유명한 선생의 문하로 맹자를 데리고 옮겨 다니지 않았을까.

 하워드 가드너가 발표한 다중지능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뇌에는 언어, 논리수학, 공간지각, 신체운동, 대인관계, 자연 친화, 자기이해의 지능영역이 있으며 대부분 사람들은 여덟 가지 지능 중 두세 개의 영역에 강점을 갖고 태어난다고 한다. 전부 뛰어나기는 어렵다는 것. 그러나 미국의 심리학 교수이자 행동주의교육의 주창자인 존 왓슨의 글이 말해주듯, 20세기까지만 해도 가정에서의 양육과 학교교육에 있어 아이가 지닌 기질과 선천성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안드레이 라브스킨, 17세기의 학교.

 나에게 열두 명의 건강한 아이를 주고 내가 직접 꾸민 세계에서 그 아기들을 키우게 한다면 나는 어떤 아기라도 그 재능·기호·경향·능력·소질, 조상의 경력과는 무관하게 내가 선택한 유형의 사람, 즉 의사, 변호사, 예술가, 상인, 심지어 거지나 도둑으로 길러낼 수 있다. - 존 왓슨
 
▲‘나와 너의 다름을 자각한다’는 것
 
 본능이나 유전보다 환경에 의한 인간의 변화를 강조했던 왓슨의 주장은 18세기 존 로크의 ‘빈 서판’이론에 기대있다. 로크는 ‘인간은 누구나 백지상태로 태어나며 환경과의 상호작용, 즉 경험에 의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경험론의 원조다. 왕족과 귀족, 백인과 흑인 등 혈통주의와 인종주의로 기득권이 자신들의 이권을 정당화하던 때, 누구나 똑같은 백지상태로 태어난다는 로크의 자유주의 사상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누가 아니겠는가. 천재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길러진다지 않는가. 드높은 학식, 누구라도 매혹될만한 인품과 에티켓을 가진 사람은 그럴만해서가 아니라 교육을 제공받을 충분한 기회와 돈을 물려받았기 때문이라잖은가. 로크의 사상은 인간은 누구나 존엄하다는 천부인권사상과 평등주의를 널리 퍼뜨렸다. 그러나 인간존엄을 위해 ‘나와 너의 시작이 모두 공(空)’임을 주장한 빈 서판 이론은, 적절한 자극만 가한다면 무엇으로든 키울 수 있다는 전체주의를 낳았다. ‘입력하면 출력된다’는 자판기식 교육관. 그러나 같은 수업을 해도 서로 다른 결과가 나오는 건 아이가 게으르거나 해찰을 해서가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이다.

클림트 음악.

 역량과 취향이 다르기에 인간이다. 인간은 우주에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인식하는 몇 안 되는 종이다. ‘나를 인식한다’는 건 ‘나와 너의 다름을 자각한다’는 것. 신은, 전지전능하기 이전에 하늘과 땅을 통틀어 ‘나와 같은 자는 아무도 없음’을 최초로 자각한 자였을 터. 신이란, 능력과 물질을 원하는 대로 다루는 힘이 아니라 개개인의 독자성과 유일무이함을 깨달은 자를 일컫는 말이어야 한다.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갖는다는 말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무엇이 되고 어떤 시간을 살지 선택하고 결정할 권리가 스스로에게 있다는 선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언제나 0이다. 0은 존재가 사건을 만들며 나타났다 사라지는 시공이고, 하나의 결과로 수렴되는 소실점이며, 확장되는 정신의 우주다. 갓 태어난 아기도, 삶의 완숙기를 보내는 중년도 생의 황혼을 돌아보는 노년도 오늘은 알 수 없는 미래로, 0으로 항해하고 있다.
박혜진 <문예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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