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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눈, 청년의 인문학]지나 사피엔스(Gyne Sapiens), 레너드 쉴레인  
서로를 이해하게 될 때 우정도 빛나리라
협상(協商), 모두를 승리자로 만드는 아름다운 설전(舌戰)
김시인
기사 게재일 : 2018-06-11 06:05:01
▲ 그날의 협상에서 능구렁이 소손녕의 안전한 미끼를 꾀돌이 서희가 살짝 물어줌으로써 두 나라는 전쟁 없이 모두 승리자가 되었다.
 몇 만년 전의 열띤 토론

 “아담이 드디어 그것을 깨달은 것같아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그 멍청한 얼간이가 내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어요.”
 “어떤 표정이었죠”
 “뭐랄까? 들소 엉치뼈로 대가리를 얻어맞은 표정? 그러더니 아이를 봤다가 나를 보고, 나를 봤다 아이를 보고. 그 멍청이가 자기가 아이 아버지란 걸 알아차린 듯해요.”

 “우리 여자들은 수많은 계절 전부터 우리의 아이들 하나하나가 특정 남자 하나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 하지만 그 남자 멍청이들이 이 사실을 안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어.”

 “이제 아담이 알았으니 어떻게 하죠. 아마 그는 이 비밀을 다른 남자들에게 말하겠지요. 기리고 그들은 그들이 누려왔던 커다란 자유를 조금이나마 포기할 거예요. 우리 여자들의 몸을 가지고 재미만 보던 습성을 버리고 우리와 함께 사는 법을 배우겠지요. 제 자식이 누구인지를 알려면 우리에게 협조하지 않으면 안되니까요. 하지만 아담의 깨달음은 우리에겐 슬픔이기도 해요.“

 “어째서요”
 “남자들이 특정 아이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자기 아이를 가진 여자를 감독하려 들 테고, 또 그녀가 자기하고만 즐기도록 강요할 거예요.”

 “말도 안돼. 우리 여자들은 언제 어디서나 원하기만 하면 놈들을 가질 수 있어. 관심만 조금 내보이면 줄을 선다고. 걔들은 너무 쉬워.”

 “남자들은 불확실한 미래를 두려워 해요. 그런 그들이 핏줄의 비밀을 아는 순간 큰 변화를 겪을 거예요. 남자들은 자기가 죽더라도 자기 핏줄이 살아있다면 자기도 살아있는 거라고 생각할 거란 이야기죠. 그러면 그들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으로는 살지 못해요. 아무나 붙잡고 섹스하는 버릇도, 싸질러놓고 나몰라라 하는 무책임한 짓도 더 이상 하지 않을 거란 이야기죠. 제 핏줄을 확인하고 키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지요. 그들은 아마 조만간 모든 남녀가 한 쌍씩 짝을 지어 살자고 제안할 거예요. 우리 여자들은 그 제안을 받아들여야만 해요.”

 “이브, 그들이 우리를 길들이기 위해 위협과 협박을 하게 될 것이 뻔한데도 왜 그렇게 해야 하지? 나는 자유롭게 살고 싶어. 내가 맘에 드는 남자를 골라서 즐기고 싶단 말이야.”

 “즐기는 게 많으면 잃을 것도 많지요. 이 문제는 그들에게도 가혹해요. 그들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우리를 믿어야만 하고 그래서 우리에게 신뢰를 쌓는 고통을 감수해야만 해요. 우리도 고기 한 덩이 얻기 위해 언제까지 이놈 저놈에게 추파를 던져야 하나요? 이제 우리는 결론을 내려야 해요.”
 - 지나 사피엔스(Gyne Sapiens), 레너드 쉴레인

무모하고 무익했던 전쟁을 늙은 살라딘은 몸으로 접었고 젊은 리차드는 마음으로 접었다.

 몇 만년 전쯤 인류는 실제로 이 문제를 두고 진지한 토론을 벌였을까? 결혼과 부부와 가정이라는 풍습과 문화를 정착시킨 때야 물론 신석기지만 어렴풋이나마 자기의 씨를 느끼게 된 때는 그보다 훨씬 전이리라. 처음 그들이 핏줄이라는 묘한 것을 발견했을 때의 당혹감을 지금의 우리가 과연 느낄 수 있을까? 몇 만년 또는 몇 십만년에 걸친 인지능력의 발전을 한 장의 꽁트로 압축시킨 어색함을 제외하면 이건 실감의 극치다.

 한 가지 궁금한 건 이런 지나(여자)들의 토론처럼 호모(남자)들의 은밀한 회합도 틀림없이 있었을 터인데, 그들은 또 어떤 충격과 열띤 토론으로 그 시간을 보냈을까 하는 점이다. 하지만 명백한 것은 하나 있다. 아담의 친구 호모들과 이브의 친구 지나들은 당면한 문제를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여 진화를 지속했다는 것이다.더구나 문제를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서로를 적대적인 적으로 간주하지 않고 공생의 관점에서 해결책을 찾았다는 게 중요하다. 만약 그들이 특정 아담과 특정 이브의 권고를 무시했다면 오늘날의 문명과 문화는 없다. 호모 사피엔스도 지나 사피엔스도 부재(不在)다.
 
▲평화의 도시에서 만난 두 마리 사자
 
 1187년 예루살렘, 종전(終戰)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슬람의 술탄 살라딘과 십자군의 지휘자 리차드 1세가 전쟁을 끝내는 막바지 협상에 돌입한 것이다. 십자군 전쟁은 성전(聖戰)이 아니었다. 교황 우르반의 정치적 탐욕이 부른 추악한 전쟁이었다. 오랜 전쟁에 지친 두 지도자는 종전의 결단을 내렸다. 그러나 평화가 쉽게 오지는 않았다. 평화를 싫어하는 무리들은 어디에나 있다. 평화 그 자체를 싫어한다기보다는 전쟁이 가져오는 막대한 이익이 있기에 평화를 기피하는 것이다.

 영국의 왕 리차드를 평화주의자라고 말하는 역사학자들은 하나도 없다. 그의 닉네임이 사자심(獅子心, Lionheart) 왕이라는 것만 봐도 그는 평화하고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십자군 원정을 떠난 이유도, 원정을 위해 영지와 성을 비롯한 전 재산을 모조리 팔아치워버린 것도 성전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리차드에게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 전쟁 자금이 필요할 뿐이었다. 그가 팔아치운 그의 전 재산은 승리 후에 돌아오는 엄청난 땅과 돈에 비하면 적은 비용이었다.

 사자 왕은 왜 순한 양이 되었을까? 세계사에서 위대한 대왕이라 일컫는 알렉산드로스를 꺾어버린 유일한 적이 무엇이었던가? 그에게는 적이 없었다. 대제국 페르시아마저 그 앞에 무릎을 꿇은 것만 봐도 그의 용맹함은 비길 데가 없다. 그러나 그의 적은 평화였다. 더 이상 전쟁을 원하지 않는 그의 부하들과 병사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장수는 없다. 전쟁 이외에 다른 삶의 철학이 부재했기에 대왕 알렉산드로스는 몸을 향락으로 굴리다 하찮은 병에 객사하고 만다.

 십자군의 지휘자도 그랬다. 몇 년을 끌어온 비극적인 전쟁은 이미 그의 군영에서부터 패배하고 있었다. 그의 성전에는 성심(聖心) 없는 물심(物心)으로 충만해 있었기에 성전이 될 수 없었다. 리차드는 전쟁을 끝내고 싶었다. 그러나 전쟁은 상대가 있는 법, 그의 적도 같은 마음이어야 종전이 성사된다. 이심전심일까? 술탄도 평화를 원했다.

 종전과 평화의 길에는 신뢰가 필요하다. 리차드는 살라딘을 깊이 신뢰하고 있었다. 전투 도중 리차드가 탄 말이 이슬람군의 활을 맞고 쓰러지자 말에서 떨어진 리차드는 위기에 처한다. 그 광경을 지켜본 살라딘은 즉시 말을 보내 그를 돕는다. 이적(利敵) 행위다. 리차드가 병에 걸려 몸져누웠을 때도 살라딘은 자기 주치의를 보내 치료를 돕기도 했다. 역시 이적(利敵) 행위다. 평화로 가는 길에는 이렇게 두 사람이 쌓은 우정이 신뢰의 바탕이 되었다.
 
▲협상, 모두를 승리자로 이끄는 아름다운 설전
 
 “모두를 알라의 품으로 인도하되 가장 아름다운 방법으로 그들을 맞이하라.”
 무슬림의 이슬람 포교는 기본적으로 평화다. 가장 아름다운 방법이란 설교(說敎)라고 한다. 입으로 하는 설득과 설교는 얼마나 평화로운가.

 곰과 호랑이가 쑥과 마늘을 물고 동굴 속으로 들어간 연유는 무엇인가? 신화에서 상징과 메타포를 벗겨내면 그대로 역사가 된다. 환국(桓國)과 웅국(熊國), 그리고 호국(虎國)의 지도자들은 정상회담을 벌이고 있다. 강자만이 살아남는 부족 간의 치열한 전쟁에서 생존하기 위해 부족통합의 협상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상대적 강국인 환국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동굴로 비유된 협상장에는 환국의 대표도 주먹을 내려놓고 설전을 벌였다.

 그날의 절박했던 협상에서 승자와 패자는 누구였던가? 확실히 패자는 호국이었다. 호랑이는 그 누구도 설득시키지 못했다. 호국의 대표는 환국 대표의 세련된 외교적 수사도, 웅국 대표의 끈질긴 인내와 설득도 갖지 못했다. 자기 주장만 으르렁거리는 공갈과 협박은 이 협상장에서 먹히지 않는다. 호국 대표는 사흘 만에 협상장에서 뛰쳐나간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호국의 미래는 어찌 되었을까? 국가통합의 대장정에서 멀어진 약소국의 운명을 말해 무엇하랴.

 동굴 속의 최대 승자는 누구일까? 모두가 환국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결코 아니다. 가장 빛나는 영광은 웅국의 몫이 되었다. 우수한 금속기술을 이용해서 군사강국으로 발돋움한 환국이 부계상속으로 모든 것을 거머쥔 듯 보이지만 내실은 웅국의 차지가 되었다. 국가통합 이후 조선의 문화는 모조리 웅국의 문화로 지배되었다. 첨단의 금속기술은 웅국의 문화를 빛내는 수단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창조하지 못했다. 조선의 백성들은 스스로 곰의 후손이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지 않는가

 아름답게 빛나는 협상과 설전이 어디 그뿐이던가? 10세기 말 고려국 서희와 거란국 소손녕의 전쟁 협상은 오랜 얘깃거리다. 우리는 애국적(?) 차원에서 서희의 훌륭한 외교술에 혀를 내두른다. 하지만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거대 국가의 군사령관이자 외교에 능한 행정가가 약소국 외교관의 세 치 혀에 놀아났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날의 승리자는 서희 말고 또 있다. 소손녕이다.

 거란의 목적은 전쟁에 있지 않았다. 송나라와 일전을 앞둔 거란은 고려의 발목을 잡아두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80만의 대군이라 뻥을 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10분의 1이라는 사실을 은근히 노출시킴으로써 싸울 의사가 없음을 내비치는가 하면, 3국간의 외교에서 ‘거란 패싱’ 운운하며 스스로 ‘망신’하는, 외교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수사를 늘어놓는 이유가 뭐겠는가? 타협하자는 얘기다. 그날의 협상에서 능구렁이 소손녕의 안전한 미끼를 꾀돌이 서희가 살짝 물어줌으로써 두 나라는 전쟁 없이 모두 승리자가 되었다. 얼마나 아름다운 협상이요 얼마나 황홀한 설전인가.

사자(獅子)의 섬 싱가포르에서 두 사자는 어떤 품격으로 조우하고 어떤 품격으로 설전(舌戰)할 것인가.
 
▲사자의 도시로 들어간 두 마리 사자에게
 
 몇 만년 전의 성(性)이 다른 인류의 조상들은 진지하게 마주앉아 미래를 의논했을 것이다. 씨와 혈통의 비밀을 알아버린 늦깎이 생부(生父)들의 고뇌와 그들을 맞이하는 생모(生母)들의 고민에 깊은 존경을 올린다. 그 충격적 인식을 딛고 사고의 대전환을 이룬 힘의 원천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진보를 위해 남자와 여자들은 달콤한 것들을 하나씩 내놓았다. 그들 남녀 사피엔스의 서로를 향한 애정어린 설득이 인류를 지속시킨 것이다.

 2018년 6월12일, 사자(Singa)의 도시(pore) 싱가포르(Singpore)에 사나운 사자 두 마리가 어울리지 않을 것같은 협상을 위해 마주한다. 그 둘을 바라보는데 왜 우리는 운명을 떠올리는 것일까? 구구절절 필요없이 우리는 그 두 마리 사자가 참을성없이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는 호랑이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뿐이다. 하나는 이기고 하나는 지는 싸움이 아닌 모두가 이기는 싸움이기를 바란다. 몇 만년 전의 지나와 호모들처럼, 환국과 웅국의 지도자들처럼, 고려의 서희와 거란의 소손녕처럼, 예루살렘의 살라딘과 리차드처럼!

 무모하고 무익했던 전쟁을 늙은 살라딘은 몸으로 접었고 젊은 리차드는 마음으로 접었다. 성지의 항구도시와 예루살렘을 기독교와 이슬람이 나눠 갖고 성지순례를 보장하는 종전협정에 서명하는 것 외에 두 지도자는 평화를 못마땅해 하는 정적들에게 위트 넘치는 똥침을 날린다.

 “내 손에 돈이 쥐어지면 내 발은 다시 이 땅을 밟을 것이오. 그때는 예루살렘이 내 것이 될 것이외다.”

 “예루살렘을 잃게 될 운명이 내게 찾아온다면 그때의 주인은 부디 그대가 되기를 바라오.”

 둘은 더 이상 싸울 의사가 없다. 다만 전쟁에 환장한 전쟁광들의 주둥이를 막기 위해 품격 있는 위트를 날렸을 뿐이다. 6월12일의 두 사자는 어떤 품격으로 조우하고 어떤 품격으로 설전(舌戰)할 것인가? 높은 덕망으로 적군의 사자를 순화시킨 살라딘의 다음과 같은 말은 사자의 섬에 오른 다른 두 마리 사자들에게도 큰 울림이 될 만하다.
 “서로를 잘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만나게 될 것이며 우리 사이의 우정도 빛나게 될 것이다.”
김시인 <인문학공간 소피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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