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제할 수 없는 너

▲ 앤디 워홀 실크 스크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에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기술복제시대의 감성

 황지우의 시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 풍기는 서정성을 아이들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왜 기다리는 일이 가슴 에린다는 거죠?” 오랜 타국 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는 가족이나 연인의 기상이변으로 인한 비행기 연착륙을 기다리는 일이 아닌 다음에야, 그따위로 오래 시간을 한 자리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은 카페주인에게도 나에게도 비효율적이고 못난 짓 아닌가. 그것은 오히려 나를 기다리게 하는 너의 무신경함을 내가 용납하는 것이며, 그래서 차라리 ‘네가 나를 이따구로 취급해?’ 라는 가볍거나 무거운 모욕감을 표현해야 마땅한 것 아닌가. 물론,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다면 약속을 후로 미루면 될 일이고. 시적 자아의 감성을 상상해보라는 부탁에 So cool, 10대 아이들이 날린 직구다.

 인간의 정서는 주관적이나 마냥 개인적이지만은 않은 것이, 개인의 정서는 시대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한 시대를 공유하는 집단에게는 그 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집단적 정서가 있다. 이른바 세대 차이다. 황지우 시인이 시를 발표한 1990년 만남의 장소는 시계탑이 서있는 광장, 혹은 어둑한 계단이 하강하던 다방이었다. 거리를 엿보기 맞춤인 창 넓은 오늘날 카페와는 달리 깊게 밀폐된 공간. 붉은 심장은 네가 오리라는 기대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사이에서 시계추처럼 흔들린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었다.

 연락이 쉽지 않았으므로, 기다리는 자는 오직 그가 가진 그리움과 신뢰의 무게만큼 기다림의 시간을 연장하며 자리를 지켜야했다. “기다릴게”란 말에 애틋함과 간절함의 기미가 풍기던 시절이었다. 이제 우리의 기다림은 20분을 넘지 않는다. 네가 늦는 확실한 이유를 알고 기다리는 나의 마음에는 감내해야하는 고독이 없다. 그리고 기다리는 동안에도 나는 너를 한순간도 기다린 것이 아니니, 내게는 핸드폰이 있기 때문이다. 기술복제시대의 대표 주자 핸드폰은 관계의 양상을 바꾸고 시간에 대한 감각을 바꿨다. 존재는 무의미해지고 관계는 가벼워졌다. 아우라의 상실이다.

앤디 워홀 캠벨스프.|||||
 
 ▲아우라의 복제 가능성

 독일의 유대계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아우라를 언급했다. 아우라(aura)는 후광, 광채를 뜻하는 그리스어. 종교적 숭배물의 장엄함을 나타내는 용어였으나 사람과 사물에서 풍기는 고유한 분위기와 기운을 뜻하는 의미로 확장되었다. 아우라를 풍기는 사람, 아우라를 풍기는 사물을 만난 적이 있는지. 저도 모르게 이끌려가는 듯한, 강한 감정을 동반한 기운이 아우라이다. 무엇보다 아우라는 예술작품 안에 살아있다.

셰익스피어가 르네상스를 대변하는 자유연애의 시초로 제기한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라. 열여덟 로미오가 로잘린에 대한 사랑을 잊고자 찾은 가면무도회에서 맞닥뜨린 것이 줄리엣이라는 아우라였다. 파멸할지언정 패배는 모르는 불굴의 인간성을 위해 헤밍웨이가 창조한 ‘노인과 바다’에서 산티아고는 거대한 청새치라는 아우라에 사로잡힌다. 한때,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는 문구를 유행시켰던 리처드 바크의 소설 ‘갈매기의 꿈’엔 삶에는 먹고 오래 살아남는 것 외에 또 다른 의미가 있을 거라고 믿는 갈매기 조나단이 나온다. 조나단에게 창공은 빛의 속도를 꿈꾸게 한 아우라였다. 그런데, 함대를 이끌고 아메리카에 도착한 백인과 맞닥뜨린 원주민들도 말 탄 흰 사람들에게서 아우라를 느꼈을까?

 내게 아우라는 아홉 살 무렵 ‘플란다스의 개’로부터 찾아왔다. 모두가 행복해야할 크리스마스이브, 차가운 성당 바닥에서 파트라슈를 안고 눈감은 네로의 모습으로 끝나는 마지막 장면은 예상을 빗나가 경악이었다. 마을 사람들의 이기심과 몰이해로 점점 궁지에 몰리는 네로와 파트라슈가 가엾으면서도 매 차시 챙겨봤던 건 ‘마지막은 다르더라’는 동화에 대한 나의 얄팍한 경험에 기댄 행복한 결말에의 기대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발견한 네로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가장 불행한 순간에 웃고 있다니 게다가 가장 참혹한 장면이 가장 아름다울 수 있다니. 훌쩍훌쩍 울었지만 이제는 그때의 슬픔이 인간의 성스러움에 대한 경외의 마음을 포함하고 있었다는 걸 안다.

 벤야민은 ‘복제 예술에 대한 이론’에서 ‘원본이 갖는 유일성’에 의해 촉발되는 아우라를 언급한다. 네로가 그랬다. 그림을 좋아하고 화가를 꿈꿨던 아이는 성당에 관람료를 내야 구경할 수 있는 루벤스의 성화(聖畵)를 보고 싶어 했다. “드디어 봤어. 하느님 이제 됐어요.” 무료관람의 기회가 온 저녁,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를 본 후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한 얼굴로 파트라슈를 끌어안고 행복해하던 지친 얼굴의 소년. ‘플란다스의 개’의 배경이 19세기가 아니라 현재라면, 네로는 인터넷에 접속해 언제든 루벤스의 작품들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접속해 동시관람이 가능한 이미지와 영화. 똑같은 크기로 복제된 사진들. 그로인해 소수 특권층만이 향유하던 예술작품을 다수가 자유롭게 즐기게 된 시대에 유일무이한 원본을 보고 느끼던 아우라는 사라져간다.

 이모가 선물한 파리야경의 에펠탑 엽서를 보고 유럽여행이 소원이던 아이는 파리에 다녀온 후 아쉬워하며 말했다. “엽서에 찍힌 에펠탑이 실제로 본 것보다 멋있었어요.” 복제본이 원본의 아름다움을 능가하는 포토 샵의 시대. 미리 기획되고 연출된 이미지에서 다시 새로운 이미지로, 사로잡히고 잊히는 시간이 찰나처럼 짧은 시대. 나만의 아우라가 아닌 모두의 아우라가 사랑받는 시대. 물론 벤야민은 복제기술의 발달이 불러온 아우라의 상실을 상쇄하는 예술의 대중화를 긍정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내게는 핸드폰이 복제기술의 화신(化身)이다. 기다림은 널 위해 나의 시간과 마음을 내어주는 것. 기다리는 동안 아직 오지 않는 너에게로 내가 이끌려가는 한번뿐인 현상. 핸드폰은 기다리는 동안 강렬해지던 너의 아우라를 내게서 빼앗아간 주범이다.
 
 ▲나는 원본이다

 그러나 실망은 이르다. 원본이 갖는 고유성이 아우라의 조건이라면 인간 모두에게는 개별의 아우라가 있다. 나는 유일무이한 원본, 만약 나를 복제한 복제인간이 있다고 해도 같은 생각과 기억을 공유하지는 않을 터. 아우라는 나의 고유함이다. 보조개 패는 볼, 엉뚱한 말로 웃기는 발랄함, 조근조근한 말투 등 외모를 비롯한 태도와 행동의 나다움이 모두 아우라다.

 때로 어떤 사람의 독특성이 마음으로 들어올 때 우리는 그를 모방함으로써 아우라를 복제하고자 한다. 대중의 기호를 움직이는 대중문화의 아이콘인 연예인과 샐럽들은 자신과 타인을 구분하는 아우라를 추구하는데 각종 리얼리티 방송과 오디션 프로그램, 페이스북과 유튜브에 등장해 인지도와 인기를 누린다. 혹 닮고 싶은, 복제하고 싶은 대상이 있는지. 복제하고 싶은 대상이 있다는 건 지향이 있다는 의미. 모방을 통해 자기만의 아우라를 찾아가는 것도 스스로 선택할 줄 아는 인간의 특권이자 아름다움이렷다. 타인의 아우라를 추종하고 그들이 바라는 대로 소비하느라 나의 아우라를 소홀히 여기지만 않는다면.
박혜진 <문예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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