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끝으로 몰린 작은 새들은 어디로 갔을까
광장을 잃은 청년들에게 - Quo vadis, amigo?

▲ 새들은 페루 리마의 해변으로 날아와 죽는다. 주인 없는 카페는 해변에 남았건만 정작 주인은 어디로 간 것일까.
 ‘그녀는 흐느꼈다. 그가 대책 없는 어리석음이라고 스스로 이름붙인 그 무엇에 다시 점령당하고 만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고, 자신의 손 안에서 모든 것이 부서지는 걸 목격하는 일에 습관이 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늘 이런 식이었으므로 속수무책이었다. 그의 내부에 있는 무언가가 체념을 거부하고 줄곧 희망이라는 미끼를 물고싶어 했다. 그는 삶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황혼의 순간 문득 다가와 모든 것을 환하게 밝혀줄 그런 행복의 가능성을 은근히 믿고 있었다. 어떤 실패로도, 어떤 뻔뻔스러움으로도 없앨 수 없는 무구함이, 스페인 전장에서 베르코르드의 지하운동으로, 쿠바의 시에라 마드레 산으로, 그리고 마침내 모든 것을 잃은 듯한 결정적인 체념의 순간에 다가와 또다시 사람을 부추기는 두세 명의 여자들에게로 그를 밀어붙인 환상의 힘이. 다른 사람들이 트라피스트 수도원으로 들어가거나 히말라야의 동굴에서 생을 마치듯이, 그는 이곳 페루의 해변까지 도망쳐오지 않았던가.’
- 로맹 가리,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남자의 독백이 바다의 물결처럼 일렁이는 이곳은 페루 리마의 해변. 쉰을 바라보는 늙은 청년 자크 레니에가 위험하다. 그를 위기로 몰아넣은 범인은 다름아닌 그의 심장. 그의 이성(理性)은 끊임없이 덧없는 희망을 버리라 요구하지만 꿈틀거리는 뜨거운 심장은 항상 차가운 머리를 무색케 한다. 여느날과 똑같은 차가운 바람이 부는 그곳 페루의 해변, 모든 섬들에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날아와 모래 위에 처박힌 새들의 차디찬 심장들이 널린 리마 해변에 뜨거운 건 오직 그의 심장 뿐이다.

 자크 레니에는 뜨거운 남자였다. 원래 뜨거운 남자여서 뜨거운 심장이 필요한 곳을 찾아다녔는지, 아니면 뜨거운 ‘이념’이 그의 찬 심장을 데웠는지 알 수는 없으나 그의 젊은 시절은 뜨거웠다.

 20세기로 들어서는 길목에는 혁명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세계의 도처에서 저열한 제국의 만행을 종식시키기 위한 불온한 혁명의 기운이 ‘유령처럼’ 출몰하기 시작했다. 이 혁명의 방도는 이미 전(前) 세기에 준비되어 있었다. 위대한 이념의 불 속으로 뛰어들 젊은 불쏘시개들이 날아와주면 혁명은 아름답게 불타오를 것이었다. 자크 레니에도 한때 그 불을 타오르게 한 젊은 연료였다.

 그의 친구들은 어디로 갔는가? 레닌은 어디에 있는가? 게바라는 어디로 갔는가? 카스트로는 무얼 하고있는가? 그람시는? 마오는? 폰세카는? 어떤 이유인지 알 길은 없으나 이제 그의 심장은 뜨겁지 않다. 자크 레니에는 ‘되고싶지 않은 얼굴’을 목에 붙이고 혁명과 동지를 잃어버린 채 죽기 위해 flak 해변으로 날아든 새들처럼 퍼득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희망이라니. 가녀린 새 한 마리가 그의 품으로 날아들어 그의 식어버린 심장을 달궈놓다니. 이건 그의 그림에 없었다. 하지만 속수무책이다. 그의 심장이 뛴다. 위기의 이 남자 자크 레니에, 어쩔 셈인가
남쪽에도 북쪽에도 광장은 없었다. 타락한 시장(市場)과 공허한 광장(廣場)만이 스산하게 두 공화국에 나뒹굴 뿐.
 
▲사라진 광장, 잃어버린 혁명
 
 “이게 무슨 인민의 공화국입니까? 이게 무슨 인민의 소비에트입니까? 이게 무슨 인민의 나랍니까? 제가 남조선을 탈출한 건, 이런 사회로 오려던 게 아닙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아버지가 못 견디게 그리웠던 것도 아닙니다. 무지한 형사의 고문이 두려워서도 아닙니다. 제 나이에 아버지 없어서 못 살 건 아니잖아요? 또 제가 아무리 미워도 아버지가 여기서 활약하신다고 그들이 저를 죽이기야 했겠습니까? 저는 살고 싶었습니다. 보람 있게 청춘을 불태우고 싶었습니다. 정말 삶다운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남녘에 있을 땐, 아무리 둘러보아도, 제가 보람을 느끼면서 살 수 있는 광장은 아무 데도 없었어요. 아니, 있긴 해도 그건 너무나 더럽고 처참한 광장이었습니다.”
- 최인훈, ‘광장’

 남자의 절규가 바다의 파도처럼 몰아치는 여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서른도 안된 젊은 철학도(哲學徒) 이명준이 위험하다. 타락한 자본주의의 시궁창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버지가 있는 인민의 공화국으로 월북했건만 여기에도 그가 꿈꾸던 ‘광장’이라는 인민의 유토피아는 없다.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켰던 혁명가들은 어느새 ‘앵시엥 레짐’으로 변태되어 흉악스럽게 아귀를 벌리고 있었다.

 남쪽에는 광장이 없었다. 모든 인민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제시하는 공공의 선(善)도 공공의 이념도 공공의 담론도 없었다. 공공의 광장을 폐쇄시킨 자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누구도 광장을 만들지 않았고 누구도 광장을 역설하지 않았다. 개인의 물질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만이 신의 계시인 것처럼 치부되었다.

 ‘동물농장’이 되어버린 공화국은이명준에겐 악취일 뿐이었다. 혁명가들은 관리가 되었고 문학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이상한 옷을 걸치고 있었다. 언론은 소설이 되었고 소설은 언론이 되었다. 공화국의 광장에는 낡은 깃발만이 나부끼고 있었다.

 체념이란 때로 안전하고 때로 위험하다. 극단의 체념은 위험하지만 적당한 체념은 안락하다. 뒤늦게 혁명의 깃발을 흔들었던 순진한 혁명가 이명준은 광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작은 ‘밀실’을 마련하고 보잘것없는 쾌락과 왜소한 행복에 취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이 어린 부르조아의 향락을 눈감아줄 것인가
페루 해변의 작은 모래언덕 위의 카페 안에서 작은 새 두 마리가 원초적으로 뜨겁게 퍼득거리는 건 무죄(無罪)요 유미(唯美)다굙
  
▲은밀한 행복, 밀실로 날아든 작은 새들
 
 ‘그녀는 줄곧 눈을 감고 있었다.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그는 그렇게 순수한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이윽고 그녀는 눈을 뜨고 적선이라도 구하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가슴 아래 두 마리의 새가 살아서 파닥거리는 것 같았다.’

 ‘그는 저항하려 애썼다. 그를 무너뜨리려고 고독의 아홉 번째 파도가 다가온 것뿐이었다. 그는 그것에 휩쓸리기를 거부했다. 다만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고 몇 초만 더 그 젊음을 들이마시고 싶을 뿐이었다.’
- 로맹 가리,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혁명을 잃어버린 남자에게 밀실은 허용됨이 마땅하다. 아마도 이 남자는 생을 마감하려고 이 해변으로 온 것이리라. 아니 그보다는 생을 정리해가는 장소로 이만한 데가 없어서 땅끝이자 세상끝처럼 보이는 페루의 해변을 골랐으리라. 신화가 살아숨쉬는 안데스의 고원보다는 전설 없는 모랫벌이 나을 때도 있다. 사연이란 늘 사람을 질척거리게 할 뿐 사람을 피로하게 만든디고 생각하던 그였으므로.

 ‘희망’이란 ‘부질없는 꿈’이라 적힌 자크 레니에의 사전이 금방 바뀌는 망측한 상황을 참아내기 어렵지 않은 건 무엇 때문일까? 그의 심장이 식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가슴에 혁명은 남아있지 않고 그의 손을 맞잡은 동지들은 떠나갔다. 그러나 심장을 뛰게 만드는 것이 어디 혁명 뿐이라던가? 피를 끓게 하는 건 얼마든지 있다. 초라한 몰골의 키호테 선생이 노구(老軀)를 이끌고 창칼 비껴쥐고 당찬 여행을 떠난 것이 어디 위대한 십자군이어서 그랬던가? 한 조각 ‘둘씨네아’ 낭만도 주름살을 분기탱천하게 만드는 법이다. 그래서 페루 해변의 작은 모래언덕 위의 카페 안에서 작은 새 두 마리가 원초적으로 뜨겁게 퍼득거리는 건 무죄(無罪)요 유미(唯美)다.

 ‘동굴의 입구는, 그 틀처럼 모서리가 반듯하지는 않았다. 모서리가 부서진 네모꼴처럼 엉성한 데다가, 가장자리에 길쭉길쭉한 잡초가 무성하게 뻗어 있다. 그런 대로, 그렇게 열린 공간이 뚜렷했고, 내리 맑은 날씨로 아물거리는 아지랑이 속에 펼쳐진 풍경은 아름다웠다. 이 굴에세 풍경을 보기 비롯하면서, 세상에 있는 모든 풍경은 다 아름답다는 것을 알았다. 왼쪽으로도 막히고, 오른쪽으로도 막히고, 아래위도 가려진 엉성한 구멍을 통하여, 명준은 딴 세계를 내다보고 있었다. 굴 속, 손바닥만한 자리에 짐승처럼 웅크리고 앉아서, 전차와 대포와 사단과 공화국이 피를 흘리고 있는 저 바깥 세상을 구경꾼처럼 보고 앉은 자기의 몸가짐을 나무라기에는, 이명준은 너무나 지쳐 있었다. 훈훈한 땅김이 자기 체온처럼 느껴지는 동굴 속에서, 이명준은 땅굴 파고 살던 사람들의 자유를 부러워했다. 땅굴을 파고 그 속에 옆드려 암수의 냄새를 더듬던 때를 그리워했다. 이렇게 내다보는 풍경은 아름다웠다. 원시인의 눈에는, 모든 게 아름다웠을 게다. 저 푸짐한 햇빛들의 잔치. 이 친근한 땅의 열기. 왜 우리는 자유스럽게 이 풍경을 아름답다고 보지 못하는가.’
- 최인훈, ‘광장’

 광장을 잃어버린 남자에게 밀실은 허용됨이 마땅하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이념과 이념이 대립하고 총칼과 총칼이 맞서는 곳에서도 사람의 따뜻한 숨결은 그 온도를 잃지 않는다. 지옥같은 낙동강 전선에서도 청년 이명준은 태초의 동굴에서 지켜야 할 작은 밀실을 붙잡고 있다. 이제 밀실은, 그리고 그 밀실 안에 고이 모셔온 작은 새는 그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내야 할 광장과도 같은 이념이고 혁명이다. 혁명이란 어쩌면 뜨겁고도 원초적인 인간의 무두질이며 광장이란 어둡고도 안온한 동굴이 아니었을까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광장과 혁명은 거대한 인공적 물질이거나 무심한 추상적 관념이 아닌, 동굴 속에 어여삐 누운 여자의 살진 배와 붉은 입술이 아니었을까? 이명준이 마침내 찾은 광장과 혁명이 그것이라면 그건 이 남자의 것이어야 한다. 러시아의 붉은 혁명에 프롤레타리아가 어디 볼셰비키 당원증이 탐나서, 아니면 페테르부르크의 저택을 손에 넣고자 그 행렬의 선두에 섰던가? 그리하여 한반도 남쪽 낙동강변 어느 산자락의 동굴 안에서 작은 새 두 마리가 원초적으로 뜨겁게 퍼득거리는 건 무죄(無罪)요 유미(唯美)다.
항해를 시작하면서부터 줄곧 따라와 그를 괴롭힌 새 두 마리. 그건 그가 잃은 밀실의 사랑이었던가.
  
▲새들은 페루의 파도 속으로, 그리고 남지나의 바다 속으로
 
 ‘그녀는 층계를 내려가고 있었다. 그녀가 맨발로 모래 위를, 죽은 새들 한가운데를 걸어가는 것을 그는 보았다. 그녀의 손에는 스카프가 들려 있었다. 그는 인간의 손으로도, 신의 손으로도 덧붙일 것이 없는 순수한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떠나갔다.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여자는 모래언덕 꼭대기에서 걸음을 멈추고 잠시 주저하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 로맹 가리,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무덤 속에서 몸을 푼 한 여자의 용기를, 방금 태어난 아기를 한 팔로 보듬고 다른 팔로 무덤을 깨뜨리고 하늘 높이 치솟는 여자를, 그리고 마침내 그를 찾아내고야 만 그들의 사랑을.’

 ‘바다. 그녀들이 마음껏 날아 다니는 광장을 명준은 처음 알아본다. 부채꼴 사북까지 뒷걸음질친 그는 지금 핑그르르 뒤로 돌아선다. 제정신이 든 눈에 비친 푸른 광장이 거기 있다.’

 ‘큰 새 작은 새는 좋아서 미칠 듯이,물 속에 가라앉을 듯, 탁 스치고 지나가는가 하면, 되돌아오면서, 그렇다고 한다.’
- 최인훈, ‘광장’

 리마 해변의 남자에게도, 강변 동굴의 남자에게도 수수한 밀실은 허락되지 않을 모양이다. 두 남자를 둘러싼 세계는 여전히 낯설고 날선 이념으로 ‘작은 새’를 처단하고 있다. 그대의 뜨거운 심장을 차가운 바다에 담가 식히라고, 남이 정해놓은 이데올로기를 선택하라고. 그러나 살아있는 한 심장은 뜨겁게 뛸 것이며 사람을 떠난 이념을 사람을 벨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불온하고 완강한 두 남자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그는 이제 그곳에 없었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카페는 비어 있었다.’

 ‘타고르호는, 흰 페인트로 말쑥하게 칠한 삼천 톤의 몸을 떨면서, 한 사람의 손님을 잃어버린 채 물체처럼 빼곡이 들어찬 남지나 바다의 훈김을 헤치며 미끄러져 간다.’

 카페에 그 남자가 없다. 어디로 갔을까? 타고르 호에도 그 남자가 없다. 어디로 갔을까? 그들에게 남은 건 바다와 파도 뿐이었는데. Quo vadis, amigo?
김시인 <인문학공간 소피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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