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많은 말

▲ 고흐, 밤의 카페테라스.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세상의 말들이 달라졌으리라
 봄은 떠난 자들의 환생으로 자리바꿈하고
 제비꽃은 자주색이 의미하는 모든 것으로
 하루는 영원의 동의어로
 
 인간은 가슴에 불을 지닌 존재로
 얼굴은 그 불을 감추는 가면으로
 새는 비상을 위해 뼛속까지 비우는 실존으로
 과거는 창백하게 타들어간 하루들의 재로
 광부는 땅속에 묻힌 별을 찾는 사람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 가슴 안의 시를 듣는 것
 그 시를 자신의 시처럼 외우는 것
 그래서 그가 그 시를 잊었을 때
 그에게 그 시를 들려주는 것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세상의 단어들이 바뀌었으리라.
 눈동자는 별을 담는 그물로
 상처는 세월이 지나서야 열어 보게 되는 선물로
 목련의 잎은 꽃의 소멸로
 죽음은 먼 공간을 건너와 내미는 손으로
 오늘 밤의 주제는 사랑으로.
 
 - 류시화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초식동물의 언어

 ‘문맹’을 사서 읽기 시작한 건 작가 김연수의 추천사 때문이었다. 옛 삼중당 문고판처럼 손에 잡히는 작은 크기에 양장으로 처리된 책은, 얇다. 그러나 책이 독자에게 열어주는 상상과 사유의 세계는 책의 두께, 낱말의 양과 비례하지 않는다. 김연수는 밝혔다.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을 생각한다. 그것도 뒤늦게 배운 외국어로. 그는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할 수 있는 말만을 골라서 쓸 것이다. 말은 가난해진다. 그리고 그를 둘러싼 세상은 단순해진다”고. 단번에 매료되고 말았다. 동시에 어렸을 적 몇 년을 두고 지켰던 아침의 습관이 이상하게, 떠올랐다. 엄마가 주던 둥글고 갈색인 알약이 있었다. “반드시 씹어서 먹어야 한다”는 지엄한 명. ‘약’의 세계에는 빨갛고 파란 신호등을 건너는 규칙처럼 하늘에서 정해준 율법이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나는, 하루 한 번 약을 꼬박꼬박 씹어서 삼켰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밀기울을 갈아 굳힌 것 같은, 비를 맞고 죽은 늦가을의 풀 같은 맛이었다.
 
 할 수 있는 말이 어른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은 어린 아이의 세상은 단순하고 취약하다. 당연하게도 나의 언어가 아닌, 내가 의지하는 어른들의 말에 기대어 살던 시절이었다. 나의 생각이 아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르쳐준 말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던 시절이었다. 스물한 살의 나이로 스위스에, 전적으로 우연히 프랑스어를 쓰는 도시에 도착했을 때 그녀가 처음 배웠던 프랑스어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어쩌면 어린 내가 배워야했던 말들의 수위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들 아니었을까. 아기의 눈물이나 웃음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도움을 구하고, 나를 지키기 위한 말들은 상처입기 쉬운 초식동물의 언어이며 어린이의 언어이고 망명자의 언어. ‘문맹’을 읽으며 내가 어린 시절을 떠올린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어른과 어린 나. 아고타 크리스토프와 그녀를 도우려던 선량하고 단순한 스위스인들. 소통은 유예되었다. 묻고 답하는 형태의 언어는 소통이 아니다. 돕고 도움을 받기위한 말은 대화가 아니다. 소통은, 서로 다른 생각과 느낌을 동등한 입장에서 나눌 때 온다. 그래서 아이들은 자의식이 무럭무럭 자라는 빛과 그림자의 시절이 오면 어른 앞에서 주로 입을 굳게 잠그는 것이다. 확인을 위한 말은 대화가 아니므로, 내 안의 갈등과 혼란은 성숙의 징후이건만, 내비치는 순간 성급한 진단과 과장된 해법이 날아오게 될 줄 경험했기에.
 
 사춘기가 시작되자 아고타 크리스토프처럼 나도 입을 다물었다. 정치적 망명자인 그녀가 말을 읽을 수도 쓸 수도 없어 침묵했다면 나의 침묵은 부모님의 언어로부터 독립하기위한 본능적 침묵에 가까웠다. 그리고 스위스의 낯선 땅에서 그녀가 오빠와 지붕 위를 걷던 밤의 산책을 헝가리어로 꿈꾼 것처럼, 나는 저녁이면 낯선 자들이 사는 낯익은 세계, 책속으로 들어갔다. 직접 보고 만질 수 있는 세상보다 훨씬, 훨씬 더 많은 말, 말, 말들이 책에 있었다. 경험과 감각을 넘어서는 말들에 둘러싸여 황홀해하면서, 말을 신뢰하고 말을 숨 쉬고 말을 노트에 퍼뜨리면서, 나라는 존재의 물질성을 잊고 바깥의 사물들을 잊었다. 그때 만난 언어들에는 존재의 핵심, 불이 있었다.

아고타 크리스토프
 
▶이방인 아고타 크리스토프
 
 낱말과 낱말이 부딪힌다. 낱말이 낱말을 향해 머뭇머뭇 다가간다. 낱말과 낱말이 나란히 선다. 만남의 매력이 ‘사이’에 있듯 잘 벼려진 한 문장에는 낱말과 낱말 사이에 기묘하게 큰 공간이 스며있다. 가령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자신이 괴물이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네가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심연도 너에게 들어가 너를 들여다본다.” 같은 니체의 문장.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문장이 그렇다. 구도자의 무도(武道)처럼 수식이 배제된, 단순하고 마른 문체. 눈 위에서 타는 불같은 문장들. 어떤 문장들은 나를 작가가 가리키는 시간과 공간, 혹은 사물에게로 데려간다는 걸 그녀의 책으로 알았다. 어떻게 살면 이 같은 글을 쓸 수 있을까. 어떤 세계를 보고 겪으면 이처럼 언어가 정직해질 수 있을까. 말을 통해 존재를 눈앞에 드러내 보일 수 있을까. 하나 더 그녀의 소설을 읽으며 내가 느낀 건, 때로 어떤 진실은 허구를 통해서만 말해질 수 있다는, 묘한 역설.
 
 나는 실제로 일어난 일을 쓰려고 하지만 어떤 때는 사실만 가지고 이야기가 안 되기 때문에 그것을 바꿀 수밖에 없다고 그녀에게 말해주었다. 그리고 나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고 그럴 용기도 없는 나는 나 자신이 너무 괴롭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모든 것을 미화시키고 있었던 일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있었더라면 좋았겠다고 생각하는 그런 얘기를 쓴다고 말했다. 그녀가 말했다. 그래요, 제일 슬픈 책들보다도 더 슬픈 인생이 있는 법이니까요. 내가 말했다. 그렇죠. 책이야, 아무리 슬프다고 해도, 인생만큼 슬플 수는 없지요. -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고흐, 성경.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책이 한국에서 첫 출간된 건 1993년 소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통해서였다. 2차 세계대전으로 할머니 댁에 맡겨진 쌍둥이 클라우스와 루카스. 이름 철자의 순서만 다른 둘은 참혹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냉정해진다. 서로를 때리고 서로에게 거친 말을 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받았고 앞으로 받을지도 모를 육체적 정신적 상처에 단련될 수 있도록 점점 강하고 모질어지는 두 아이 클라우스와 루카스.
 
 개자식들. 우리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얼굴이 새빨개지고, 귀가 윙윙거리고 눈이 따갑고 무릎이 후들거린다. 우리는 더 이상 얼굴을 붉히거나 떨고싶지 않았다.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이런 모욕적인 말들에 익숙해지고 싶었다. 우리는 식탁 앞에 마주앉아서 서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이런 말들을 되는 대로 지껄여댔다. 점점 심한 말을. 그러나 예전에 듣던 말들이 생각났다. 엄마는 우리에게 말했다. 귀여운 것들, 내 사랑, 내 행복, 금쪽같은 내 새끼들. 우리는 이런 말들을 떠올릴 때마다 눈에 눈물이 고인다. 이런 말들을 잊어야 한다. -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그러나 소설 1부의 내용은 2부와 3부에서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진다. 각 장들은 서로를 배신하고 진실이었던 것을 허구로 만들어버리며 다시 새로운 사실을 향해 나아간다. 소설은 현기증처럼 엉켜있고, 질기다. 소설을 읽으며 개연성을 쫓고 사실을 정돈하려고 할수록 점점 멀어지는 진실. 그래서 진실이 대관절 무엇인지를, 역으로 묻고 있는 이야기. 눈앞에 보이는 사건만을 다룰 때 사건의 이면에 있는 진실의 복잡성은 사라져버리는 건 아닐까. 그래서 말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든 말하기위해,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클라우스의 입을 빌렸던 1부의 이야기를 거부하고 또 다른 이야기를 시작하는 허구의 방식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건 아닌가. 실은 소설보다 더 처연한 삶을, 어떻게든 들려주기 위하여. 알리기 위하여.
 
 헝가리인이었던 그녀는 스위스에 거주하면서 프랑스어로 글을 썼다. 스위스행은 자발적인 선택이 아닌, 2차 대전과 헝가리 혁명으로 인한 정치적 망명이었다. 정치범으로 감옥에 있는 아버지 대신 쥐약을 포장하는 일로 생계를 꾸려간 어머니. 겨울의 한기처럼 스며들었으나 결코 익숙해지지 않던 가난. 히틀러 찬가를 불러야했던 기숙사. 헝가리혁명의 여파를 피해 딸을 데리고 망명한 스물한 살. 그녀는 스위스의 시계공장에서 일하며 아이를 돌보고 몇 권 안 되는 헝가리어로 된 책을 읽는다. 그리고 침묵한다. ‘문맹’은 그 시간들에 대한 자전적 기록이다.

고흐, 아몬드 나무.
 
▶구조를 따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어린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책에서 고백한다. 막사와 수도원의 중간, 보육원과 소년원의 중간쯤 되는 곳 기숙사에서 그녀가 보냈던 밤들을. 친구들이 단추 없는 망토 한 벌로 겨울을 나는 아고타 크리스토프를 보며 대단하다고 놀라워할 때, 실은 그 옷이 오빠가 입다 작아져 물려받은 옷이었음을. 책가방이 없어 친구의 책가방에 책과 공책을 넣고 들고 다녔던 아이. 20분짜리 연극 공연으로 푼돈을 모아 공책과 연필을 구입하고, 연극공연에 대한 감사로 친구들이 내놓은 간식을 얻었다고. 연극을 보는 친구들의 웃음으로 행복했다고 고백한다. 스탈린 치하의 점령지 헝가리에서, 학교의 차가운 기숙사에서 이 아이를 지탱하게 한 건 여전히 쓰는 것, 잠시도 쉬지 않고 날마다 쓰는 것이었다.
 
 뭔가 읽을 것이 있을 때면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나는 계속 읽고, 그러고 나면 울면서 잠든 밤사이에 문장들이 태어난다. 문장들은 내 곁을 맴돌다, 속삭이고 리듬과 운율을 갖추고, 노래를 부르며 시가 된다. 어제, 모든 것은 더 아름다웠다. 나무들 사이의 음악 내 머리카락 사이의 바람 그리고 네가 내민 손안의 태양. - ‘문맹’
 
 ‘문맹’은 이야기하고 쓰기를 누구보다도 좋아했던 소녀의 이야기이자, 어떻게 소녀가 자신의 정체성이었던 문자를 쓸 수 없게 되었는지, 그리고 다시 쓰기위해 낯선 나라의 언어를 배우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녀는 프랑스어를 배웠고 프랑스어로 작품을 써서 공연을 하고 출판도 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프랑스어를 적의 언어라고 부른다. 프랑스어가 모국어를 죽이고 있었기에.
 
 사라져가는 정체성을 아파했으나, 내 보기엔 그녀야말로 타국의 언어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가장 적확하게 전달한 작가다. 시대는 개인보다 크고, 구조는 주체를 규정한다. 주체는 구조에 적응할 것을 알게 모르게 강요받으니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구조를 따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가 생존을 결정해버리는 엄혹한 시간을 살았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아고타 크리스토프다. 냉전의 구조가 끝나고 자본의 구조가 활개 치는 시간, 그녀의 작품을 읽으며 지금 내가 느끼는 것. 때로 한 인간의 일생은 구조보다 더욱 크고 더욱 거대하다. 2011년 작고한 위대한 사람, 아고타 크리스토프가 자신의 ‘쓰기’에 대해 진술한 소설의 한 대목을 덧붙인다. 여기에 더한들 무엇 하리.
 
 무엇보다 당연하게도 가장 먼저 할 일은 쓰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쓰는 것을 계속해나가야 한다. 그것이 누구의 흥미를 끌지 못할 때조차. 그것이 영원토록 그 누구의 흥미도 끌지 못할 것이라는 기분이 들 때조차. 원고가 서랍 안에 쌓이고, 우리가 다른 것들을 쓰다 그 쌓인 원고들을 잊어버리게 될 때조차. - ‘문맹’
박혜진 <문예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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