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을 벗은 에릭

▲ ‘잘가, 나의 비밀 친구’ 표지.
 아마 이 책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앤서니 브라운이 그림을 그렸으니 더 관심이 많이 쏠렸을 것이다. 표지 그림도 인상적이다. 마술사가 즐겨 입는 검은 망토와 가면, 검은 모자를 쓴 잠옷 차림의 아이가 도시의 밤하늘을 날고 있다. 슈퍼맨처럼. 게다가 표정도 아주 자신만만이다. 필시 이 아이가 주인공일 것 같은데, 비밀 친구는 누구일까? 표지만으로 생각의 문을 자연스럽게 연다.

 표지를 넘겨 보면 속지에는 오로라같은 하늘을 배경으로 두 사람이 하늘 높이 연을 날리고 있는 그림이 있다. 작은 검은색 실루엣 뿐이지만 분명 남자와 여자다. 둘이 함께 발을 맞춰 달리고 있다. 하늘에는 둥근 달도 떠있다. 그럼 오로라가 찬란한 밤이라는 건데 연을 날리고 있다. 그것도 아주 큰 연을. 이제 또 한 장을 넘기면 검은 바탕에 이 책 제목이 흰색 글씨로 써져 있고 네 개의 문이 그려져 있다. 조금씩 더 열려지고 있는 문. 그 문을 열고 비밀 친구가 갔으려나?

 이 책은 대부분 검은 바탕에 그림이 그려져 있고 예외적인 장면만 흰 바탕에 그림이 그려져 있다. 어느 부분에서 흰 바탕이 사용되었을지 조금 예상이 된다. 이제 주인공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표지를 넘겨 보면 속지에는 오로라같은 하늘을 배경으로 두 사람이 하늘 높이 연을 날리고 있는 그림이 있다.
 
▲“에릭은 말을 하지 않았어요”
 
 에릭은 말을 하지 않았어요. 다른 아이들은 왜 그런지 알 수 없었죠. 아이들은 에릭을 ‘벙어리 에릭’이라고 불렀어요.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하며 놀리기도 했어요. “왜 그래? 고양이가 네 혀를 물어가기라도 했니?” 어른들은 에릭에게 부끄러워서 그러냐고 물었어요. 하지만 에릭은 대답하지 않았어요.

 에릭은 그냥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을 뿐이에요. 그리고 그다지 말을 할 필요도 없었어요. 왜냐하면 에릭의 비밀 친구가 대신 말해주었기 때문이에요. 비밀 친구는 에릭이 왜 완두콩을 먹기 싫은지, 왜 목욕을 할 필요가 없는지 대신 설명해주었죠.

 비밀 친구는 에릭이 자기 전에 읽을 책을 골라 주었어요. 비밀 친구의 선택은 언제나 에릭의 마음에 꼭 들었지요. 꿈에 도마뱀이 나와서 무서울 때면, 비밀 친구가 훠이훠이 소리를 질러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도마뱀을 쫓아 주었어요.

 “아침으로 뭘 먹을까?” 아빠가 물으면 비밀 친구가 대신 대답했어요. “죽을 먹을래요. 우유랑 꿀을 듬뿍 넣어서요.” 바로 에릭이 원하던 그대로였죠. 비밀 친구는 투명 인간이 될 수 있었어요.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볼 수 있고요. 멀고 먼 나라의 말도 했어요. 이 모든 건 에릭과 비밀 친구 둘이서만 아는 비밀이었죠. 비밀 친구는 귀도 정말 밝았어요. 아무리 작은 소리라도 들을 수 있었어요. 계단이 삐걱리는 소리나… 하늘 높이 뜬 연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까지 말이에요.

 마샤는 공원에서 놀고 있었어요. 그 애는 에릭과 비밀 친구가 자기를 지켜보고 있다는 걸 눈치 챘어요. 마샤는 에릭이 말이 없어도 상관하지 않았어요. 우스꽝스런 질문을 하지도 않고 억지로 말을 시키지도 않았어요. 에릭을 ‘벙어리 에릭’이라고 부르지도 않았죠. 그러니까 비밀 친구가 대신 말할 필요도 없었어요. 에릭과 마샤는 사과나무에 올라갔어요. 원숭이처럼 매달려 나뭇가지를 타고 놀았죠. 에릭은 고릴라처럼 소리를 질렀어요.

 에릭과 마샤는 앵무새 연을 날렸어요. 앵무새 연은 날이 저물도록 하늘을 맘껏 날았어요. 그러고 나서 마샤는 잘 가라는 인사를 했고, 에릭은 집까지 줄곧 뛰어 왔어요. 에릭은 완두콩을 먹고 목욕을 하고, 잠자리에 들었어요. 그날 밤, 에릭은 도마뱀 꿈을 꾸지 않았어요.


 잠에서 깨 보니, 비밀 친구가 곁에 없었어요. 에릭은 이불 밑과 서랍 속, 벽장 안까지 모두 뒤졌어요. 둘만 아는 비밀 장소도 모두 찾아보았죠. “얘야, 무슨 일이니? 왜 그리 쿵쾅거리고 돌아다니는 거야?” 엄마가 물었어요. 하지만 에릭은 입을 굳게 다물었어요. 에릭은 침대 밑에 대고 속삭였어요. “비밀 친구야, 너 거기 있니?”

 에릭은 아빠가 세 번이나 깨울 때까지 침대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어요. 하루 종일 쿵쾅거리고 뭐든 발로 걷어찼어요. 마샤가 에릭의 집에 왔어요. 마샤가 말하는 게 들렸어요. “에릭이랑 놀려고요.”

 에릭은 방문을 쾅 닫았어요. “싫어! 가라 그래!”

 에릭은 창가로 갔어요. 마샤가 연을 날리려고 애쓰는 걸 지켜봤죠. 연은 조금씩 떠오르는가 싶더니 바람이 불자 아래로 곤두박질쳤어요. 그러고는 나뭇가지에 걸려 버렸어요. 에릭은 자기가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에릭은 밖으로 나가 숨을 크게 한 번 몰아쉬었어요. 그리고 마샤에게 말했어요. “내가 내려 줄게.” 에릭은 혼자 힘으로 꼭대기까지 올라가 연을 가져왔어요.

 에릭과 마샤는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어요. 에릭은 자기도 할 말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산들바람이 불어오자 둘은 연을 날렸어요. 하나 둘 저녁 별이 떠오르자 에릭과 마샤는 맘속으로 소원을 빌었어요. 그러고 나서 에릭은 말했어요. “잘 가.” 그러자 비밀 친구도 손을 흔들어 주었어요.
 
▲“비밀 친구는? 바로 에릭 자신!”
 
 이제 그 ‘비밀 친구’가 누구인지 대충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 비밀 친구는 바로 에릭 자신이다. 사람들 앞에서 어쩐 일인지 입을 다물게 된 에릭은 오직 자신의 비밀 친구하고만 대화를 나눈다. 비밀 친구는 책 표지 소개에 나온, 잠옷 위에 마술사의 망토를 두르고 가면을 쓴 에릭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에릭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아 주는 비밀 친구, 심지어 무서운 꿈도 막아주는 비밀 친구, 에릭은 이 친구가 있기에 다른 사람과 소통할 필요를 느끼는 못하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에릭 앞에 에릭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해해 주는 여자 친구 ‘마샤’가 등장한다. 마샤와 함께 할 때 책 바탕 색은 흰색이 된다. 에릭이 비밀 친구와 함께 있을 때 책 바탕의 검은 색은 흰색과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주인공의 심리 묘사를 앤서니 브라운은 글이 아니라 이 바탕색으로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고릴라’ 책에 등장하는 고릴라도 엑스트라로 등장시켜 숨은 그림 찾기같은 재미를 선사하기도 한다.


 에릭과 마샤가 함께 공원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온 다음날 에릭의 비밀 친구는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 에릭은 비밀 친구를 찾기 위해 온 집을 뒤져 보지만 끝내 발견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때 마샤가 집으로 찾아온다. 하지만 에릭은 화가 난 표정으로 자신의 방 문을 쾅 닫아 버린다. 책 표지 다음 다음에 등장했던 네 개의 문 그림이 생각나는가? 조금씩 열려지고 있던 바로 그 문 그림 말이다. 에릭은 바로 그 문 뒤에서 화난 표정으로 앉아 있다. 그러다 창가로 가서 혼자 연을 날리는 마샤를 보게 되고 마샤를 돕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숨을 크게 한 몰아쉬고 마샤에게 말을 한다. “내가 내려 줄게.” 드디어 에릭이 비밀 친구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장면이 등장한 것이다. 에릭은 이제 자신도 남들에게 할 말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에릭이 마샤와 숲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 한 쪽 귀퉁이에는 에릭의 비밀 친구가 입었던 망토와 가면, 모자가 그려져 있다. 더 이상 에릭에겐 비밀 친구가 필요없다는 뜻이리라. 그걸 에릭도 알았기 때문에 “잘 가”라는 인사를 마지막에 남긴 것이 아닐까?

 이 책 뒷면에는 연세의대 정신과 교수인 신의진 교수님의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책 앞장 검은 바탕에 책 제목과 함께 그려진 네 개의 문.
 
▲“어떻게 세상과 소통하는지 보여줘”
 
 ‘아이가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심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나름의 방법입니다. 원인도 모르는 채 아이에게 말하기를 강요하는 것은 아이를 점점 더 힘들게 합니다. 먼저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책의 마샤처럼 말이죠. 따뜻하게 위로해주며 원인을 찾고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 책은 말을 하지 않던 아이가 어떻게 세상과 소통하기 시작했는지를 보여주는 그림책으로, 인간의 심리를 깊이 있게 탐구한 작가 그웬 스트라우스는 에릭의 치유 과정을 ‘담담하지만 가슴에 콕 와닿게’ 들려준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한다. 그는 1963년 미국에서 태어난 작가이자 시인이다. (헨젤과 그레텔)의 아버지, (빨간 모자)의 늑대처럼 고전 동화의 주인공이 아닌 조연들의 이야기를 시로 풀어낸 (바위들의 발자국)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주로 사랑의 두려움, 부끄러움, 질투, 외로움 등 사람의 내면을 깊이 있게 탐구하고 이야기로 풀어내는 작가이다.- 출판사 작가 소개 인용-

 한편 그림을 그린 앤서니 브라운은 1946년 영국에서 태어나 독특하고 뛰어난 작품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그림책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많은 작품이 전 세계에 출간되어 널리 사랑 받고 있다. (고릴라)로 ‘케이트 그린어웨이 상’을 받았고, (동물원)으로 두 번째 ‘케이트 그린어웨이 상’을 받았다. 2000년에는 전 세계 어린이 책 작가들이 최고의 영예로 생각하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을 받았다. 국내에 출간된 책으로는 (돼지책), (미술관에 간 윌리), (앤서니 브라운의 행복한 미술관), (우리 엄마), (우리는 친구) 등이 있다.

 마음을 들여다 보게 하는 따뜻한 그림책을 이 가을에 소개할 수 있어 마음뿌듯하다. 우리 모두 마샤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보며 글을 마친다.
이하늘 <인문학공간 소피움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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