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의 탄생’.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위에
 습한 간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서스 산중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는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
 - 윤동주 ‘간(肝)’우리 각자가 괴담을 쓰는 겁니다.
 
▲‘인간 본성에 관한 이야기’

 내게 공포 문학은 세권으로 압축된다. 드라큘라, 지킬과 하이드, 프랑켄슈타인. 세 편의 소설 중 가장 먼저 쓰여 졌으며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묵직한 화두로 인공지능의 시대가 도래한 21세기에 영향력을 더해가고 있는 고전 프랑켄슈타인. 만들어지자마자 창조자에 의해 버림받았기에 이름조차 없는 괴물. 그래서 종종 ‘그것’을 만든 창조자의 이름인 프랑켄슈타인이라고 불리는 존재. ‘프랑켄슈타인’은 1818년 메리 셸리가 약관 스물한 살에 발표한 고딕풍 소설이다. 메리 셸리는 프랑켄슈타인을 쓰기까지 문학과 글쓰기를 즐기던 소녀였다. 일찍 여읜 어머니, 정치 철학자이자 무정부주의자로 바빴던 아버지의 부재를 대신한 매개를 책에서 찾았던 이 명민한 소녀는 아버지의 제자 퍼시 셸리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그는 갓 결혼한 몸. 그러나 인생에서 감각을 넘어선 정신 혹은 영혼의 짝을 만나기란 얼마나 어렵던가. 이혼과 결혼을 허락하지 않는 가족과 세간의 시선을 피해 떠난 스위스로의 여행에서 두 사람은 낭만주의 시인이던 바이런을 만나 동행하게 된다.

 스위스 제네바 외곽, 1816년의 여름은 비가 많이 내렸고 을씨년스러웠다. 고즈넉한 숲과 초원을 두른 고성의 실내에 밤마다 모닥불을 피우고 둘러앉은 두 명의 숙녀와 세 명의 예술가는 어떤 고담준론들을 나누었을까. 그러다 누군가 초자연적인 사건을 토대로 각자 괴담을 만들어보자는 장난스러운 제안을 했고 날이 풀림과 동시에 모두가 약속 따윈 잊어버리고 산행과 낚시로 여념 없을 때, 불현 듯 메리 셸리의 머릿속에 생생한 영상이 떠오른다. ‘불경스러운 기술을 지닌 창백한 얼굴의 학생이 자신이 조립한 것 옆에서 무릎을 꿇고 있다. 뻗어 누운 남자의 소름끼치는 환영이 보이는가 싶더니 반쯤 살아있는 동작으로 꿈틀거리는 생명의 형체가 나타난다. 그는 혐오스럽고 소름끼치는 그것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는 그것을 혼자 내버려둔 채 자신이 불어넣었던 가녀린 생명의 불꽃이 사라지기를 소망한다….’ 빛나는 영감이다. 바이런과 키츠는 메리의 아이디어를 작품으로 만들 것을 격려했고, 1년 후 ‘인간 본성에 관한 이야기’라고 밝힌 고전 ‘프랑켄슈타인’이 세상에 나왔다.

프로메테우스.
 
▲근대의 프로메테우스
 
 프랑켄슈타인의 초판 제목은 ‘프랑켄슈타인: 또는 근대의 프로메테우스’다. 프로메테우스가 누구던가. 제우스에게서 불을 훔쳐 미개한 상태에 머물던 인간이 문명을 꽃 피우고 문화를 개벽하게 한 신이다. 신에게는 각자 원형적 능력이 있으니 프로메테우스의 능력은 그의 이름이 가진 뜻에 걸맞게 ‘미리 아는 자’였다. 불굴의 의지를 지닌 이 티탄신은 불을 훔친 벌로 코카서스 절벽에 쇠사슬로 묶여 제우스가 보낸 독수리에게 날마다 간을 파 먹히는 형벌을 받는다. 먹힌 간은 아침이면 다시 자라났고 다시 뜯겼다. 내가 프로메테우스를 읽을 때마다 소스라치는 건 불을 훔칠 결심을 하던 때부터 실행에 옮기기까지 삼천년 동안 자신이 받을 형벌의 면면이 그의 머릿속에 생생히 그려졌으리라는 점이다. 참기 어려운 공포였을 터다. 공포는 고통을 겪는 순간이 아닌, 고통에 대한 예감으로부터 온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의 이성으로 두려움을 이겼다. 인간의 추함과 나약함 이면에 있는 선과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보았다.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이 흙으로 빚은 인간의 나약이 인간 스스로에게서 기인한 것이 아님을 뼈아프게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창조주인 자신의 간을 대가로 인간의 손에 불을 쥐어준다. 그런데 왜 메리 셸리는 프랑켄슈타인에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라는 부제를 달았을까? 메리 셸리가 그린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자신이 만든 피조물에 경악해 ‘그것’이 제 형체를 갖추기도 전에 버리고 멀리 도망한 것을. 그것이 죽지 않고 제 기원을 찾아 빅터 프랑켄슈타인을 찾았을 때 박사가 돌려준 말은 ‘너를 만들고 그대로 둔 것’을 후회한다는 저주와 악담이었다.

 작고 여린 존재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자연에 대한 경외·따스한 온기에의 갈망·알려는 의지. 만약 이런 덕목이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다면 소설 속에서 가장 인간다운 건 빅터가 ‘그것’이라고 부른 괴물이다. 사람과 가까워지고자 갖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괴물의 외모를 볼 수 없는 눈 먼 노인 외에는 친구로 둘 수 없었던, 그마저 나중에는 빼앗기고 마는 괴물에게서 이해받지 못하는 존재의 처연한 슬픔을 본다. 어디 괴물뿐이랴. 여성의 사회활동과 독립이 터부시되던 19세기, 주체적 삶과 사유를 꿈꿨던 메리 셸리의 삶도 괴물의 형편과 다르지 않았다. 퍼시 셸리와 아이들의 이른 죽음, 여성의 작품치고 너무 잔인하다는 야유. 고통에 맞서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면 결코 나만의 목소리를 찾을 수 없다고 메리 셸리는 말한다.

메리 셸리의 초상.

 순간순간이 선택이다. 불사의 욕망을 좇았으나 자신이 만든 피조물 앞에서 책임을 회피했던 프랑켄슈타인의 비겁은 괴물의 폭주를 낳았고 모두를 죽음으로 내몰고서야 끝난다. 누가 괴물인가. ‘나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단 한 명의 존재만 있다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울던 그것인가, 그것을 외면한 우리인가.
 
 창조주여, 흙으로 저를 빚어 사람으로 만들어달라고 제가 애원했습니까?
 어둠에서 절 끌어내 이 즐거운 낙원에 놓아달라고 제가 간청하더이까?
-밀턴 ‘실낙원’

박혜진 <문예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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