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에 요시오 글, 우에노 노리코 그림, 박상희 옮김. 비룡소
“그건 내 조끼야”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건 내 조끼야.
 
 생쥐가 몸에 꼭 맞는 빨간 조끼를 입고 있어요. 엄마가 짜주신 조끼예요. 오리가 생쥐에게 와서 말했어요.
 
 “정말 멋진 조끼다. 나도 한 번 입어 보자.”
 “그래.”
 “조금 끼나?”
 
 원숭이가 와서 말했어요.
 
 “정말 멋진 조끼다! 나도 한번 입어 보자.”
 “그래.”
 “조금 끼나?”
 
 물개가 와서 말했어요.
 
 “정말 멋진 조끼다! 나도 한번 입어 보자.”
 “그래.”
 “조금 끼나?”
 
 사자도 와서 조끼를 입어보고, 말도 와서 조끼를 입어보고, 코끼리도 와서 조끼를 입어 보았어요.
 
 “앗, 내 조끼!”
 
 생쥐는 다 늘어진 빨간 조끼를 입고 집으로 돌아갔답니다.
-‘그건 내 조끼야’ 나카에 요시오 글, 우에노 노리코 그림, 박상희 옮김. 비룡소
 
 ‘어머나, 어쩌면 좋아!’ 내가 이 그림책을 보고나서 처음 내뱉은 말이다. 생쥐는 자기 조끼를 오리가 입어보고, 원숭이가 입어보고 물개가 입어보고 사자, 말, 심지어 코끼리가 입어보는데도 “싫어.” 라는 말을 하지 못 한다. 그러다가 참다참다참다 못 해서 결국 “앗! 내 조끼!”라고 안타깝게 외친다. 생쥐엄마가 생쥐의 몸에 꼭 맞게 짜준 빨간 조끼는 이미 늘어날 대로 늘어나서, 생쥐가 조끼를 다시 입었을 때는 땅에 질질 끌리는 줄처럼 되어버린 후였다. 다 늘어난 조끼를 입고 아니 끌고 집으로 돌아가는 생쥐의 모습을 보며, 생쥐가 너무 안타까웠다. 왜 생쥐는 “싫어.” 라는 말을 못 했을까?

 심리학에서는 생쥐가 “싫어”라고 거절하지 못 한 것은 생쥐 안에 있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말한다. “싫어”라고 말하면 혹시라도 자신을 이기적인 사람으로 볼까봐, 원숭이나 물개나 사자, 말, 코끼리의 마음이 상할까봐. 그들이 자신을 싫어할까봐, 그들과의 관계가 어색해지고 깨질까봐 두렵기 때문에 거절을 못 한다고 한다.

 그렇겠지. 하지만 ‘그것뿐일까?’ 생각해 본다. 왜 생쥐는 “싫어”라고 말하는 자신이 이기적이라고 생각했을까? “싫어”라는 말이 원숭이나 물개 등 친구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왜 생쥐는 자신이 용기내서 하는 “싫어”라는 거절을 용납하지 못 하는 그들이 자신을 싫어하는 것을 두려워할까? 왜 전혀 너그럽지 못 하고, 옹졸한 그들과의 관계가 계속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까? 이 모든 것을 생쥐 안의 두려움이라는 심리, 생쥐의 개인적인 성격에서 비롯된 문제로만 해석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그건 내 조끼야.”라고 말하지 못 하는 상황1
 
 “아이들은 피임도구로 콘돔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모를까요? 알고 있지요. 그런데 왜 사용하지 않아서 원하지 않은 임신을 하게 되는 걸까요?”

 한 성교육 전문가가 부모를 상대로 한 성교육강좌에서 던졌던 질문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성교육시간에 성별 신체적 생리적 특징, 임신과정, 임신주기, 출산과정 등 성지식을 쌓아왔을 것이고, 더 나아가 콘돔 등 피임기구 사용 필요성과 사용법 등도 배울 만큼 배워왔을 것이다.

 그런데 왜 정작 사랑하는 사이인데도 피임이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어떻게 먼저 콘돔 사용하자는 말을 해요. 부끄럽게!’, ‘내가 콘돔 준비했어. 이거 쓰자. 라는 말을 하면 내가 경험도 많고 헤픈 여자처럼 보일 것 같았어요.’,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했어요.’ 10대 비혼모들의 대답이었다고 한다.

 아이들의 인식 속에서 콘돔을 사용하자는 요구가, 피임을 해야 한다는 요구가 왜 여성이 요구하기에 부끄러운 행동이 되었는지, 경험이 많은 여성이나 헤픈(?)여성이 하는 행동이라고 인식되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할 일이다.

 우리 사회는 아주 오랫동안 남성중심의 사회였고 남성을 기준으로 한 규범, 가치체계,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들이 구조화되어왔다.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은 성관계에서도 수동적이고 비주체적인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남성은 자신의 아내가 될 여성의 도덕성과 가치를 평가하기 위해 여성의 처녀성에 집착했고 처녀막이 파열된 여성은 도덕성을 의심받아야 했다. 그래서 여성은 결혼 전까지 미래 남편을 위한 순결을 지키는 것이 정숙하고 도덕적인 여성의 행동이며 의무라고 학습받았다.

 같은 이유로 여성은 결혼 전 뿐만 아니라 결혼 후에도 정조라는 이름의 성적인 구속에 얽매여야했다. 어릴 때 본 안방 사극드라마의 한 장면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사극드라마에서 한 여성은 남성의 성폭행 시도에 대항하고 있었고, 그 여성은 결국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품에서 빼어든 작고 반짝이는 은장도로 자신의 심장을 찔렀다. 그것을 보며 ‘정조를 잃는 것은 여성의 수치이며, 정절을 지키는 것이 여성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 것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구나.’라는 것을 나도 모르게 학습했던 것 같다. 이 의식은 아주 오랜 시간동안 나의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다. 커서 ‘왜 은장도로 남성이 아니라 자신을 찌른 것일까?’, ‘자신의 생명을 해치면서까지 그 여성이 지키려고 했던 정조는 누구에게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을 때까지 말이다.

 여성은 성에 관해 철저히 배제된 문외한이어야 했다. 성을 지키고 있는 문, 여성은 그 문 밖의 사람이어야만 했던 것이다. 성의 문 안의 사람은 남성들이었다. 성지식, 성적 쾌락, 성경험 등 성은 여성이 아니라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여성이 성에 대해 잘 아는 것, 여성이 성에 관한 요구를 하는 것, 여성이 성적 쾌락을 즐기는 것 등은 남성의 전유물을 여성이 넘보는 것이었고, 규범에서 벗어나는 일이었고, ‘정상’이라는 기준에서 벗어난 ‘비정상’ 행위였다. 그렇게 하여 성을 이야기하는 여성은 남성주의가 씌워놓은 여성스러움에 위배되는 음란한 여성이 되었다.

 사회가 바뀌어 옛말이라고 하지만, ‘콘돔 사용하자는 말을 어떻게 해요? 나를 어떻게 보겠어요?’라는 말과 그 말 속에 흐르는 의식은 옛날과 별반 다름없는 여성관과 바뀌지 않은 성관계구조와 성태도, 성의식이 21세기 아이들에게도 사회를 통해 학습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아이들이 콘돔을 사용하자고 말하지 못한 것은 몰라서가 아니다. 아이들이 여전히 남성중심의 구조와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에 저항하고 여성을 성적 주체로 평등하게 보는 사회적인 분위기를 만들면 “우리 콘돔 쓰자.”라는 말이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건 내 조끼야.”라고 말하지 못 하는 상황2
 
 도덕이나 윤리시간이나 성교육 시간도 아닌 사회과목 시간에 남자교사가 고등학교 남자아이들에게 자신의 첫 경험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왜 그 수업시간에 갑자기 선생님이 자신의 첫 경험 이야기를 우리에게 해줬는지 모르겠어요.”

 “성과 관련된 수업시간이 아니었는데?”

 “네, 선생님은 고등학생쯤 되었으니, 우리에게 성관계를 가질 때는 준비와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을 하고 싶었다는 것을 알아요. 그러니까 듣고 있었죠. 하지만 선생님의 첫 경험을 이야기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도 없었고, 선생님의 첫 경험은 관계 여성의 이야기까지를 포함하는 것인데 그렇게 공개적으로 이야기하시는 것이 유쾌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어요.”

 “선생님께 듣기 불편하다고 말씀드려 보았니?”

 “아니오. 선생님 말씀의 의도를 아는데, 어떻게 말씀드려요. 그리고 껄끄러운 관계를 만들고 싶지 않아요.”
 
 어린 남성은 성인 남성이 보이는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적인 태도가 불편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하지만 아이는 껄끄러운 관계를 만들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했다. 교사와의 관계를 ‘말하기 어려운 관계’로 판단하는 것이다. 또 교사의 의도를 이해하기에, 부수적이라고 느껴지는 부분을 문제 삼고 싶지 않은 것이다.(부수적이라고 판단한 것이 과연 부수적인 문제인지는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내가 학교 다닐 때에 “선생님, 첫사랑 이야기해 주세요.”, “선생님 연애이야기 해 주세요.” 라고 선생님을 졸랐던 기억이 난다. 수업 중 쉬고 싶은 이유도 있었고, 사랑이나 연애 등에 대해 궁금하고 알고 싶기도 해서였다. 그럴 때면 선생님은 마지못한 듯이 자신의 소중한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나와 한 교실에 있었던 어떤 아이는 선생님이 수업진도를 나가지 않고 사사로운 이야기를 하는 것이 마땅치 않았을 수도 있다. 그 아이는 ‘저는 그 이야기 듣고 싶지 않아요. 그냥 진도 나갔으면 좋겠어요.’라는 말을 꾹 눌렀을 수도 있다. 혹은 그 아이는 ‘선생님, 진도 나갔으면 좋겠어요.’라고 용기를 내어 말을 했을 수도 있다. 나는 두 경우를 다 보았다. 후자의 경우는 학급의 분위기나 교사와 학생의 관계가 건강한 편일 가능성이 높다. ‘진도 나가요.’라는 말을 했을 때 반 아이들의 눈총을 받을 것이 예상되지만, 선생님이 당혹스러워 하실 수도 있지만, 그래도 ‘말하기를 선택한다는 것’은 ‘말을 해도 될 것 같은 분위기’, ‘말을 해도 되는 관계’, ‘말을 해도 안전한 관계’라는 신뢰가 있다는 말이다. 반면, ‘할 말이 있지만 말하지 못 하는 관계’는 말을 하는 것이 관계유지에 있어 안전하지도, 도움이 되지도 못 한다는 판단이 서는 관계이다. 주로 상하구조 속에서 약자일 때 우리는 말하기에서 안전하지 못함을 느낀다. 그래서 ‘이야기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드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안전한 대화를 하고 싶어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본능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안전한 대화의 장을 만들기 위해서는 섬세한 고민이 필요하다. 안전한 대화의 장을 만들려 했던 시도가 오히려 대화를 시도하는 입을 막아버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학생이 문제를 제기했는데 무시되는 상황, 조정과 해결의 과정이 아닌 상대 학생의 징계처분으로만 마무리되는 상황, 상대 교사 징계라는 결과만 남는 상황…이런 상황들은 과연 문제를 제기하는 학생으로 하여금 자신의 행동이 옳았다는 확신을 가지게 할까? 자신이 문제를 제기한 공간이 대화하기에 안전하다는 확신을 가지게 할까? 하는 의문이 든다. 오히려 위와 같은 결과위주의 행정처리는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 학생들의 입을 막아버릴 수 있다. 아이들의 문제제기를 “해결해 주세요”라고 해석할 것인가, “해결하고 싶어요”라고 해석할 것인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건 내 조끼야.

 생쥐는 다 늘어진 빨간 조끼를 입고 집으로 돌아갔다. 후에 다 늘어진 빨간 조끼로 코끼리가 그네를 만들어 생쥐를 재미있게 태워주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왜 나에게는 그 장면이 안타깝게만 느껴졌을까. 생쥐가 “그건 내 조끼야.” 라고 말할 수 있었다면, 생쥐는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수정 <그림책 읽어주는 할머니가 꿈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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