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보따리’ 장 클로드 무를르바 글, 장 뤼크 베나제 그림
신선영 옮김. 문학동네

▲ 꼬마늑대는 이름이 없어서 슬펐어요.
 꼬마 늑대가 숲길 바위 위에 앉아 울고 있었어요. 한 할아버지가 잔뜩 허리를 구부리고서 그곳을 지나가고 있었어요. 등에 보따리를 짊어지고요. 할아버지가 꼬마 늑대에게 물었어요.

 “늑대야, 왜 울고 있니?”
 “저는 일곱째 늑대인데 이름이 없어요. 그래서 우는 거예요.”
 “이름이 없다고?”
 “네, 형 누나들은 모두 이름이 있어요. 그것도 아주 멋진 이름 말이에요. 형들은 레오폴드, 린드베르그, 뤼퀴뤼스이고, 누나들은 라라, 뤼스, 륄라비예요… 매일 밤, 엄마는 우리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입을 맞춰주며 이렇게 말해요. ‘잘 자라. 뤼퀴뤼스, 잘 자라, 라라, 좋은 꿈 꾸어라. 레오폴드…’ 하지만 나한테는 아무 말도 안 해요. 난 이름이 없으니까요. 매일 아침, 우리는 자기 이름이 쓰인 그릇에다 우유를 마셔요. 하지만 내 그릇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아요. 난 이름이 없으니까요… 우리가 학교에 갈 때, 아빠는 이렇게 말해요. ‘좋은 하루 되거라. 린드베르그, 공부 열심히 해. 휠라비, 책 빠뜨리지 말고, 뤼스…’ 하지만 나한테는 아무 말도 안 해요. 난 이름이 없으니까요.”
 할아버지가 꼬마늑대에게 말했어요.
 “울지 말고 나를 따라오너라. 이 보따리 안에 네 이름이 들어 있단다.”
 할아버지의 이름은 ‘이름주는 이’였답니다.
 -‘이름보따리’ 중에서
 
 좀 부끄럽지만, 나는 내 이름을 불러주는 것을 좋아한다.

 아이들이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하수정 선생님”이나 “수정선생님”이라고 불러줄 때가 더 좋다. 선생님이라는 보통명사에서 이름을 붙여 불러주면 고유명사가 되니까. 여러 선생님 중에 하나가 아니라 이 세상에 딱 하나뿐인 나를 불러주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진다. “선생님, 이것 좀 해 주세요.”라고 말을 할 때보다 “수정선생님, 이것 좀 해 주세요.”라고 말을 할 때 훨씬 더 명확하고 흔쾌하게 “네!”라고 대답을 하는 편이다.
 
 “야, 너! 줄 똑바로 서!”
 “야, 너희들 어디 가는 거야?”
 “야, 이리 와서 앉아!”
 
 ‘야’, ‘야’, ‘야’라는 소리가 아이들이 웅성웅성 모여 있는 공원 저쪽 편에서 계속 들렸다. 어느 단체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들과 공원에 체험활동을 나온 것 같았다. 인솔자가 내뱉는 ‘야’라는 소리가 자꾸 귀에 와서 불편하게 부딪쳤다. ‘아이 이름을 불러주면 좋을 텐데…’라는 생각을 하며, 인솔자를 한 번 쳐다보고 아이들을 한 번 쳐다보았다. 아이들은 ‘야’소리와 인솔자의 손짓에 맞춰 줄을 서는 것 같기도, 또 상관없이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에 열중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한동안 ‘야’, ‘야’, ‘야’하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야’, ‘야’, ‘야’라고 부르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 이름을 가진다. 자신을 나타내는, 나를 대표하는, 나를 대신하는 이름이다. 수정이, 정빈이, 지윤이, 재희, 경진이 등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가진다. 연필, 자석, 교실, 가방, 꽃병, 가방 등 물건도 각자 이름을 가진다. 증발, 기화, 역전 등 어떤 현상, 상태도 이름을 가지고, 자유, 평화, 사랑, 열정, 젊음, 슬픔 등 형태가 없는 추상적인 개념도 이름을 가진다. 사람에게 인식된 모든 것에게는 이름이 붙여졌고, 그 이름으로 그것은 사유되고 존재하게 된다. 다른 것과 변별되는 고유성을 가지게 된다.
 
 엄연히 고유한 이름을 가진 아이에게 ‘야’, ‘야’, ‘야’라고 부르는 행동은 그 아이가 가진 고유성을 무시하고 존중하지 않는 행동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야’라는 말이 귀에 자연스럽게 들어가지 못 하고 자꾸 와서 부딪친 것 같았다.
꼬마곰은 이름을 받고 몹시 행복했어요.
 
 할아버지를 따라 가는 동안 숲 속에서 이름이 없어 울고 있는 여러 꼬마동물들을 만났어요. 그리고 그들은 꼬마늑대처럼 이름을 받기 위해 할아버지를 따라 갔어요. 마침내 할아버지 집에 도착했어요. 숲길 끝에 있는 할아버지 집은 도서관 같았어요. 벽엔 온통 책 투성이었어요.
 꼬마동물들은 사전과 신문지 더미 위에 올라가 앉아서 할아버지가 이름을 주기를 기다렸어요. 할아버지는 끈을 풀면서 말했지요.
 “너희들 이름이 여기 들어 있단다. 마음껏 골라라. 하지만 이걸 명심하렴. 마지막에 나오는 이름이 가장 멋지다는 걸 말이다.”
 그러고 나서 할아버지는 어디론가 가 버렸어요. 꼬마동물들은 할아버지가 풀어 놓고 간 보따리를 빙 둘러싼 채로 모두들 가만히 기다렸어요. 몇 분이 지났어요. 꼬마곰은 참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보따리 안으로 손을 쑥 집어넣고 종이 한 장을 꺼냈어요.
 “우…랄. 우랄…! 내 이름은 우랄이야! 얘들아, 내 이름은 우랄이야! 곰 우랄! 세상에서 가장 멋진 이름 아니니?”
 용기를 얻은 꼬마개구리도 종이 한 장을 꺼냈어요. 그리고 꼬마다람쥐도, 꼬마고습도치도, 꼬마쥐도, 꼬마여우도, 꼬마청딱따구리도, 꼬마멧돼지도 모두 멋진 자기 이름을 가지게 됐어요. 그리고 모두 자기 이름을 들고 떠났어요. 하지만 꼬마늑대는 그 자리에 남아 있었어요. 마지막에 나오는 이름이 세상에서 가장 멋지다는 할아버지의 말을 기억했거든요. 마침내 꼬마늑대는 보따리 안에 한쪽 발을 넣고 이리저리 뒤적거렸어요. 하지만 아무 것도 없었어요. 구석구석 살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요. 이름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채 이름보따리는 텅텅 비어있었던 것이에요. 꼬마늑대는 슬퍼졌어요. 피곤하고 추웠어요. 꼬마늑대는 보따리 안에 웅크리고 누웠어요. 그러다가 스르륵 잠이 들었어요.
 꼬마늑대는 꿈을 꾸었어요. 꿈속에서 할아버지가 말했어요.
 “꼬마늑대야, 잘 참고 기다렸다. 너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이름을 갖게 될 거다. 너에게는 내 이름을 주마. 네 이름은 ‘이름주는 이’란다. 길을 걷다가, 숲 속을 지나가다가, 시냇물을 건너다가, 이름 없는 꼬마동물들을 만나면, 이제부턴 네가 이름을 주는 거다.”
 꼬마늑대가 꿈에서 깨어났어요. 주변에는 수천 장의 종이쪽지들이 주위에서 살랑거리고 있었어요. 종이마다 하나씩 이름이 적혀 있었고요. 꼬마늑대는 이름이 적힌 종이를 이름보따리에 넣고 끈으로 꽁꽁 묶었어요. 그리고는 밖으로 나왔지요. 눈부신 해가 들판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어요. 꼬마늑대는 이름보따리를 어깨에 메고 신나게 길을 떠났답니다. 이름없는 이들에게 꼬마늑대는 자기만 가지는 멋진 이름을 나누어주기 위해서 말이에요.
 -‘이름 보따리’ 중에서
보따리 안에 이름이 없자 꼬마늑대는 무척 슬퍼졌어요.
 
▲이름이 담고 있는 것들

 “추석 때 어디 가니?”
 “네, 친할아버지 댁에 가요.”
 “할아버지 댁에서 추석 명절 내내 있는 거야?”
 “추석 쇠고 외할아버지 댁에도 가요.”
 
 아버지의 부모님 집과 어머니의 부모님 집을 구별해서 부르고자, 아버지의 부모님 집은 ‘친할 친(親)’자를 써서 ‘親가’라 쓰고, 어머니의 부모님 집은 ‘바깥 외(外)’자를 써서 ‘外가’라 부르게 되었다. 아버지의 부모님 집을 친한, 가까운 가족으로 명명하고, 어머니의 부모님 집을 바깥 가족 즉 가족 외의 가족이라 명명하는 것은 역시나 남성중심적인 가부장적 사고의 결과물이다. 요즘 아이들은 한자를 많이 배우지 않기 때문에 ‘친(親’)자를 쓰든 ‘외(外)’자를 쓰든 아이들의 사고나 가치관에 큰 영향을 주지 않을 것 같지만, 이름이 가지는 힘을 생각한다면 그냥 넘어갈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이름은 그 이름을 명명한 자의 가치관과 사고형태를 담고 있다.

 장애가 있는 사람과 장애가 없는 사람을 구별하여 부를 때, ‘장애인’과 ‘일반인’이라고 칭하는 사람이 종종 있다. 왜 장애를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이 일반인이 될까? 이 사고의 논리라면 장애가 있는 사람은 일반적이지 않다는 말이 된다. 장애를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을 ‘일반인’이라고 칭하는 것은 ‘장애인은 일반적이지 않고 특별한, 예외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는 인식의 반영이다.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을 흔히 ‘미혼’이라고 부른다. 혼인을 “아직”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미혼’이라는 이름에는 혼인을 성인이 되거나 성인이라면 꼭 해야 할 행위 또는 맺어야 할 관계라고 규정짓는 인식이 들어있다. 이 인식대로라면 미혼인 사람은 아직 성인으로서 불완전한 상태임을 의미한다. 그래서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어도 혼인을 않고 있으면 옛어른들은 걱정을 하기 시작한다. 주변에서도 ‘혹시 문제가 있는 것 아니야?’, ‘무슨 이유가 있겠지. 저 나이가 되도록 혼자인 걸 보면…’, ‘눈이 높구만.’ 등 결혼을 하지 않은 것만으로 문제를 가진 사람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미혼은 정상적이지 않고 일반적이지 않은 상태라는 부정적인 인식을 품고 있는 이름이다.

 결혼을 하지 않은 채 아기를 낳거나 임신한 여성을 사회에서는 흔히들 ‘미혼모’라고 부른다.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아기를 낳거나 임신했다는 말이다, 불안하고 불완전한 상태의 사람이 양육해야 할 아기까지 가졌다는 말이니, 이 얼마나 큰 문제이겠는가“ ‘아직’ 결혼을 하지 못 한 상태에서 임신한 ‘미’혼모에게는 아기는 축복이 아니라 불행으로 느껴진다.

 ‘미등록이주노동자’에 관한 기사들을 종종 접하게 된다. 출입국관리법상 등록이 되지 않는 이주노동자인 ‘미등록이주노동자’를 우리는 주로 ‘불법체류자’라고 부른다. 우리는 ‘불법’이라는 이름(낱말)에서 범죄를 연상하게 된다. 우리는 그들을 ‘불법’라고 이름붙이고 부르면서 그들의 노동과 삶마저도 불법으로, 범죄로 간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불법’으로 체류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노동은 정당하지 않으며, 그들의 노동에 정당한 댓가를 지불하지 않아도 되며, 그들의 생명을 보호하지 않아도 되며, 그들이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가지는 권리를 보장하지 않아도 된다는 위험한 생각에 이르게 된다.

 실제로 그들의 생활은 매우 위태롭다. 단속에 쫓기고 위험한 작업환경과 부당한 대우에도 대응할 수 없으며 법 이외에 존재한다는 이유로 어떤 것도 보호받지 못 한다. 그들은 불법을 저질렀기에, 우리가 내는 세금으로 범법자인 불법체류자를, 그것도 우리나라 사람도 아닌 외국인인 불법체류자를, 언제든지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예비범죄자이면서 외국인이면서 불법으로 체류하는 불법체류자를 보호해야 할 이유도 필요도 없으며, 그들이 그런 비인간적인 상황에 처한 것은 그들의 자업자득이며 선택이라는 무서운 합리화에 도달하게 된다.
이름 주는 이는 이름이 없는 동물들에게 이름을 나누어 주려고 이름보따리를 어깨에 메고 신나게 길을 떠났답니다.
 
▲우리가 ‘새로운 이름주는 이’가 되어 보자

 장애가 있지 않는 사람을 ‘일반인’이 아닌 ‘비장애인’이라고 이름붙이는 것은 장애와 비장애 중 어느 하나를 일반적인 상태라고 규정짓지 않고, 정상과 비정상으로 구분 짓지 않으며 어느 것이 우위에 있다고 단정 짓고 평가하지 않겠다는 의도적인 행위이다.

 ‘미혼’이 아닌 ‘비혼’이라고 이름붙이는 것은 혼인을 성인이라면 당연히 맺어야 할 인간관계로 규정하는 인식에 반대하는 행위이다. 혼인을 성인이 갖추어야 할 조건으로 보는 가부장적인 관점을 거부하는 행위이다. 혼인하지 않은 상태를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평가하는 잣대가 들어 있지 않는 ‘비혼’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소수를 다수의 눈으로 평가하고 규정지으려 하는 차별에 반대하는 행위이다.

 ‘불법체류자’, ‘불법외국인노동자’가 아닌 ‘미등록이주노동자’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것은 사람과 사람의 삶을 불법이라고 낙인찍음으로써 발생하는 인권유린과 차별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바람의 표현이며, 이주노동으로 발생하는 문제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로 인식전환하고자 하는 작은 시도이다.

 여성가족부에서 19년 추석 즈음에, 가족 안의 호칭을 바꾸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남편과 부인의 부모님을 모두 ‘아버님, 어머님’으로, ‘도련님’과 ‘아가씨’가 아닌 각자의 이름이나 ‘00씨’로 부르는 이름을 바꾸자는 제안인데, 이는 기존의 차별적인 호칭을 변화시켜 가정 안에 존재하는 성불평등을 해소해 보자는 의도이다. 물론 호칭을 바꾼다고 기존의 불평등한 관계가 당장 변화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름을 바꾸어 부름으로써 차별에 무감각했던 인식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고 그간 당연시 받아들였던 여러 사회적 관계를 건강하게 비판해 보는 즐거운 기회를 만드는 시도였다고 본다.

 우리가 우리 사회에 만연한 ‘김치녀’, ‘김여사’, ‘맘충’, ‘급식충’, ‘틀딱’ 등의 사람을 비하하고 조롱하는 이름, 누군가를 배제하고 소외시키는 이름 대신 기울어졌던 관계를 조정하는 이름, 평등함을 지향하는 이름과 인간에 대한 존중을 담고 있는 이름을 새롭게 붙여주는 ‘이름주는 이’가 되었으면 한다.
하수정 <그림책 읽어주는 할머니가 꿈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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