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 북구 신안동 광주역 근처, 태봉산이 있었던 자리다. 왼쪽 건물, 무등로, 주유소 자리에 태봉산이 있었다.

필자는 지난 토요일, 한 시민단체가 주관하는 답사에 참여했다. 참가자들과 만나기로 한 곳은 예전에 태봉산이 있었던 광주역 근처. 그 자리는 우람한 태봉산 유래비가 있는 곳이긴 하지만 몇년전 필자가 꼭 그랬듯이 참가자들은 얼른 그곳을 찾지 못하고 한참을 헤매다가 가까스로 당도했다.

태봉산은 아주 오래 전부터 그렇게 불렸다. 1872년에 그려진 ‘광주지도’에도 이곳이 왕실가족의 태가 묻힌 곳이라 표시했다. 다만, “고려왕자의 태실”이라 적은 것이 좀 이상하지만 말이다.



300년만에 드러난 태봉산

태봉산이 유명해진 것은 1928년 7월에 일어난 해프닝 때문이다. 평소 이 일대 주민들은 태봉산에 무덤을 쓰면 재앙이 든다고 믿었다. 그리고 다들 농투성이였던 그들에게 재앙은 곧 가뭄을 의미했다.

그해 여름, 심한 가뭄이 들자 동네 아낙네들이 들고 일어났다. 각자 호미 한 자루씩을 차고 산으로 올라가 암장을 한 묘를 파헤쳤다. 그런데 얼마쯤 파자 쇳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커다란 돌항아리, 즉 태실이 나왔다. 또 태실을 열자 안에는 새하얀 백자항아리 등 몇 개의 유물이 들어 있었다. 그 중에는 태봉산의 유래를 글로 남긴 석판도 있었다.

석판에 적힌 글을 풀어보면 이렇다. “명나라 연호로 천계 4년 9월3일 지금의 임금께서 사내아이인 아기씨대군을 낳았는데 그 태를 이듬해 3월 이곳에 묻었노라.” 천계4년은 인조임금이 즉위한 2년째인 1624년이다.

어떻든 열혈아줌마들 덕에 태가 묻히고 300여 년만에 태봉산의 실체가 드러난 셈이었다. 대단한 발견치고는 좀 괴상하고 싱겁다고 여기실 분도 있겠지만 사실 사람 사는 얘기가 다 이런 게 아니겠는가?



‘광주지도’엔 ‘고려왕자태실’

그렇다면 태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인조에겐 적어도 네 명의 아들이 있었다. 첫째가 소현세자 둘째가 봉림대군, 즉 나중에 효종임금이 된 사람이다. 셋째가 인평대군, 넷째가 용성대군이다.

태는 분명 인평대군의 것은 아니다. 인평대군은 1622년에 태어났다. 따라서 아기씨 대군은 인평의 동생인 용성대군일 가능성이 크다. 용성대군은 결혼도 하기 전에 죽었다. 자연히 후사가 없었고 그 때문에 ‘광주지도’에 태봉산을 ‘고려왕자태실’이라 했던 것처럼 태실 관리도 좀 부실했던 것 같다. 원래 태봉산에는 관례에 따라 그 유래를 적은 태실비가 있었다. 태봉산이 헐리기 전에 찍은 사진에도 산꼭대기에 지겟작대기마냥 좀 비딱하게 서 있는 뭔가가 보이는데 태실비였다.

하지만 꽤나 마모돼 제대로 읽을 수 없었다. 한때 광주공립제일보통학교(현재의 서석초등학교)의 교장을 지낸 야마모토 데스타로란 사람이 1920·30년대 이것을 읽어보려 했는데 천계 몇년이란 글자만 겨우 읽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출산 7개월 뒤에 아기의 태를 묻은 게 개운치 않다. 1624년은 이괄의 날이 일어난 해다. 인조를 임금으로 만든 쿠데타를 이루고도 합당한 대가를 받지 못했다고 이괄이 난을 일으켜 떠들썩했던 해였으니 그랬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금남로가 생긴 유래와도 연관

결과론이긴 하나, 이괄은 이 태봉산말고 광주에 남긴 것이 또 있다. 이괄의 난은 두달만에 평정됐다. 그러나 인조가 충청도 공주까지 몽진을 갔을 만큼 당시엔 화급했던 사건이었다. 이 때 이괄의 반란군을 소탕해 인조의 구세주가 됐던 이가 광주 출신 정충신이었다.

이 일로 정충신은 군호(君號)를 받았는데 해방 후에 사람들은 그의 군호를 따서 광주의 아주 유명한 도로의 이름으로 삼았다. 정충신이 받은 군호는 금남군(錦南君)이었다.

태의 주인인 용성대군도 완전히 잊혀지진 않았다. 고종 때 용성대군의 후사를 잇는다며 느닷없이 인평대군의 아들 복평군을 용성의 양자로 들였다. 그런데 이 뜬금없는 조치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용성의 형 인평의 후손에 남연군이 있고, 남연군의 아들이 이하응, 곧 흥선대원군이고, 흥선의 아들이 다 알다시피 고종이다.

따라서 용성은 고종에게도 관련이 깊은 사람이었으니 인평대군 못지않게 떠받들어야 할 인물이었다. 공교롭게도 이 조치가 취해진 해가 1872년, 앞서 말한 ‘광주지도’가 그려진 해다.



태봉산이 도시에 남아 있었다면

그리고 여담이지만 1928년 직전에 태봉산에 무덤을 쓴 사람은 정말 운이 없었다. 아니면, 좀 모자랐던가? 원래 태를 묻는 산은 죽은 이의 무덤을 쓰는 곳이 아니다. 태는 산 자의 장소요, 무덤은 죽은 이의 안식처다.

‘세종실록’ 등에 나와 있듯 예로부터 왕실의 태는 주변 산줄기와 통하지 않는 봉우리를 골라 묻었다. 즉, 무덤을 써야 하는 곳이 아니었다. 결국 암장을 한 사람은 번지수를 잘못 알고 무덤을 썼다가, 달리 말해서 과욕을 부렸다가 화만 당했던 꼴이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태봉산이 사라진 것을 애석해 한다. 하지만 누군가 태봉산이 아직 남아있었으면 좋은 점을 물으면 필자는 늘 추상적인 얘기만 했다. 하지만 지난 주말에 분명한 답 하나를 얻었다. 태봉산이 떡 버티고 서 있었더라면, 우리는 적어도 도시의 한복판에서, 그것도 길에서 길을 잃는 일은 겪지 않았을 것이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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