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량 농사문화재들의 봄맞이

▲ “아까와. 나 살아서는 이 밭을 믹힐 수가 없어.” 겨울을 잘 이겨낸 푸릇푸릇한 마늘밭에 비료를 넣어주려 나선 임정임 할매.
 한 줌 씨를 뿌려 한 가마 곡식을 일구어내는 기적을 그저 `농사’라 겸양한다. 50년 이상을 해마다 매진해 온 농사일에 이미 달인이 되고 이미 장인의 경지에 이르른 그이들이 묵묵히 땅에 엎드려 땅을 일궈온 역사를 자랑스러운 `경력’으로 인정받는 당연한 자리가 마련됐다.

 지난 2월 영광 여민동락공동체 10주년 마당에선 `농사문화재’ 뺏지(배지) 수여식이 있었다. 여민동락공동체가 자리한 묘량면에서 농사를 지어오신 65세 이상 어르신 750여 명 중 50년 이상 농사를 지어오신 500여 명이 농사문화재에 해당됐다. 뺏지는 순금도 아니고 그저 금빛 나는 원형에 농사 `농(農)’자를 새긴 것. 허나, 여민동락공동체의 진심어린 예우 앞에서 농부 어르신들은 “국회의원 뺏지보다 좋다” 하였고 “훈장이나 다름없다”고 기뻐하였다.

 겨울 찬바람 끝자락에 누구보다 일찍 봄을 맞으러 나서 이랑마다 봄의 싹을 틔워내는 사람들, 꺾어진 허리로 모를 심고 불볕과 비바람을 이겨내고 집집이 밥상의 밥그릇마다 밥을 지어주는 그이들.

 평생 괭이날과 호미날로 논밭에 줄을 그어 논두렁 밭두렁 경전을 써온 아버지 어머니.

 굳은 땅에 삽날을 대고 호미날을 얹어 흙가슴 두들기는 그이들이 아니면 이 땅의 봄은 어디로 올 것인가. 그이들이 아니면 이 봄날 들녘의 초록불은 누가 댕겨줄 것인가.



 “밭을 맨드는디 꼭 숭군 것 맹키로 질른 것 맹키로 캐도 캐도 독이 나와.”

 호멩이 끝에 걸려 나온 돌멩이로 장성(長城)을 쌓을 만하였다. 그렇게 만든 비탈밭이다.

 “아까와. 나 살아서는 이 밭을 믹힐 수가 없어.”

 삼효리 몽강마을 임정임(81) 할매.

 “작년 9월에 심었어. 눈 속에서 이라고 컸네.”

 겨울을 잘 이겨낸 푸릇푸릇한 마늘밭에 할매는 비료를 넣고 있다.

 “시방은 면에서 사 와. 전에는 다 맨들았어.”

 쇠똥이며 돼지똥, 염소똥, 닭똥, 누에똥까지 온갖 똥과 부엌에서 나오는 재(灰)와 허드렛것과 설거지물이며 걸레 빤 땟물까지 허투루 버리지 않고 쌓아올린 마당 한켠의 두엄더미는 그 집 재산이었다.

 “두엄 높은 집이 부자여. 전에는 비로(비료)가 없어. 퇴비 넣어야 밭이 된께 변소간에 항(독)을 묻어놓고 모태서 그 놈도 퍼서 찌끌어. 잘 삭화서(삭여서) 밭에다 삐려(뿌려). 가찬 디는 쪼빡으로 퍼서 찌끌고 먼 디는 장군에 지고 날라.”

 “소매(오줌)도 아무 데서나 누지 말아라. 그 아까운 거름을 왜 버리고 오냐”는 집집이 가장의 단속은 지당하였다.

 “전에는 놈의 집에 빈손으로 가문 변소간이라도 댕개가라 그랬어.”

 그렇게 만든 퇴비는 땅의 힘을 살리는 보약이었다.

 연암 박지원도《과농소초(課農小抄)》에서 퇴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땅의 좋고 나쁨을 알아보려면 땅을 한 자쯤 판 다음 그 흙을 맛보라. 달면 상등땅, 짜면 하등땅, 달지도 짜지도 않으면 중등땅”이라 하였다.

 땅을 달게 만드는 것은 똥오줌이었으니, 농부들에게 똥오줌은 천하에 더러운 물건이 아니라 금싸라기로 대접을 받았다.

 농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땅심이었기에.

 “뭐이든 잘 거둘란다 맘 묵으문 제일 몬차 밭에 땅심부터 질러야제. 그래야 내 밭에서 난 것이 겉도 좋고 속도 좋아.”

 

 “쥔네가 걸음발 허문 곡석도 작물도 온 줄 알아”

 김막례(84·삼학리 산포마을) 할매는 지팡이를 의지해서 뙤작뙤작 이 밭머리로 나섰다. 할매네 마늘밭은 본디 당산나무가 서있던 마을 들머리에 있다.

 큰바람에 당산나무가 쓰러진 뒤로 지금은 마늘밭 곁에 돌당산만 남아 있다. 정월 보름이면 줄 감아드리고 정성으로 제물올리고 절하고 비는 자리다.

 “우리 동네 사람들 다 무탈하게 해주씨요, 우리 동네 아그들 타관에서 핀안하게 해주씨요, 그렇게 빌어. 기도는 그래야써.”

 지나가다 발걸음 멈추고 남의 밭에 풀 뽑는 박순례 할매가 일러주는 ‘기도법’이다. 내 식구만을 위한 바람은 하늘이 들어주지 않는 욕심으로 알았다.

 “우리 영감은 중도 아니고 소도 아녀. 일은 만날 저질러놓기만 하고 치우기는 내가 치와. 일을 꼽꼽시럽게 못해.”

 여전히 곁에 있는 듯 입에 올리는 그 영감님은 5년 전 세상을 떠났다.

 “놈의 빚보증 서서 고상하고 논 살라고 차곡차곡 바친 곗돈도 못받고 평생 그렇게 내야 놈 주고 살았어. 우리 눈에 피눈물 날망정 놈의 눈에 눈물 흘르게는 안해 봤어.”

 일마다 꼽꼽이 찹찹이 해야 하는 버릇을 못 버리는 할매. 마늘 농사를 짓는다면 남의 것보다 대가리가 굵은 마늘을 캐낼 때 마음이 흡족하다.

 “당장 오늘 하래 일도 내 뜻대로 안 될 때가 있어. 뭣이고 내 욕심대로 되든 안해. 풀 한나라도 더 뽑아주고, 한번이라도 더 딜여다보고 그러문 후회를 덜 허제. 더 잘헐 것을 그리 안허고 홀홀 털제.”

 성공 앞에서도 자랑하지 않고 실패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할매. 그저 오늘도 마늘이 잘 깨나고 있는가 궁금했을 뿐이었다 한다.

 “날 따순께 인자 쪼깨썩(조금씩) 깨나. 요런 것들이 막 깨난께 궁금해서 못 전뎌. 어찌고 방에 꽉 들어앙거 있겄어. 딜다 보러 오제. 쥔네가 걸음발 허문 곡석도 작물도 온 줄 알아.”

 시시때때로 문안드리는 막례 할매 걸음에 밭이랑마다 갸웃갸웃 봄의 얼굴이 파릇하다.

 

 “내야 밭이 깨깟하기로 소문이 났는디”

 “오매 풀밭이 되아 불았구만.”

 ‘밭’이 아니라 ‘풀밭’인 것이 유양례(69·삼효리 효동마을) 어매에겐 부끄러움이다.

 “우리 시어마니가 건강해갰는디 얼마 전에 방에서 무단시 넘어져갖고 벵원에 입원하셔 불었어. 날마다 같이 밭에 댕일 참인디 시어마니가 딱 아파분께 인지까 벵원 왔다갔다 하니라 하래가 가불어.”

 이 봄에 밭에 행차할 겨를이 없었던 이유다.

 “놈놈끼리 좋게 살라문 마음을 비우고 살아야제. 놈들은 ‘시’자 들어가문 웬수라근디 오래 살다본께 ‘시’자가 띠아져불었어. 남편은 2005년도에 가불었어. 살았으문 73세.”

 ‘살았으문’이라고 해마다 한 살씩 맘속에서 더해 온 나이가 입밖으로 툭 나온다.

 오늘은 포도시 짬을 내어 호미 들고 나섰다. 일복으로 걸치고 나선 옷의 등판 한가운데 꿰맨 자국이 역력하다.

 썽썽한 것들도 쓸모를 잃고 쉬이 버려지는 세상이건만, 어매한테 이르러서는 도통 버려질 것이 없다. 손길 닿는 그 자리마다, 살리고 살린다.

 “가을에 산 호무가 이러코 닳아져붓써. 밭이 일을 시캐.”

 “요 근동에서 내야 밭이 깨깟하기로 소문이 났다”는 어매.

 “근디 요러고 풀 난 거 봐. 헛소문이 되제.”

 헛소문 아니 되도록, 어매의 정직한 손이 시방 바빠지는 중이다.

 

 “앞허고 뒤가 같고 껍딱이나 속아지나 똑같애야제”

 ‘안노처’라고 다짐처럼 구호처럼 쓰인 글자를 본다. ‘키맨’이나 ‘필드왕’이나 ‘사또’가 그러하듯, 병충해를 완벽하게 이기고자 하는 농부의 바람을 읽어 만든, 농약사 사은품 모자다.

 ‘안노처’ 모자를 쓴 오석조(82·삼학리 학동마을) 할아버지는 큰길가에서 커다란 갈퀴로 마른 풀을 긁어모으고 있다.

 “뭐이라도 조깨 해 묵을까 허고 밭 맨들고 있어. 땅이 훤헌 것이 아까와서.” 밭을 만드는 곳은 국유지다.

 “우리집 망구씨는 있는 밭도 다 못 번디 장차 몇 년이나 해 묵겄다고 그 고생을 허냐고 ‘그만 해라우 그만 해라우’ 무섭게 말려.”

 굳이 차들 오가는 곳에 길쭉하게 난, 그닥 맞춤하지 않은 땅을 밭으로 고르고 있는 데는 이유가 있다.

 “여그가 도로변이라 저그 산기슭 옴팍허니 그런 디보담 나 죽은 뒤에라도 누구든지 밭 벌기 핀한 자리”겠다 싶어서다.

 살아온 날은 길고 남은 날은 노루 꼬랑지만큼 짧다는 것을 아는 노인이 어느 봄 몇 날을 장차 누군가 이 밭에 발걸음 들일 사람을 맘에 품고 괭이질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 손 지나간 자리에 다른 사람 손 댈 것 없이 헌다”는 것이 그이의 ‘일 원칙’.

 “우리 어머니아버지한테 그것을 배왔어. 일 못헌다 손가락질 받고 살지 마라고. 어쨌든간에 부지런허문 굶을 때 죽이라도 묵는다 글케 배왔어. 근위무가지보(勤爲無價之寶)라고, 부지런은 값없는 보물이단 그 말이 참말이여.”

 땅에서 벌어먹는 사람의 비결은 ‘오직 부지런’뿐.

 “사기나 잔꾀나 그런 것은 어리부당한 얘기여. 부채(부처) 뒤 마니로 앞뒤가 달르고 그런 것은 작물한테는 안 통해. 앞허고 뒤가 같고 껍딱이나 속아지나 똑같애야제. 누가 목구녕에다 칼을 대도 거짓으로 버무리문 안되야. 그 즉시는 덮어진가 몰라도 시간 가고 날짜 가고 달이 가고 해가 가문 밝혀져. 윗자리든 아랫자리든 그런 것을 각심을 허고 살아야제.”

 ‘안노처’ 할아버지의 ‘안놓쳐야 할 말씀’이다.

 

 “농사에 젤로 중요한 것이 ‘적기’여”

 “내가 이 근방서는 농사를 최고로 잘 지어. 나락을 한 마지기에 다른 사람은 석 섬 반이나 넉 섬을 낸다 하문 나는 여섯 섬을 묵어.”

 결론은 “내가 바로 묘량면의 수확왕”이라는 말씀. 그 대목에서 목소리 더욱 우렁우렁해지는 강형원(81·신천리 진천마을) 할배. 그 자부심이 할배한테는 농사짓는 힘의 근원이다.

 “농사를 잘 지슬라문 젤로 중요한 것이 ‘적기’여. 적기를 보고 숭거야 수확을 많이 하제.”

 땅을 향한, 농사를 향한 할배의 애착은 지금 당장이 아니라 ‘난중’까지를 염려하고 도모하는 데서도 짚어진다.

 “저 건네가 내 논인디, 논 일곱 배미를 요참에 두 개로 맨들아 불었어. 다랑치가 일곱 갠디 두 개로 맨들았다 그 말이제. 근께 사람들이 날 보고 미친 놈이라고 해. 왜 그 고생을 하냐고. 난중에 내가 못 지문 다른 사람이 벌더라도 그것이 농사 짓기 더 수월하겄다 싶어서 그리 맨들았어. 요새는 다 기계로 농사진께 다랑치가 많으문 힘들어서 농사 안 질라고 해.”

 ‘놈 수월하라고’, 그 맘으로 고생을 사서 했다.

 “인자 앞으로 누가 지슬란가 모르제. 새끼들이 나이묵으문 와서 질란다고 말은 헌디, 닥쳐봐야 알제. 나는 아흔 살 묵을 때까지 질란가 백 살 묵을 때까지 질란가 장담은 못해.”

글=남인희·남신희 ‘전라도닷컴’ 기자

사진=박갑철 ‘전라도 닷컴’ 기자·최성욱 <다큐감독>



※이 원고는 월간 ‘전라도닷컴’(062-654-9085)에도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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