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인 마을 지도=박갑철 기자
 <지금 이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울고 있다./ 세상 속에서 이유 없이 울고 있는 사람은/ 나 때문에 울고 있다.>(릴케, ‘엄숙한 시간’ 중)

 누군가 울고 있는 이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이 있다. 이 마을에서 울음소리는 묻히지 않는다.

 타인의 고통에 책임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 누군가 억울한 일을 당하면 누군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다. 분개할 일에 분개하기를 결코 단념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고, 자신과 타인의 존엄성을 동등하게 지키는 사람들이 있는 마을. 광주 광산구 월곡동 고려인마을이다.
 
▲‘통하는 버스 정류장’ 월곡시장 안내판

 고려인마을로 통하는 ‘월곡시장’ 버스정류장엔 특별한 안내판이 붙어 있다. ‘안녕하세요’ ‘저를 좀 도와주세요’ ‘어떤 버스가 OOO에 가나요?’ ‘이 버스 OOO에 가나요’ ‘여기가 이 지도에서 어디에요?’ ‘고맙습니다’ 라는 한국어를 영어 중국어 베트남어 러시아어로 설명하는 표시판이다.

 중국인, 베트남인, 고려인이 많이 사는 월곡동 ‘통하는 정류장’에 담긴 마음을 읽는다. 어떤 글자도 읽을 수 없고, 아무 말도 알아들을 수 없는 캄캄절벽 같은 낯선곳에 던져진 이들에게 내미는 손길이다.

 넘어진 사람을 보면 반드시 손을 내밀어 일으켜세우는 사람이 있다. 광주 새날교회 이천영(60) 목사.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고려인 신조야(61)씨에게 그이가 내민 손길이 오늘 월곡동 고려인마을의 씨앗이 되었다.

 <이야기라는 것은 사람과 사람이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까지도 함께 나누면서 가슴 벅찬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마을 만들기는 집이나 도로, 광장 등을 만들어 내는 것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사람과 사람을 새롭게 결합시키는 일도 되는 것이다.> (엔도 야스히로, 《이런 마을에서 살고 싶다》 중)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만나 관계를 맺으면서 이루어진 마을. 들머리에 ‘고려인마을’이라는 표지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눈에 띄는 반듯한 건물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곳이 고려인마을이라는 것은 여기저기로 가지를 치며 벋어 있는 골목길에, 고만고만한 집과 가게들 사이에서 만나는 간판들에서, 그 간판에 올려진 러시아어와 지나가는 사람들이 시시때때로 흘리는 러시아말에서 금세 드러난다.
 
▲고려인종합지원센터, 아동센터, 역사박물관

 2층 주택을 최소한으로 개조해 쓰고 있는 고려인종합지원센터는 고려인마을의 심장이다. 이곳은 당장 거처 없이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 고려인들이 머물러가는 쉼터이자 고려인들의 취업, 산재, 체불임금, 비자 문제 등을 상담하는 공간이며 교육장이다.

 핸드폰에 저장된 고려인 전화번호가 2000명이 넘는다는 신조야 센터장의 전화벨은 끊임없이 울린다. 저마다 풀어놓는, 통역되어야만 하고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들은 이곳에서 반드시 해결된다.

 입구에 나란히 올려진 간판은 고려인마을 지역아동센터. 참새떼같이 재재거리는 아이들의 명랑한 소리가 울려 나오는 어린이집이 1층에 있다.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농촌 들녘이나 공장에서 일해야 하는 고려인 부모들이 자녀들을 안심하고 맡기고 생활의 기반을 다질 수 있도록 돕는 귀한 공간이다.

 ‘예뻐요’라는 뜻의 러시아어 ‘크라시바’가 쓰인 패널에 아이들이 만든 종이공예가 걸려 있다. 강로자(30)씨와 권릴리아(42)씨 두 명의 교사가 3세부터 7세까지 아이들 30여 명을 돌본다. 영양사가 따로 있어 세 끼니와 간식을 마련한다.

 대부분 우즈베키스탄이나 러시아음식. 아이들은 아직 한국 음식은 잘 못먹지만 한국말은 조금씩 익혀 나가는 중.

 ‘곰 세 마리’ 같은 한국 동요에 맞추어 춤을 추는 아이들은 엄마 아빠가 일 끝나고 데리러 오면 “안녕히 계세요”라고 서툰 한국말로 선생님께 배꼽인사를 하고 집에 간다.

 종합지원센터 뽀짝 옆에 어깨를 대고 앉은 고려인역사박물관. 80년의 유랑 끝에 찾아온 고려인들은 이방인이 아니라 한 뿌리 한 민족이라고 말해주는 고난의 발자취를 이곳에서 읽는다.

 1860년 두만강을 건너 우수리강 유역에 정착한 조선 농민 13가구로부터 시작, 가난한 농민들의 농업이민과 항일독립운동가들의 망명이민의 근거지가 되었던 연해주.

 <연해주에서는 1908년 한 해에만 총 6만9804명의 의병이 1451회 무장출동을 했으며, 연해주 한인 지도자들은 교육과 언론을 통한 민족혼 고양을 목적으로 연해주에 11개 학교와 ‘대동공보’ ‘해조신문’ 등의 언론사를 설립했다.>

 연해주로 이주한 한인들이 1937년 강제이주 되기 전까지 연해주 각지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항일투쟁을 했는지 들여다보고 나면, 타국에서 온갖 차별을 견디며 살다온 그들의 후손인 고려인에게 조국이 얼마나 부당한 대접을 하고 있는지 새삼 알게 된다.

 역사박물관 한쪽엔 큰 책상과 의자들이 놓여 있다. 이곳은 사단법인 고려인마을의 사무총장인 오경복(57)씨가 온갖 잡다하고도 중요한 일들을 처리하는 공간이고 매주 월요일마다 체불임금 등 각종 민원을 갖고 오는 고려인들의 법률 상담실이기도 하다.
 
▲청소년문화센터, 고려FM, 바람개비꿈터…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고려인마을 청소년문화센터가 있다.

 “방문자들이 고려인 아이들에게 흔히 물어요. ‘너 한국 언제 왔어? 너 한국말 잘 해?’ 그것은 예의 없는 질문이에요. 아이들이 상처 받을 수 있어요. ‘나는 이방인입니다. 나는 한국말 못합니다’라고 인정해야 하는 거잖아요. 한 핏줄한테 그런 것 물어보는 것 아니잖아요.”

 그렇게 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안드레이(34) 선생님이 이곳의 센터장. “이 곳은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아이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하게 하는 곳”이라는 원칙이 지켜지는 청소년 문화놀이터다.

 청소년문화센터 한켠에는 고려인 공동체 라디오 ‘고려FM’방송의 스튜디오가 자리하고 있다. 한국어보다 러시아어에 능숙하기 때문에 미디어에서 배제되고 소외된 고려인들을 위하여 대부분 러시아어로 방송되는 고려FM의 다정하고 알찬 프로그램은 24시간 들을 수 있는 어플로 고려인 안과 밖을 잇는 소통의 창구가 되고 있다. 이천영 목사의 아들인 이믿음(25)씨가 젊은 패기와 열정으로 맘과 몸을 다 바쳐 꾸려가고 있다.

 함께 읽자고 거기에 걸었을 시 한편에 마음이 아렸다.

 <백두산 말기에 먹지 못해/ 먼 북쪽으로 쫓겨난 할아버지/ 손자 난, 조선사람이다/ 구르지아의 나나보다도/ 까자크의 아빠보다도/ 러시아의 마마보다도/ 조선의 어머니가/ 내 심장에 깊더라/ 난 조선사람이다/ 난 고려인이다>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시인 김준, ‘난 조선사람이다’ )

 길 맞은편엔 바람개비꿈터 공립지역아동센터(센터장 주남식)가 있다. 낯선 이국땅에서 살아가게 된 이주민 자녀들과 고려인 자녀들이 언어나 문화 차이로 인해 충격을 받거나 소외당하지 않고 활짝 기지개를 켜고 자랄 수 있도록 하자고 마련한 공간이다.
 
▲새날교회, 고려인마을협동조합

 고려인마을의 모든 기관은 한 공간에 두 개쯤의 간판을 올리고 있다. 한 가지 용도로만 쓰면 낭비라는 듯, 시시때때로 변신하는 공간들. 어제는 ‘새날교회’, 내일은 ‘고려인 한글교실’, 그런가 하면 ‘고려인마을협동조합’.

 교회는 고려인들이 모여 필요한 정보를 교환하고 힘든 일을 나누고 서로 돕고 의지하는 공간이다. 고려인마을협동조합(K-COOP)은 지역아동센터, 유치원, 어학 등의 교육조합사업과 공동구매, 여행사, 이동통신, 카페, 식당 등의 소비자조합사업 그리고 출입국상담, 법률, 의료 등의 체류와 거주에 필요한 다양한 지원사업을 하고 있다.

 사람과 사람이 기대어 사는 고려인마을 고샅고샅을 걷다 보면, 겨울 다음에 필연코 오는 봄을 꼭 만나게 되리라는 믿음이 생긴다.

 <눈보라 속에는 손이 들어 있다 하얗게 나부끼며/ 다가오는 손 누가 추워하나 누가 아파하나/ 하얀 눈보라 속에는 따스한 손들이 들어 있다…>
 (김승희, ‘눈보라 속에는(사랑4)’ 중)

글=남인희·남신희 ‘전라도닷컴’ 기자/사진=박갑철 ‘전라도닷컴’ 기자

※이 원고는 월간 ‘전라도닷컴’(062-654-9085)에도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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