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과 더불어<2> 우물 만담

▲ 시방도 때없이 시암 발길 이어지는 흔적이 다숩다. 화순 도암면 등광리.
 ‘주전자에 물이 떨어지지 않게 잘 떠다 놓습니다.’
 어떤 아이가 초등학교 다닐 적 받은 성적표의 행동발달사항에 그런 글귀가 써져 있었더란다.
 그때부터 그 아이는 언제 어디서나 ‘주전자에 물이 떨어지지 않게 잘 떠다 놓는 사람’이 되려 하였다.
 품이 들어가는 일, 생색도 안 나는 일, 하지만 그 누군가에게 보탬이 되는 일.
 마치 굳은 맹세나 한 것처럼 그런 일을 거듭하는 사이 그 아이는 목마를 때 꼭 그 자리에 있는 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시방 어느 시암가에서 길어올리는 물 한 방울을, 어느 텃밭을 어느 들녘을 적실 물 한 줄기를, 생각한다.
 메마른 자리를 희망으로 바꾸는 물의 행로에 깃든 몸공들이 거룩하다.

 “시암에 물이 출출 넘어간디 해필 동우가 없어서 못 질러. 오매 아깐거 하다가 깨고 보문 꿈이여. 허망했제.”

 찰방찰방한 물이 얼마나 원이었으면 꿈도 그런 꿈을 꾸었을까.

 임실 덕치면 가곡리 원치마을 노영예(74) 할매네 장꽝에는 시방도 두 귀가 반듯한 고무동우가 놓여 있다.

 ‘실용특허 말표’라는 상호 아래 돋을새김한 말의 추켜든 앞발이 기운생동하나니.

“전에는 물 한나까뜩 이고도 물동이에서 손 놓고 걸어와.” 임실 덕치면 원치마을 노영예 할매.

 “내가 선택한 물건은 함께 나이 들어가는 인생의 파트너”라는 생색은 없다. 용도폐기된 손때묻은 살림살이를 내치지 않고 애틋하게 간직해 온 할매.

 옹구동우 이다가 나무동우 이다가 양철동우 나오니 ‘출세했다’ ‘호강이다’ 하였다. 하물며 깨지지도 녹슬지도 않고 개봅기조차 한 고무동우는 고샅의 신문물이었다.

 할매는 40여 호 살던 동네서 집집이 여자들이 부러워하는 각시였다.

 “그때 세상에는 우물질 가차운 것이 큰 복이여. 전에는 때 없이 시암으로 종종거리고 댕긴게.”

 하루에도 열 번은 더 이어 날랐으니 혼인한 이래 할매가 길어낸 물은 장강을 이루고도 남으리라. 정지문 옆 벼랑박에 걸린 폭삭한 또가리는 아내의 노고에 바치는 남편의 위로였을 터.

 또가리와 함께 물 긷는 행장의 필수품은 바가치.

 “바가치를 동우 우에다 띄워야 찰방찰방 험서 안 억실러져. 그냥 이고 오문 쭐렁쭐렁 억실러져. 그때는 동우에 한나까뜩 물을 이고도 동우 귀에서 손 놓고 걸어와. 한 손에는 바께스에다 물 질러서 흘리도 않고 들고 와.”

 까빡 억실러질 물을 안 억실러지게 길어내는 내공으로 걸어온 생애다.

`서기 1967년도 준공’ `토도리 정호수’ 라고 역사를 아로새긴 완도 토도마을 우물 앞 기념비. “허드렛물일 망정 뚜껑 덮어 간수허지.” 이철안 할아버지.

 “전에 엄마들은 강했어. 이녁 몸뚱아리배끼 없은게.”

 달마지마을(강진 성전면 송월리) 조태남(93) 할아버지한테 들은 옹돌시암 이야기를 기억한다.

 “들에 가다 보문 어덕 밑에 옴팡하게 옹돌시암이 있거든.”

 그 시암이 소용될 데 없다고 묻혀지는 것이 아깝고 짠하다 하였다.

 “전에 구식 어머니들은 애기를 키움서 방에다 가돠놓고 밭을 매러 가. 봐줄 사람이 없어. 몸으로 밭은 매고 있어도 정신은 그 애기를 보듬고 있어. 그러다가 인자 점심때가 되문 애기 젖을 물리러 와. 땀흘린 미영 치매 저고리 입고 오다가 그 옹돌시암에서 젖통을 시쳐. 더운 몸이라 더운 젖통 그대로 애기를 믹이문 행이나 설사할까 무선께.”

 흔적 없이 사라져가는 그런 시암 앞에 문화재처럼 푯말을 딱 세워놓고 싶다.

영광 묘량면 장동마을 우물.

 <이것은 우리들 구식 어머니가 밭을 매다가 정신도 넋도 없이 집으로 옴시로 애기가 탈날까 싶은께 젖통 시치고 와서 애기를 먹이던, 그 어머니 젖통 씻던 시암이다.>

 우물 곁에 시암 곁에 발걸음 소리 끊이지 않던 시절의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다.
글=남인희·남신희 ‘전라도닷컴’ 기자

사진=박갑철 ‘전라도닷컴’ 기자·최성욱
완도 토도마을 신경심 할매의 보물, 옹구 물동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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