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새들’에서 `푸릇푸릇’으로
백 살 할매 텃밭에 납셨네
어떤 아이가 초등학교 다닐 적 받은 성적표의 행동발달사항에 그런 글귀가 써져 있었더란다.
그때부터 그 아이는 언제 어디서나 ‘주전자에 물이 떨어지지 않게 잘 떠다 놓는 사람’이 되려 하였다.
품이 들어가는 일, 생색도 안 나는 일, 하지만 그 누군가에게 보탬이 되는 일.
마치 굳은 맹세나 한 것처럼 그런 일을 거듭하는 사이 그 아이는 목마를 때 꼭 그 자리에 있는 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시방 어느 시암가에서 길어올리는 물 한 방울을, 어느 텃밭을 어느 들녘을 적실 물 한 줄기를, 생각한다.
메마른 자리를 희망으로 바꾸는 물의 행로에 깃든 몸공들이 거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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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을미년생. 딱 올해로 백 세이시다.
순창 동계면 동심리 추동마을 박복례 할매가 올해 새로 입적한 가족 중에 대문 앞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것들은 토란.
<내가 뿌린 씨앗들이 한여름 텃밭에서 자란다/ 새로 입적한 나의 가족들이다/ 상추 고추 가지 호박 딸기 토마토 옥수수 등의/ 이름 앞에 김씨 성을 달아준다/ 김상추 김고추 김가지 김호박 김딸기…> (김종해 ‘텃밭’ 중)
그러니까 이 토란들은 모계를 따지자면 박토란들인 셈이다. 할매는 이 가족들 때문에 요새 하늘에 대고 부탁하는 원(願)이 간절하다.
“그저 비나 한 둘금 뿌래주씨요이.”
행여 초록잎이 시들새라 할매 텃밭에 납신다. 지팡이를 의지해서 뙤작뙤작 수돗가에 가서 수대에 물을 담고 바가지를 띄워 텃밭으로 드는 몇 걸음이 천로역정이다.
이윽고 토란을 향해 기울인 바가지의 물코에서 쏟아지는 물줄기. 각도는 가파르지 않고, 물흐름은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은 것이 백년을 살아낸 할매의 내공이 담겨 있다.
새들새들했던 박토란네들은 비로소 쾌청한 얼굴을 푸릇푸릇 쳐들고 할매를 치어다보고 있다.
“도시는 돈이 중해도 촌에서는 비가 중해. 농사는 하느님에가 매였어. 하느님이 한 둘금 내려주문 다 펄펄허니 살아나. 뭐시그나 쭉쭉 커.”
전에는 비가 오지 않으면 하늘이 노했다고 제를 지냈다.
“큰 가뭄 들문 기우제를 지내. 날 받아갖고 새로 장봐다 여자들이 음석 장만해주문 남자들이 갖고 산으로 올라가. 기우제 지내고 나문 어쩔 때는 산에서 비들을 맞고 와. 모다 지성시럽게 원을 허문 하늘에서 글케 들어줘.”
지구의 한 조각을 초록으로 덮은 할매의 텃밭. 박토란 옆으로 박콩 박고구마 박생강이 옹기종기 키를 키우고 있다.
“내가 안즉은 씨를 간직해. 씨가 있고 흙이 있으니 씨를 숨구는 거여. 왜 못 키와. 자식도 야달을 키왔는디.”
작은 수대에 물을 채워 몇 번이고 밭고랑을 드나드는 걸음은 자식을 키우는 그 맘이신 것이다.
“한번이라도 더 딜여다보고 그러문 후회를 덜 허제. 더 잘헐 것을 그리 안허고 홀홀 털제.”
말라가는 생명을 푸르게 살려내려는 진양조의 걸음걸음.
오늘 이 땅 위 누구의 이력이 이처럼 장중할까.
글=남인희·남신희 ‘전라도닷컴’ 기자
사진=박갑철 ‘전라도닷컴’ 기자·최성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