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뽄을 봐서 질내 떠놔지던만”

▲ 거기 부뚜막에 날마다 조왕물그릇 올려지노니, 조왕할매는 이 정제를 떠나지 않고 분명 거(居)하실 게다. 임실 덕치면 가곡리 원치마을 한순자 할매네 정제.
 ‘주전자에 물이 떨어지지 않게 잘 떠다 놓습니다.’
 어떤 아이가 초등학교 다닐 적 받은 성적표의 행동발달사항에 그런 글귀가 써져 있었더란다.
 그때부터 그 아이는 언제 어디서나 ‘주전자에 물이 떨어지지 않게 잘 떠다 놓는 사람’이 되려 하였다.
 품이 들어가는 일, 생색도 안 나는 일, 하지만 그 누군가에게 보탬이 되는 일.
 마치 굳은 맹세나 한 것처럼 그런 일을 거듭하는 사이 그 아이는 목마를 때 꼭 그 자리에 있는 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시방 어느 시암가에서 길어올리는 물 한 방울을, 어느 텃밭을 어느 들녘을 적실 물 한 줄기를, 생각한다.
 메마른 자리를 희망으로 바꾸는 물의 행로에 깃든 몸공들이 거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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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가 날마동 새복마다 조왕물을 몬야 떠놓더라고. 그 뽄을 봐서 근가 나도 질내 그러코 떠놔지더만.” 한순자 할매.

 삐그덕 소리를 내며 열리는 나무 문. 수천 수만 번 오목오목 디뎠을 발자국에 흙바닥은 단단하게 다져져 있다. 어둑신한 중에도 가마솥 뚜껑은 반질반질 빛난다.

 그리고 가마솥 걸린 부뚜막에 꼭 있어야 할 짝, 성냥을 대신한 라이터와 함께 작은 물그릇이 조신하게 놓여 있다.

 한순자(83·임실 덕치면 가곡리 원치마을) 할매네 정제.

 “시어마니가 새복마동 조왕물을 몬야 떠놓더라고. 시집와본게 그래. 그 뽄을 봐서 근가 나도 질내 그러코 떠놔지던만.”

 어떤 유산은 그렇게 전승된다.

 수고롭다 생색낼 것도 없이, 구식이라 떨쳐낼 것도 없이, 그저 해오던 대로 ‘질내’.

 ‘떠놔지던만’이란 수동형의 말에 역설적으로 내밀한 의지가 실린다.

 할매는 열여덟 살에 시집와서 올해 여든 셋. 예순 다섯 해 동안 첫물 떠서 조왕물그릇에 담아 부뚜막에 올리는 것으로 하루를 열어 왔다.

 집안 곳곳에 거하는 신들 중 조왕할매는 부엌을 관장하는 신. 조왕물그릇(조왕중발) 하나가 거기 있어 부뚜막은 성단(聖壇)이 되고 성소(聖所)가 된다.

 “집 떠나서 어디 가문 못 올리고, 초상 나문 안올리고.”

 그 몇몇 날들을 제외한 수천 수만 날 동안 질기게 치러온 의식이다.

 “옛날에는 새복에 시암물 떠다가 밥해 묵을람시로 몬야 조왕물부터 떠다가 놓았지.”

곡성 죽곡면 가목마을 정제.

 이른 새벽 길어온 첫물. 청정(淸淨)한 물은 그렇게 신과 사람 사이를 잇는 지엄한 역할을 했다. 맑고 깨끗함을 의미하는 그 두 자에는 모두 ‘물’이 들어 있다.

 ‘정화수(井華水) 떠놓고 빈다’는 말은 물의 맑음에 마음의 맑음과 지극한 정성까지를 한데 얹은 의미일 터.

 “인자 조왕할매가 물맛이 빈했다 그러까 어짜까.”

 세월 따라 물은 우물물에서 수돗물로 변해 왔지만, 그릇에 담기는 마음은 변함없다. 삼가고 모시는 공경, 오로지 자식들의 무탈에 가닿는 간절한 소원.

 “이날이때까지 떠논 것인게 떠놔야지, 나 꼼지락헐 때까지는.”

 부뚜막도 우물도 사라져가는 시대지만, 그런 마음들 살아 있어 아직 포도시 자리 보전하고 있는 조왕할매, 조왕물그릇.

 “뒷집 할매도 집은 신식으로 고쳤어도 씽크대 욱에다 날마동 조왕물그륵 떠놓더만.”

 집집 정제마다 그 집 식구랑 이무롭게 동거하며 그 집 식구들의 마음속 기원에 귀기울이는 조왕할매란 존재, 조왕물그릇이 증거한다. 신들의 거처는 ‘믿는 마음’이니.

 한순자 할매가 조왕물그릇 올리는 동안, 조왕할매는 이 정제를 떠나지 않고 분명 거(居)하실 게다.
글=남인희·남신희 ‘전라도닷컴’ 기자

사진=박갑철 ‘전라도닷컴’ 기자·최성욱

※이 원고는 월간 ‘전라도닷컴’(062-654-9085)에도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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