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순
당신꽃 필 무렵-무안 어매들의 삶이야기 모음집

▲ 한사코 밀어올린 초록싹처럼 생애의 시린 들판에서도 환한 용기로 스스로를 일으켜왔다. 김정순 어매.
 <이 세상에서 제일 세고, 제일 강하고, 제일 훌륭하고, 제일 장한, 인생의 그 숱하고도 얄궂은 고비들을 넘어 매일 ‘나의 기적’을 쓰고 있는 장한 당신을 응원합니다. 이제는 당신꽃 필 무렵!>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마지막회에 붙은 헌사다.
 “왜 나를 숭글 디가 없어 여기다가 숭궈 놨나” 싶은 돌밭에서 스스로 일어나 꽃이 된 어매들한테도 바치고 싶다.
 무안여성농어업인센터에서 한글을 배우는 어매들의 삶의 이야기를 옮겨 쓴 모음집 《시방은 암것도 안 무솨, 글자를 안께!》. 글자를 알기 전에도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암것도 안 무솨’라는 불굴의 정신으로 살아왔고, 호강질(길)은 몰르고 고생질(길)로만 건너오면서도 발 디딘 자리에서 한사코 꽃을 피워내며, 가난하면서도 각박하지 않았고, 항꾼에 나누고 퍼주는 버르쟁이를 고치지 못한 어매들의 이야기다.
 강맹순 강영희 강정례 김고만 김단례 김연례 김옥금 김정순 김포접 김화엽 노정임 박삼녀 박은심 안덕심 안미순 유숙희 윤명애 윤연임 이경자 이백임 이삼임 이윤심 이현임 임춘금 전덕례 전정순 정광순 정매신 정정례 정춘심 주순례 최단임 최순례 최영자 김귀심 김옥자 김옥희 김순자 배대례 신금자.
 땡볕과 폭우와 거센 바람 속을 지나온 생애의 시간 속에서 핀 당신꽃들의 말씀을 새긴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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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장에는 서렁기가 만발했습디다. 근디 오늘은 어째 안 보이네.”

 서렁기를 사러 무안장에 납신 김정순(84·현경면 마산리 마산마을) 어매.

 “우리 두째 딸이 좋아해.”

 자식들이 좋아하는 것은 항시 몸에 새겨져 있어 절로 그 곳으로 발걸음 향한다. 어매가 돈을 꺼내는 곳은 지갑이 아니라 허리춤 깊숙이 바지 안에 찬 주머니. 주머니라면 어매한테는 각별하다.

 “재끼(잡기, 노름) 좋아했던 서방이 돈을 다 내노라고 해. 돈을 조마니에 넣고 고쟁이 속에 차고 자는 칙끼 허고 있어. 글문 조마니만 가새로 짤라갖고 가. 그럴질 알문서도 밑밥으로 차고 자. 지발 그놈만 갖고 가라고.”

 혼자 살림을 꾸리느라 어매는 두부장사며 곡물장사며 안해본 장사가 없다.

 “효부상은 있어도 서방상은 없다더만. 동네사람들이 그래. 서방한테 잘한 것은 상이 없응께 내 공덕이 아깝다고.”
 
 “효부상은 있어도 서방상은 없다더만”

 “돈 백 원을 꿀라문 아직내 집집이 돌아댕기고 저녁밥을 굶대끼 하고 살았어. 딸들은 다 공부를 지대로 못 갈치고 식모살이만 시캤제. 서울은 개도 다 쌀밥을 묵은다드라 그럼서 가그라 보냈제. 없은께. 배고픈께.”

 딸 다섯 아들 둘을 키웠다. 어린 나이에 집 떠나 어매 떠나 식모살이 갔던 그 딸들이 이제 모두 잘 살고 어매를 그리생각한다.

 “딸들이 백원만 봐도 천원만 봐도 어매 손에다만 놓고. 노래 잘하는 싯째 딸이 일본으로 밤무대 뛰러가서 돈 많이 벌고 그 끈으로 동생들 데려가고 집안도 살리고. 보내준 돈을 통장에다 너코 너코 해갖고 난중에는 땅도 사고 그랬제.”

 그 밭이 어매를 항시 부른다.

 “근디 아들이 농사를 못하게 자꼬 말개. 들에 가서 엎진 일을 못하게 해. 인자 지발 편히 살라고.”

 그래도 들을 어매가 아니다.

 “일배끼 안 배(배워)놔서 일만 눈에 번해.”

 그래서 아들한테 결연히 선언했다.

 “엎진 일은 안하고 앙근 일은 할란다”고. 여전히 양파밭으로 파밭으로 고구마밭으로 동당거리고 다니며 ‘앙근 일’은 다하고 사는 어매의 하루하루.

 “나는 내일 할 일을 오늘로 다거서(당겨서) 하는 사람이라 평생을 바뻐. 말도 누가 안 뺏아간께 싸알쌀 하문 된디 애초에 버르쟁이가 그러코 생갰어.”

 쫓기듯 일하고 살아온 습관 탓에 어매는 말도 담박칠치듯 빠르다.

 “하다 보지런한께 초저닉 한 시에 일어나문 잠이 안와. 따땃하게 이불 덮고 드러눠있으문 존디 자발없응께 일어나서 돌아댕기요.”

 일주일에 두 번 한글수업이 있는 날이면 더 바쁘다.

 “몬야도 시리떡 쪄다준께 모다 잘 묵대. 긍께 오늘 새복에는 학교에 갖고 올라고 떡하고 찰밥 찌고. 쩌참에 여그 어매들이 강강술래 공연하러 가는 날에는 찹쌀 서되 해서 찰밥을 해갖고 갔당께. 그날 여그 현경(면)사람들은 다 묵었는디 해제(면) 사람들은 못 묵었어. 그것이 애도라서 그 사람들한테 찰밥 묵일 요량을 하고 오늘 새복에 한 되 했당께. 쌀이 없어? 손이 없어? 맘만 묵으문 하는 것인디.”

 어매는 숙제나 공부보다 “찰밥 해나르고 떡 해나를” 궁리가 머릿속에 꽉 찼다. 쉬는 시간이면 어매들 앉은 책상마다 밥이며 떡이며 김치며 날라다놓고 “잡사” 소리 연발하느라 바쁘고 흐뭇하다.

 맨나 갖다먹일 궁리를 하는 어매한테 “늙지 마시고 죽지 마시씨요”라고 다른 어매들이 덕담을 안긴다.

 “전에는 내가 뚜부를 맹글어 파니라 뚜부솥을 땠어. 긍께 동네 아짐들이 불 쬐러 다 우리 부삭으로만 달라들어. 그래갖고 우리 집 짐치는 왜 소금만 너서 담아도 이러고 맛나냐고 해도 밥 한그륵을 못줬어. 우리 애기들 학교 갔다 오문 줄라고 이불 밑에 서숙밥 한 그륵 묻어둔 것이 있어도 몬내몬내 밥을 못 줬당께. 그때 못준 것이 그러코 죄스럽습디다. 난중에 행펜 풀리문 술도 받아서 나놔묵고 밥도 해서 나놔묵어야겄다고 다짐을 했는디 시방 그러고 산께 좋아.”
 
‘겁나게 남아불어’란 씩씩한 후렴구

 어매가 무안여성농어업인센터 문해교실에서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2년 전이다.

 “애렸을 때 딱 한번 양학을 배우러 갔어. 학교 못간 큰애기들 공부하는 양학방이 동네에 있었어. 하랫저닉에는 양학 한디 가서 배와본께 구신 안들리곤 저러코 못한다고 그래. 내가 기역 니은을 바로 알아분께. 우리 사촌오빠가 선생이었는디 내일 저닉에는 받침을 갤칠란다고 한디 그 담날 못 갔어. 아부지가 내가 공부하러 갔다고 난리를 침서 양학하는 방을 파불란다고 그래. 글문 나땜시 다른 사람들도 양학을 못하겄더라고. 긍께 하랫저닉에 기역니은만 배우고 포기를 하고 말았제.”

 공부 대신 어렸을 때부터 어매한텐 일복이 따랐다.

 “우리집이 하숙을 넛(넷)이나 쳤어. 채지도 어찌고 가늘게 썰고 내가 반찬 맛납게 잘한다고 우리집다 학교 선생들을 다 매깼어. 선생들 벤토를 너개 다섯 개 쌀라문 아직이문 겁나 바빠. 하고본께 다 내 고상이여. 솜씨가 존께.”

 베도 잘 짰다.

 “내가 글만 못 뱄제 못하는 것이 없이 다 잘했어.”

 시집 오니 가난한 집이었다.

 “가난하고 맨 노름만 해. 친정사람들은 노름 안한께 여그로 가자고 남편을 달갰어. ㅤ겉보리 서 말만 있으문 처가살이 안한다고 버툰께 억지로 데꼬 왔어. 서숙쌀 반숭(승) 한되 갖고 왔는디, 이삿짐리아카 끄꼬 온 총각을 밥해주고 난께 저닉 묵을 것이 없어.”

 그날로부터 먹고 살 방도를 찾아 장사를 나섰다.

 “돈 꿔갖고 목포 가서 새우젓 한 동우를 띠어다 폴아서 묵고 살았어. 근디 동네아저씨가 뚜부틀을 물려주께 뚜부를 해라 그래. 뚜부장사를 하다 곡석장사도 했어. 망운장에서 장사를 시작했제. 근디 일곱 개 부락에서 전부다 나만 갖다줘. 놈은 방석 갖다 피놓고 폰디 나는 큰 덕석 갖다 피놓고 장사했어. 행펜 어렵다고 도와주고, 애기들 데꼬 묵고 살으라고 도와주고. 사방 사람들이 줄을 서서 나한테만 곡석들을 줘. 다른 장사치들이 곡석보따리 든 손꾸락 손톱이 자빠라지게 뺏을라 해도 사람들이 다 나한테만 붓어놓고 매깨놓고. 양심 옳다고 되 싹싹 안 까끄고 넉넉하게 준다고 폴기도 잘 폴리고. 장사함서 중마(중매)를 열다섯이나 했어. 그만치 내 신용을 알아줬든 거제.”

 곡석장사뿐 아니라 어매는 굴장사 젓갈장사 생선장사 등등 온갖 장사를 다했다.

 온갖 장사를 하며 헤쳐온 폭폭한 굽이굽이마다 ‘겁나게 남아불어’라는 후렴구를 붙이며 엄살 없이 씩씩하게 살아낸 그 이야기로 어매는 전라도닷컴이 지난해 연 ‘제8회 아름다운 전라도말 자랑대회’에서 ‘질로존상’을 타기도 했다.
 
“돈을 맨 감찼제. 벨 궁리를 다해”

 그렇게 보지런히 장사해서 겁나게 남아불어도 서방이 돈을 족족 갖다버리니 형편은 폭폭하고 아이들 가르치기도 어려웠다.

 “봄에 학교에 자모회의를 하러 갔는디 교장선생님 말씀 끄트머리에 내가 ‘질문하겄습니다’ 하고 손을 들었어. 몸빼입고 허술한 여자가 뭔 질문을 헐라고 헌고 사람들이 다 쳐다봤어. 내가 ‘집에 학생이 섯(셋)이문 6학년 한나만 삘래(피리)를 사문 어찌요, 한나만 사갖고 내리내리 불문 어찌요’라고 말했어. 그런께 일곱 개 부락 사람들이 전부 박수를 쳐불었어. 그 말 한자리에 박수가 콩 튀어불었당께. ‘다 사라근께 동네아그들이 집에서 돈 없어서 못 사준께 우니라고 학교를 못 가요. 우리 집이 동네 앞에 있는디 동네 아그들이 다 모태서 아직마다 우요’ 그런께 전부 곤란한 사람들이라 박수로 환영해불어. 그래갖고 교장이 일자무식인 사람한테 자모회장을 시캐줘붓당께.”

 사이다 돌직구를 던진 어매는 삽다리초등학교 자모회장을 3년 내리 했다.

 두부를 만들어 팔던 시절, 어매는 두부 한 모를 먹어보들 못했다.

 “한 모도 못 묵어. 자식들도 못 믹애. 콩 서 되문 뚜부가 마흔 다섯모 나와. 다 폴고 어쩌다 한 모나 나오문(남으문) 콩 가져오제 쌀 가져오제 애기들하고 묵고살으라고 나한테 곡석 갖다주는 고마운 사람들한테 한 모썩 줘불제. 어찌거시요. 나 폴아묵고 살라고 곡석을 그러고 갖다준디 나도 도리를 해야제.”

 두부 한 솥을 만들기 위해선 물을 서른 동우를 길어날라야 했다.

 “뚜부가 전부 물이여. 콩 시쳐야제 담가야제 갈아야제 뚜부 짤라서 또 담가놔야제. 물 지를 때 두째 딸 데꼬댕김서 춥다고 안 간다고글문 얼릉 가야 덜 춥다고 등을 뚜듬서 물 질러 댕갰어. 동네샘은 데롸 묵응께 물이 없어서 어덕 타서 올라가서 들샘으로 가고. 시방같으문 얼매나 좋겄소. 수도꼭지 틀문 물 나온께. ‘전원일기’가 그때 그러코 인기여도 돈이 나오냐 밥이 나오냐 하고 나는 ‘일룡아… ’ 불러 쌓는 그것을 한번을 못봐. 누가 부엌에서 돼아지다리 가져가불고 술궤짝 가져가도 모를 만치 잠이 쏟아져. 잠에 꼬실라져불어.”

 남편은 노름에 정신이 팔려있어도 두부 만들 콩은 꼭 갈아줬다.

 “뚜부를 맹글어야 재끼방에서 폴 수 있응께. 노름꾼(서방)이 온께 새새끼가 찍찍 하문 모태드끼 우리 오두막집 방으로 노름꾼들이 다 모태. 광주서도 돈 싸갖고 오고 목포서도 돈 싸갖고 오고. 책보에다 싸갖고 와서 다 잃고 가. 재끼방 붙이문 돈이 많이 나오제만 서방이 해서 잃어분께 돈이 없어. 한번씩 경찰이 오문 누가 말개주고. 말개준 그 사람 집에 서방이 또 일해주러 다니고.”
조마니’라면 어매한테는 각별하다. “재끼 좋아했던 서방이 내가 자고 있으문 가위로 조마니를 짤라서라도 돈을 갖고 가불었어.”|||||

 그 시절 어매는 날마다 돈을 어디다가 숨길 것이냐가 중차대한 고민거리였다.

 “맨 감 찼제. 벨 궁리를 다해. 중천장 뜯고 어깨대로(어깨닿는 치) 넣고 덕석속에다도 숭키고. 서방이 덕석을 잘 맹글았어. 우리집에 덕석이 여럿이었어. 하래는 먼 디 가서 밭을 매는디 해가 빤하니 뜬께 맘이 급해. 덕석에다 돈을 찡개 넣고 쥐새끼 들어가지 말라고 솔깨지를 찡개놨는디 혹시나 방앳간에서 보리 널라고 덕석 빌리러 와서 끄꼬 가다가 돈을 흘려불문 누구보고 말을 할 것이여. 흘려서 잃어분 것은 누구한테 말 못하제. 죽기아니문 살기로 집에 담박질로 왔는디 덕석을 마치 안가져갔어. 서방이 나한테 꼴랑지만 달문 여시라고 했는디 여시 짓거리 안하문 살 수가 없었어. 서방이 노름할라고 돈을 내노라고 성화고 있을 만한 디는 다 더듬아서 찾아가불어. 어디 바닥에다가 돈을 못놔둬. 맨나 조마니 맨들았제. 근디 내가 자고 있으문 조마니를 짤라가불어. 그래도 어짜든간 내 몸에 차고 지키고 있어야제. 그때부터 조마니 차서 인지까 차요.”

 작은 오두막집은 늘 사람들로 복닥거렸다.

 “뚜부솥에 맨나 불땐께 나무를 백 뭇을 띠어놔도 모지래. 동네 아짐들이고 성님들이고 따숩다고 불 쬘라고 우리 오두막집으로 다 달라든단께. 방에는 남자들 화투 친다고 달라들고 정지에는 여자들이 따숩다고 달라들고.”

 그 사람들이 마당의 흙을 밟아들여서 정제 바닥에는 날마다 흙이 수북하니 쌓였다.

 “마당에서 찔컥한 흙을 밟아갖고 다 묻혀다가 정지에 들온께. 남자들도 다 정지로만 들어와, 따숩다고. 뚜부 맹글기가 끝나문 다 긁어서 마당에다 붓어놔도 내일이문 또 흙이 까득 차.”
 
“항시 나놔묵어야겄다 그 맘을 묵고 살아”

 두부 만들 엿 말짜리 솥은 무안장에서 사서 여다 날랐다.

 “크나큰 가매솥이여. 누가 속든배추 두 폭을 준디 아까서 고것할라 솥단지에 넣고 이고 오다가 무가서 할수없이 내뿔고 왔당께. 아까웁제. 그 고상을 하고 이고 왔당께. 해묵고 살라고. 뚜부 맹글어 폴아서 식구 안귐겨죽일라고.”

 그 무거운 거멍솥을 이고 사십 리를 걸었다.

 “그때는 걸어댕기는 시상인께. 망운도 해제도 이십리, 목포 구십리 광주 구십리….”

 어매한텐 그 길들이 다 선연하다.

 “고상팔자를 타고났어. 그때는 서숙쌀 한 말 쌀 한 말 이고 장에 가. 같은 한 말이라도 콩은 서숙보다 더 무가. 사람있으문 보따리 잔 내려도라 해서 잔 쉬고 이어도라 해서 또이고. 그때는 걸어댕기는 시상이라 중간중간 사람이 와. 그 고상을 한 중을 몰르고 살았어. 재끼 빚 뒷댈라고 그러코 했능갑써.”

 그 힘든 굽이굽이엔 잊어버릴 수 없는 다순 맘들이 있었다.

 “빚을 못 갚아서 그 빚 진 사람헌티 가서 우리 오두막집을 갖고 가씨요 했더니 ‘내가 돈을 포기허제 오두막집은 안 가지갈라요 애기들 데꼬 사씨요’ 그래.”

 형편이 좀 풀리자 어매는 그 사람부터 찾아가서 빚을 갚았노라 했다.

 “그때 애럽게 살 때 나한테 다숩게 했던 사람들은 팽생 잊어불 수가 없어. 첫들머리 사는 조성떡이 하래는 그집 어른들이 밥 묵고 나간께 나를 불러갖고 밥을 한 그륵 담아줌서 요놈 잡숫고 더 잡수시오 그래. 항시 배를 곯고 사는 그 시상에 밥을 담아준 것도 고마운디 더 묵으라 하더랑께. 긍께 내가 지금도 잠 한숨만 자고나문 그때 그 말이 떠올라. 귀에가 정정해. 시방도 내가 겁나게 조성떡을 생각해라. 뽀짝 유제 살문 벨것도 다 갖다주겄서. 한번은 또 내가 밭을 매는디 배가 고파 죽겄는디 기성떡이 나 잔 따라오소 그래. 모 숭그는 날에는 모 숭군 사람한테 쌀밥을 줘. 그날이 기성떡네 모 숭근 날이여. 보리밥만 줘도 고마운디 나한테 쌀밥을 한 그륵 담아주고 미역국을 주더랑께. 쩌참에 기성떡이 믹서기를 사는디 5만원을 꿔갔어. 갚은다길래 내가 냅두소 그랬어. 그때 그 배고픈 시상에 나한테 밥을 줬는디 내가 그 돈을 받겄능가 그랬제. 긍께 옆엣사람들이 ‘오매 나도 그때 밥 한그륵 줄 것을’ 그럼서 웃어싸.”

 어매는 “내 밥그륵에다 밥 한 숟구락 덜어논 사람들은 다 내 마음에가 있어”라고 말한다.

 “나 배고플 때 밥 한숟구락이라도 준 사람들맹키로 항시 나놔묵어야겄다 그 맘을 묵고 살아.”
글=남신희 ‘전라도닷컴’ 기자·사진=박갑철 ‘전라도닷컴’ 기자

※이 원고는 월간 ‘전라도닷컴’(062-654-9085)에도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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