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교육의 출발점으로서 ‘질문이 있는 교실’을 위하여
질문, 기존 앎과 새로운 앎 사이 갈등서 출발
기성세대들 협박에 얽매이지 않을 때 가능

 지난 겨울, 촛불 광장에 섰던 우리는, 이제 각자의 자리에서 일상을 혁명해내야 하는 과제를 떠안고 있습니다. 이 맥락에서 지난 칼럼에서 다룬, 학생의 ‘19세 선거권’과 교사의 ‘정치적 중립’ 문제에 이어, 시민교육의 조건으로서 ‘질문이 있는 교실’을 다시 생각해보려 합니다.

 학교가 ‘시민교육의 현장’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실의 풍경’이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실의 교육현장은 어떤가요? 장휘국 교육감이 2014년 재선에 성공한 뒤에 내건 슬로건은 ‘질문이 있는 교실, 행복한 학교’입니다. 생각하지 않고 외워야 할 지식에 짓눌린 교실이 아니라 자발적 배움으로 나아가는 질문이 있는 교실을, 더 나아가 ‘생동감 넘치는 학교’를 만들기 위해 이런 슬로건을 제시했다지요.

 그럼에도 실제 교실에서 질문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교사들은 열심히 공부하여, ‘배움중심수업’, ‘하브루타’, ‘거꾸로교실’, ‘토론학습’ 등 다양한 기법을 수업시간에 펼쳐냅니다. 각 수업 기법을 적용할 때, 학생들은 잠시 입을 열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이게 웬일입니까? 그 수업이 끝난 뒤에는 다시 ‘딱히 궁금한 것이 없어서 달리 물을 것도 없는’ 상태로 되돌아갑니다. 질문에 불이 붙어서 학생의 ‘자기 공부’로 확장되지 않고, 금방 식어버립니다. 왜 질문은 교실에 아주 잠깐 동안만 머무르다가 사라질까요?

 이쯤에서 ‘질문을 한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질문을 한다는 것은 또 다시 ‘질문이 생기는 것’과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질문이 생기는 것’은 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자신의 골방에서 나오지 않는 사람은 궁금하지 않습니다. 질문은 자신의 골방에 낯선 것이 들어왔거나, 자신이 골방에서 기어 나와서 낯선 것을 마주했을 때 생깁니다. 그리하여 질문이 생긴다는 것은 기존의 앎과 새로운 앎 사이에 어떤 내적 갈등(또는 지적 균열, 인지부조화 등)이 일어났다는 것을 뜻합니다. 더 나아가 그 갈등을 피하지 않고 민감하게 받아들여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하는 실천입니다.

 이러한 실천은 자연스레 질문을 자신의 바깥으로 던지는 활동으로 이어집니다. ‘질문을 던짐’으로써, 직접 현실에 참여하게 됩니다. 스스로 답을 구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과 질문을 공유하며 함께 해결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 질문을 듣는 입장에서 보자면, 그 질문으로 인해 생각이 복잡해집니다. 이렇게 한 사람의 내적 갈등은 많은 사람의 내적 갈등으로 확산됩니다. 질문을 하는 것은 침묵을 깨뜨리는 것이고, 소란을 피우는 것입니다. 이는 다소 귀찮고, 불편한 일입니다. 그 질문이 ‘근본적’인 문제를 건드린다면, ‘급진적’인 생각으로 이어지고, 비로소 질문은 ‘불편’을 넘어 ‘불온’으로 나아갑니다. 소크라테스가 시장 바닥에서 질문하고 다니다가 불온한 사람으로 내몰려 독배를 마시는 것도 이런 질문의 속성 때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질문을 한다는 것은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을 때 가능합니다. 기존의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을 때, 내적 갈등을 무시해버리고 싶다는 귀찮음에 얽매이지 않을 때, 교과서의 내용이나 또는 교사의 말에는 오류가 없을 것이라는 미신에 얽매이지 않을 때, 나의 질문이 수준 낮은 질문일 수 있다는 불안에 얽매이지 않을 때, 이런 질문 했다가 괜히 교사 또는 동료학생으로부터 찍히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얽매이지 않을 때, 질문을 해봤자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을 것이라는 체념에 얽매이지 않을 때, 이 세상에는 어떤 정답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기성세대들의 협박에 얽매이지 않을 때 질문은 가능합니다. 아, 오히려 뒤집어 생각할 수 있겠네요. 질문을 하는 것이야 말로 앞에 나열한 다양한 구속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이죠. 그러니까 질문의 토대 및 목적은 자유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까지 질문의 속성을 생각해본다면, 교실 현장에 질문이 살아있도록 만드는 일은 단지 학생들의 ‘자발적 학습 동기 부여’라는 피상적인 조치에 머무르지 않고 공부의 대전환, 교육의 패러다임 혁명으로 나아가야 마땅합니다. 또한 그럴 때만이 참된 의미에서 질문이 ‘살아있는’ 교실이 될 것입니다.

 질문이 살아있는 교실은 어떻게 가능한가요? 먼저 학생들이 ‘교육현장에서 어떤 내용을 질문으로 다루어도 피해를 입지 않는다’라는, ‘교실 현장에서의 안정감’을 조성해야 합니다. ‘그 질문은 어떻다’는 식의 평가에서부터, ‘눈치 없이 질문하네’라는 식의 비난까지, 질문을 편안하고 안전하게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차별과 폭력의 언어를 배제하는 노력이 함께 이루어져야겠지요.

 그 다음으로, 교육현장에서 ‘모든 질문의 무게가 동일’해야 합니다. 김아무개의 질문은 중요한 질문이고, 이아무개의 질문은 하찮은 질문이 아니라, 모든 질문의 무게가 동일하다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어떤 학생의 특징, 특성으로 그 말의 무게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누구든지 간에 말 자체의 무게를 존중하고 경청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또한 ‘누구나 질문’할 수 있고, ‘누구에게나 질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만 질문을 할 수 있도록 하거나, 어떤 사람에게만 질문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질문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왜곡하는 일입니다. 참된 앎을 묻고 답하는 일 앞에서는 우리 모두가 평등하다는 그 의미 말입니다.

 끝으로, 온갖 종류의 질문 기법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질문에 대한 ‘성실한 답변’입니다. 좋은 질문을 이끌어내는 방법은 그 질문을 받은 사람이 성실하고 진지하게 그 물음에 대답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질문이란 그 자체로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답변과 한 쌍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교사가 학생의 물음에 불성실하게 대답하거나 또는 학생으로부터 이미 정해져있는 답을 이끌어내기 위한 질문을 유도한다면, 질문을 던지는 학생은 곧바로 물음을 거두고 관심을 내려놓을 것입니다. 자신의 질문은 수업의 들러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리기 때문이죠.

 다들 알다시피, 정답은 생각의 ‘끝’이지만 질문은 생각의 ‘시작’입니다. 정답을 맞추고 나면 더 이상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하지 않습니다. 질문을 던질 때 비로소 생각이 일어납니다. 그 질문에 대해 함께 생각하고 서로의 답을 주고받을 때, 배움은 자유롭게 일어납니다. 마침내 ‘질문이 있는 교실’은 ‘대화를 나누는 교실’로 나아갑니다. 함께 대화를 나누면서, 앎을 찾고 쌓으며 다듬고 만들어내는 공부야말로 학생들이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공부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질문이 있는 교실’을 만들기 위해 우리 교사와 학생들은 진정 ‘질문’을 마주하고 감당해낼 준비가 되어 있나요?

추교준



추교준은 인문학이 잘 팔리는 시대에 어떻게 하면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인문학이 가능할지 고민하는 사람입니다.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대안학교에서 학생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한 번씩 시민단체 활동가들 어깨너머로 인권을 함께 고민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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