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시민교육, 학내 자치언론을 함께 고민하자

 저의 관심사는 광장의 촛불을 교육 현장으로 옮겨 붙이는 일입니다. ‘청소년 18세 선거권’, ‘교사의 정치적 중립성’, ‘질문하기’, ‘판단하기’에 대해 고민을 해왔는데요. 고백하자면, 청소년에게 18세 선거권이 부여되고, 교사도 정치적 중립이라는 굴레에서 자유로워지고, 교실에 질문이 살아있으며, 너도 나도 주체적인 판단을 할 수 있다고 하여 곧바로 민주시민교육이 잘 이뤄질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저 모든 것들이 뿌리내릴 수 있는 필요조건이 있는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바로 ‘언론’입니다. 교육공간에 ‘언론 교육’, 더 나아가 ‘자치 언론 활동’이 마련되어야 민주시민교육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제 경험을 좀 이야기 할게요. 제가 활동하고 있는 곳은 대안학교입니다. 청소년 18세 선거권은 사회적 운동으로 함께 목소리를 높여야할 문제지만, 적어도 이곳에서 청소년들은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교사들도 시민으로서 정치적 견해를 자유로이 표출할 수 있고요. 수업 시간에는 금기 없이 다양한 질문들을 다룹니다. 특히 철학 수업 시간에는 학생들 사이에서 수많은 질문이 터져 나올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학생들도 정답보다 질문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학내에 어떤 중요한 문제가 일어나면, 교사들 선에서 일방적으로 처리하기보다는 교사, 학생 모두 모여 ‘멈춰!’, ‘허심탄회’, ‘식구총회’ 등 학내 다양한 자치 활동을 통해 의견을 모으고 조율하는 일을 진행합니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 또한 문제에 대한 나름의 판단을 하는 법을 배우고요.

 

질문·토론 있음에도 논의가 힘겨운 이유 

 시민교육의 맥락에서 보면 이곳에서는 많은 것들이 이뤄지고 있고, 이 과정에서 교사나 학생 모두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언제부턴가 이곳의 논의가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는 인상을 받고 있습니다. 100여명의 사람들이 한 데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예전에 했던 이야기가 반복해서 나오는 것 같기도 하고, 핵심적인 문제에 대해 집중적으로 토론하기 보다는 이야기가 사방팔방으로 뻗쳐나가 정리가 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가끔씩은 토론(법)을 가르치는 저 조차도 오랜 회의 및 토론에 심신이 지치기도 합니다. 무엇 때문에 논의가 지지부진해지는 것일까요? 질문과 토론이 자유로운 대안학교에서 왜 저는 갈수록 현안에 대한 논의들이 힘겹게 느껴지는 것일까요?

 이런 고민을 했던 저는 지난 ‘촛불의 시간’을 지나오면서 나름의 답을 생각했습니다. 이곳의 교사나 학생이 능력과 자질·태도·의지가 부족해서도 아니고, 의제로 다루고 있는 주제가 감당하기 어려운 탓도 아니었습니다. 제가 눈여겨 본 지점은, 이 대안학교에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광장’은 있지만 정확한 이해와 올바른 판단을 도와주는 ‘언론’이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자치 언론’이 없어서 의제에 대한 공동의 이해, 논의의 출발선, 정확한 사실관계와 다루어야 할 쟁점들 등의 정보들이 부족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논의를 하다 보니, 이야기가 핵심을 찌르기보다는 주변을 맴돌기 일쑤였습니다.

 지난 촛불의 시간을 돌이켜보면 국정농단 사건에 대해 보도하고 논평하는 언론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더 나아가 가짜 뉴스가 얼마나 기승을 부렸고, 그것을 막아내기 위한 여러 언론사들의 팩트 체크들이 얼마나 숨가쁘게 이뤄졌는지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다 아실 것입니다. 만약 지난 시간, 언론의 그러한 역할이 없었다면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의 주범들이 지금처럼 포승줄에 묶여 있었을까요? 온갖 가짜 뉴스들이 여론을 조직적으로 조작하고 호도해서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연출되지 않았을까요?

 어떤 공동체라도 그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에 대해 구성원들이 처음부터 모두 동일한 수준으로 이해를 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공동체 안에서라도 ‘서 있는 곳’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느 작가의 말마따나 ‘서 있는 곳에 따라 보이는 풍경이 달라’지죠. 그리하여 주권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서로 다른 생각들을 모으고 조율하는 일이 주권 행사의 핵심이며, 여기에 민주주의의 생명이 걸려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겠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민주사회와 언론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죠. 언론은 ‘현장목격자’(witness bearer), (단순한 사실 확인을 넘어서는 의미로서) ‘진실확인자’(authenticator), ‘의미부여자’(sense maker)로서 현장을 누비며 문제들을 ‘보도’하고 그 보도 내용에 대해 ‘논평’을 하며 공중(the public)의 올바른 이해와 판단을 도와야 합니다. 예를 들면, 80년 5월 당시, ‘들불야학’ 식구들이 공수부대의 만행 앞에 분노하며 무엇을 만들었습니까? 바로 ‘투사회보’였습니다. 한편에서는 MBC 건물이 불탔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투사회보가 거리 곳곳에 뿌려졌습니다. 광주 시민들은 투사회보를 통해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파악했고,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스스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언론 프로세스 알아야 민주시민 제몫

 다시 제가 있는 곳의 이야기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제가 있는 곳의 교사와 학생들이 논의를 더욱 발전적으로 밀고 나가기 위해서는, 어떤 문제에 대해 각자 서 있는 곳에서, 표면적인 현상을 보고 인상 비평을 하는 일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언론’의 보도와 논평을 통해 문제를 입체적으로 이해하고 그 의미를 공유하고, 그런 정보들을 바탕으로 논의를 이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소식지에 가까운 ‘학교 신문’말고, 일상의 사연에 음악을 곁들여주는 ‘음악 방송’말고 현장의 문제에 대해 정확한 사실 관계, 더 나아가 진실을 확인하고, 그 의미를 공유할 수 있도록 보도와 그 논평을 하는 ‘자치 언론’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자치 언론 활동을 바탕으로 공동체를 고민하고 토론하며, 결정하는 과정이 우리에게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판단의 주체로 거듭나려고 해도, 정확한 정보를 수용하고 비평하는 과정이 없으면, ‘앙꼬 없는 찐빵’에 불과하겠지요.

 이것은 비단 제가 서 있는 대안학교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현장에서 민주시민교육을 고민한다면,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문제이지요. 중요한 것은, 늘 그렇듯이, 이런 교육을 책상 앞에서, 교과서로 주입 교육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미디어 리터러시’(각종 매체로부터 나오는 메시지들을 해석하고 분별하는 능력) 교육에서 출발하여 나중에는 자신이 직접 기자가 되어 현장의 문제들을 취재, 편집, 보도, 논평 등을 해보면서, ‘사실 확인과 진실 확인이 어떻게 같고 다른지’, ‘보도를 하는 과정에서 어떤 원칙들을 고민해야 하는지’, ‘보도 윤리란 무엇이며, 왜 지켜야 하는지’, ‘기사의 편집권은 누구에게, 어느 정도까지 속해 있는지’ 등을 현장의 고민과 부딪히며 언론에 대한 살아있는 교육을 진행해야 합니다.

 이런 교육은 기자를 장래의 직업으로 생각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민주시민으로 살아갈 모든 사람에게 필요합니다. 이런 교육을 통해 한 편의 기사가 작성되는 과정을 이해할 때, 비로소 시민들은 기사를 가려보는 눈, 언론을 대하는 태도를 더욱 폭넓게 가지지 않을까요? 심지어 SNS의 확장 등으로 누구나 다 ‘뉴스 생산자’가 될 수 있는 시대에, ‘가짜뉴스’에 휘둘리지 않고 주체적인 시민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런 교육이 교육 현장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요? 이것이 제가 시민교육에서 자치 언론 활동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추교준



추교준은 인문학이 잘 팔리는 시대에 어떻게 하면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인문학이 가능할지 고민하는 사람입니다.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대안학교에서 학생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한 번씩 시민단체 활동가들 어깨너머로 인권을 함께 고민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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