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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발표 수업…PPT를 준비해야 했을까?
도연
기사 게재일 : 2018-04-11 06:05:01
 # 1-첫 발표

 수업 시간, 논문 제목들이 제시되었고 각자 하나씩 고르라고 했습니다. 해당 논문을 요약해서 발표하는 것이 과제였죠. ‘사회 연대 원리의 기원과 발전’, 아무도 관심 없어 할 제목의 논문을 선택했습니다. 불쌍해서가 아니라 더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응당 사회 구성원으로서 소수자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원들이 왜 제공되어야 하는지를 ‘연대’라는 키워드로 설명하고 있지 않을까 해서였습니다.

 읽고 또 읽으며 머릿속으로는 그 내용들이 그려졌는데 정작 어떻게 발표 준비를 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PPT를 만드는 건 가능한데 정작 발표할 때 그 PPT 슬라이드를 내가 볼 수 없으니 애써 PPT를 준비해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것도 없이 앞에 나가서 발표하자니 그것도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졌습니다.

 어떻게 준비할지 고민하다 발표 날이 되었고 PPT 대신 간단히 요약한 파일만 점자정보 단말기에 넣어 갔습니다. 화면에 준비한 PPT를 띄우고 첫 번째 발표자가 발표를 시작했습니다.
 
 ‘아… PPT를 준비해야 했나?’

 두 번째 발표자가 발표를 시작했습니다. 탄탄하게 준비된 모습으로 막힘없이 발표가 술술 진행되었습니다.

 ‘아… 다른 자료를 준비해야 했나? 왜 나는 이 논문 하나만 그렇게 매달려 읽었을까?’

 읽다가 애매하게 이해되지 못했던 부분들이 떠오르며 조바심이 느껴졌습니다. 쉬는 시간을 마치고 제 차례가 되었습니다. 사람들 앞에 서니 가슴이 두근거렸고 점자정보 단말기 위를 스치는 손가락이 굳은 듯 느껴지며 필요한 부분을 읽을 타이밍이 조금씩 어긋났습니다. 그래서 더 마음은 조급해졌고 그럴수록 침착하게 정리한 내용을 발표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아… 창피해. 너무 버벅 거렸어.’

 입학 후 첫 발표는 그렇게 부끄럽고 또 발표 준비에 있어 참고할 내용들과 함께 마음에 남았습니다.
 
 # 2-두 번째 발표

 몇 주 뒤, 다른 과목의 조별 발표가 있었습니다. 장애인 인권 운동을 하며 긴 시간 알고 지낸 이들과 함께 같은 조가 되었고 자료 정리와 발표에 쓸 PPT 준비를 그 이들이 맡고 제가 발표하는 것으로 역할을 나눴습니다. 요약 자료와 PPT가 나왔고 발표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책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발표 전 날, 역시나 발표 PPT를 볼 수 없다는 부담감과 한 챕터를 일목요연하게 모두 이해하지 못한 것에 부담이 느껴졌습니다. 이래저래 뒤척이다 번쩍 스치고 간 아이디어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래, 내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으로 사람들도 확인하게 만들면 되는 거 아닌가?’

 발표 PPT 파일을 열고 화면 읽기 기능을 이용해 재생해봤습니다. 술술 잘 읽어줬습니다. 슬라이드를 넘기고 말하기 기능을 이용해서 그 내용을 재생한 다음 해당 슬라이드에 대한 설명을 하는 방식으로 발표하기로 했습니다. 물론 일반 기업에서 이런 식으로 발표하면 시작하자마자 중단되고 다시는 발표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내용 숙지를 못해서 사람들 어색하게 말하기 기능으로 줄줄 읽게 만들었으니까요. 그래서 망설였지만 그래도 전공이 전공인 만큼 이해해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첫 발표 때보다 훨씬 여유를 가질 수 있었고 사람들 반응이 아니라 발표 내용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역시나 그 날 발표 또한 부끄러움이 좀 남았지만 첫 번째 발표 보다는 훨씬 좋았습니다.

 ‘시각장애 학생이 발표하는 건 처음 보는데 매우 신선했다. 좋았다.’

 열심히 자료를 정리하고 발표 자료를 만든 같은 조원들에게 충분히 잘 발표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있었는데 긍정적인 평을 들으니 기운이 좀 나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내용을 확실히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교훈은 분명했습니다. 반성할 점이었죠.
 
 # 3-내게 맞게 판을 흔들자

 첫 번째 발표 때의 그 어리바리한 모습은 쉽게 잊힐 것 같지 않습니다. 두 번째 발표 때의 그 과감한 시도 또한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음에 발표 할 일이 혹~~~~시나 생긴다면 조금 더 잘 준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낯선 말하기 기능을 별 말없이 들어줄 사람들 앞에서라면 말이죠.

 한 손에 프리젠터를 들고 다른 손에 마이크를 들며 슬라이드를 넘기고 때때로 레이저 포인터를 이용해 강조할 지점을 콕콕 찍어주는 매끄러운 발표.

 그런 건 애초부터 할 수 없습니다. 발표 내용을 몽땅 머릿속에 넣어 줄줄 읊을 만큼 똑똑하지도 않고 성실하기도 어렵습니다.

 당신이 읽거나 말하기 기능으로 다소 어색한 발음의 TTS가 읽거나…

 스크린에 뜬 화면이 보이지 않는 제가 택한 방법입니다. 좁은 강의실과 교육 장소에서 만난 몇 안 되는 이들은 함께 만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더 넓은 공간-더 많은 이들과도 그렇게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도연
 
 ‘도연’님은 사람이 사람으로 사는 세상을 꿈꾸며 장애인운동 활동가로 살고 있습니다. 고양이와 함께 지내는 꿈 많고 고민 많은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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