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찔레꽃’을 생각하며

사진은 지금 열리고 있는 광주비엔날레 본전시관 2전시실에 있는 조해준의 여러 편의 판넬작품 중 ‘박이소 생각’(모두 27개)의 한 장면이다.

식당에 사람들이 단정하게 앉아 있고, 맨 끝의 한 여자가 울고 있다. 식탁 위의 소주병과 부스터 위의 삼겹살과…. 두꺼운 연필로 그린 에스키스에 잇대 쓴 글은 이렇다. ‘2004년 겨울 “박이소를 생각하는 모임”을 인사동에서. 박이소 회고전에 대한 토의가 있었으나 전시 장소 및 시기 여부를 결정하지 못한 채 헤어지고 말았다. 한성대 미술과 정헌이 교수는 계속 눈물을 흘리고 있어 모두 숙연한 분위기로 일관했었다.’

박이소, 57년인가? 부산 출신의 작가가 있었다. 서울에서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뉴욕 현대미술의 현장에서 공부하고 다시 국내에 들어와 활동했는데, 그의 생각과 행동은 그러나 끝내 시대와 화해하지 못했고 그는 2003년 세상을 떠났다. 혼자 살았던 작업실 탁자에 반듯이 앉은 채 죽었고, 여러 날이 흐른 뒤에야 그 사실이 알려졌다.

그 얼마 뒤엔 부산에서도 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이동석이 유명을 달리 했다.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를 빗댄 ‘큐레이터 구보씨의 하루’라는 에세이를 통해 잔잔한 어조로 그러나 통렬하게 미술현장의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던 그가 갔고, 그 추모모임이 있었고, 유고집도 발간됐다.

몇해 전 광주에서도 젊은 작가들의 안타까운 죽음이 이어졌다. 2년 전, 비엔날레가 한창일 때 광주비엔날레에서 일했던 정건호(이세길, 인터넷 아이디 ‘찔레꽃’) 형도 그중 한사람으로 병석에서 외로이 세상을 떠났다.

형 역시 현대미술의 현장에서 일했건만 아직까지 나는, 그리고 주변 사람들은 그 형의 마음을 기리는 어떤 일도 하지 못했다. 작년에 잠깐 유고집을 내자는 얘기가 있었는데 하필이면 그 무렵 회사에서 곤란한 처지에 있었던 나는 주변의 기대와 달리 유아무야 하고 말았다.

형의 노래, 글들을 자주 읽는다. (‘전라도닷컴’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서 글쓴이 ‘찔레꽃’으로 검색 가능) 매번 비엔날레가 열리면 나는 작품보다 이 전시를 보거나 와서 일하는 사람들, 작품을 구경하는 관객들을 구경한다. 중외공원은 벌써 낙엽이 뒹구는 만추. 내 청춘의 소중한 시기를 보냈던 비엔날레, 그 일곱 번째가 저물어 가고 있다.

나이지리아 출신의 흑인 ‘뺀질이’ 오쿠이와 천안문사태 현장의 운동권 학생 후한루와, 또 같이 일했던 문영민과 여러 젊은 미술인들이 서울에서 학술행사를 하나 보다. 북경 후한루의 모교에서도 뭐가 열린다 한다.

형과 함께 소주를 붓고 자주 노래방에서 불렀던 노래 읊조린다. ‘잊지 못할 빗속의 여인, 그 여인을 잊지 못하네. 잊지 못하네….’ 윤정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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