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뉴스의 구독자와 영어교사들에게 데이비드 셰퍼(Dr. David Shaffer, 한국이름: 신동일)라는 이름은 친숙할 것이다. 그는 광주뉴스에 매월 `Letters to KOTESOL’라는 칼럼을 담당하며, 영어교사들의 질문에 명쾌한 답과 영감을 주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사진 아래 있는 짧은 소개 외에는 광주에서 보낸 그의 삶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지난달 스티븐 레커드(Stephen Redeker)씨가 셰퍼 교수를 만나보았다.

 셰퍼 교수는 미국 서부 펜실베니아주에서 자랐고, 광주에는 1971년에 왔다. 그는 광주에 와서, 현재 그가 외국어대학 영어학부에서 영어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조선대학교에 1976년부터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가르치는 일뿐만 아니라, 그는 많은 시간을 헌신하여 한국과 아시아의 지역에서 열리는 각종 영어교육학회 컨퍼런스의 연사가 되어 수 차례 연단에 서기도 했다. 또한 KOTEOL 광주전남 지부 회장을 맡으면서, 그는 매월과 매년 열리는 모임에 연사를 초청하는 일을 해오고 있다. 셰퍼 교수는 한문서예를 배워왔는데, 꽤나 높은 수준에 달한다고 한다. 또한 그는 영어와 한국어 교육에 관한 많은 책들과 연구물을 출간해왔다. 그는 1984년 외교부 장관상과 1994년 Korean Times 주최 시부분 한국문학번역상 수상하기도 했다.

 

 다음 인터뷰는 셰퍼 교수와의 인터뷰 중 광주에서의 삶과 그의 관심에 대한 내용이다.

 광주뉴스: 언제 한국에 왔는가?

 셰퍼: 1971년에 평화봉사단으로 한국에 처음 왔다. 2년간의 봉사단 활동을 위해서 왔으나, 더 연장해 총 4년을 복무하였다. (평화 봉사단의 활동기간은 최대 5년까지다.) 봉사단 활동 시 광주에 있었다. 이후 조선대학교에 왔고, 그곳에서 바로 영어교육가로써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광주뉴스: 당신의 한국 이름에 대해서 말해달라.

 셰퍼: 내 한국 이름은 `신동일’이다. 이 이름은 한때 역술가였던 한 작명가에게서 받았다. 한국이름을 짓는 것은 우리의 훈련활동 중 하나였다. 작명가는 내 이름을 짓고, 내 운세에 대해서도 말해주었다. 내 생각에는 작명가가 “신”을 선택한 이유는 내 성인 “셰퍼(Shaffer)”의 발음과 비슷하기 때문인 것 같다. “동(棟)”은 내 이름 “데이비드(David)”의 “D”소리와 와 연결된다. 그녀는 획을 세어보더니, 좋은 운을 지닌 이름에 들어가는 다섯 개의 요소 중의 하나를 포함시켰다. (그 중에 하나인 목(木)이 이름에 포함되어 있다.) 또한 `동일’은 `동쪽의 처음’이라는 의미인데, 동쪽에서 왔고 장남이라는 것과 딱 들어 맞는다. 언젠가 다른 역술가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도 내 이름이 정말 잘 지었다고 했다.

 광주뉴스: 광주에 40년 동안 살면서 많은 변화들을 봤을 것 같은데, 예전 광주의 모습은 어떠했나?

 셰퍼: 처음 광주에 왔을 때, 도로에 있는 차들은 택시거나 사업가의 기사들이 운전하는 검은색 차가 대부분이었다. 보통은 차를 가지고 있지 않았고, 오히려 오토바이나 아주 오래된 버스들을 더 자주 볼 수 있었다. 심지어 짐을 나르는 소가 달구지를 끌고 도로를 가로지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5층 이상의 건물들은 거의 없었는데, 5층이 넘으면 엘리베이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비싼 운영비가 드는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려고 하지 않았고, 그래서 관광호텔 같은 몇 건물만이 높은 축에 속하는 건물이었다. 더러운 물이 길가를 따라 난 도랑에 흘렀다. 대부분의 집은 배관시설이 잘 안되어 있어서 집 밖에 화장실이 있었다. 신문지가 화장지로 대신했었고, 때때로 사용하기 쉽도록 신문을 사각형으로 잘라 못에 걸어 놓았다. 그 당시, 신문의 표지의 대부분을 대통령이 장식 했었는데, 그 표지는 화장실에서는 찾아 볼 수 없었다. 대통령을 모독한 이유로 잡혀가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오늘과 같은 크고 복합적인 아파트는 꿈도 못 꿀 시절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은 집에 살았고, 일부만이 2층 집을 지어 살았다. 1층은 소유주 가족이 살고, 2층은 전세로 내주는 형식이었다. 바깥 현관 쪽에 2층으로 올라가는 입구가 있는데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광주뉴스: 혹시 1980년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있는가?

 셰퍼: 그 당시 산수동에 살고 있었다. (조선대학교 근처) 시위가 적극적으로 일어난 지역 중 하나였다. 한 번은 시민군이 버스를 타고 동네를 순찰한 적인 있었다. 그들은 방망이와 곤봉으로 버스를 두드리며 지나갔고, 연료를 담는 작은 통같이 생긴 것을 모아갔다. 사람들은 화가 났고, 젊은 사내들은 시민군에 의해 끌려갈까 봐 걱정하기도 했다. 여성들은 두려움에 떨며 많은 이들은 집안에 머물렀었다. 부인 친구 중 홀로 지내는 분이 있었는데, 혼자 집에 있기 겁나 우리집에 와 함께 머물렀다. 정말 어려운 시절이었다.

 광주뉴스: 오랫동안 광주에서 영어를 가르쳐왔는데, 과거에서 오늘날까지 어떤 변화가 있었나?

 셰퍼: 개인적으로는, 더 전문적이게 되었고 나이도 많이 들었다. 여기 처음 왔을 때는, 대부분 외국인들은 돈을 벌기 위해 1년이나 2년 정도 영어를 가르치고, 여행을 계속 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이들은 영어를 가르치는 것을 직업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 당시에는 교사를 교육시키는 과정들이 거의 없었다. 오늘날처럼 온라인으로 진행되는 수업도 없었고, 수업자료 또한 충분하지 않았다. 수업을 처음 시작하기 위해 교재를 사러 서점에 갔는데, `Laddo's English’와 `Spoken American English’ 단 두 종류의 도서만 구매가 가능했다. 교사들은 듣기와 말하기 위주로 가르쳤다. 그래서 듣고 따라하기를 반복했다. 녹음기는 비쌌고, 혹여 가지고 있는 학생이라 할지라도 영어를 공부할 수 있는 테이프가 몇 종류 없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테이프도 세트로 판매되어 정말 비쌌다.

 광주뉴스: KOTESOL(대한영어교육학회) 와의 인연에 대해 설명해달라.

 셰퍼: KOTESOL이 시작될 때부터 참여하였다. 호남대학교의 동료 교수가 먼저 알고 광주지부 KOTESOL지부를 시작하자는 연락이 왔다. 그리고 함께 하게 되었다. 처음 몇 년 동안은 그다지 적극적으로 활동하진 못했지만, 출판업무에 점점 더 관여하게 되었다. 이후 학회의 임원이 되었고, 10년 동안 활동을 해왔다. 나는 이 일이 매우 보람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KOTESOL을 통하여 영어교수법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었고, 많은 면에서 발전할 수 있었다.

 광주뉴스: KOTESOL(대한영어교육학회)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가?

 셰퍼: 웹사이트(kotesol.org, koreatesol.org)를 방문하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매월 둘째주 토요일에 열리는 모임에 참석하는 것이다. 모두에게 열려 있다. 그리고 10월에 개최되는 국제 컨퍼런스에도 참여해 보라. 나 역시 지난 11회 동안의 컨퍼런스에 열심히 했는데, 내 생각에는 국제 컨퍼런스의 규모가 가장 크고 최고라고 생각한다. 올해 컨퍼런스에도 영어교육 관련 11명의 저명한 연사를 초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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