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되고 더러운 것들은 썩 물렀거라!

 산그늘은 여전히 엷은 잔설을 붙들고 있었다. 전국 면(面)단위 중 가장 작은 곳 중 하나라는 옴천면. 그래서 나온 말이 “옴천 면장할래, 목리 이장할래?”라는 우스갯소리다. 귀알재를 넘어서자 눈앞에 탁 트인 너른 들이 펼쳐진다. 강진 병영(兵營)이다.

 “꾸착스럽게 다리는 뭐덜라고? 거그는 새 길 놔서 인자 길도 없어져 불었어. 사람도 잘 안댕긴 디여. 차도 못 댕기고.”

 밭에서 시금치를 캐던 아짐이 일러준 다리는 이미 `꾸착스런’ 다리가 되어 있었다.

 귀밑을 스치는 바람 속에 배진천을 따라 걸었다. 조붓한 배진천 길가엔 물소리 이어지고, 천변 버들개지에는 몽글몽글 꽃눈이 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하고저수지 배수문 앞에서 만난 작은 돌다리는 공중에 걸린 반원인양, 그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 오늘도 묵묵히 시간을 버티고 있었다. 무지개 모양의 돌다리, 강진 병영성 홍교(虹橋·전남유형문화재 제129호)다.











 ▲흥국사 용두.



 “병영사람들이 돌 쌓는 데는 귀신이여”

 배진천을 가로지르며 서 있는 이 `배진강 다리’는 높이 4.5m, 너비 3.08m, 길이 6.75m의 크지 않은 돌다리다. 하지만 예전 병영을 오가는 이들에게 이 다리는 반드시 `건너야 할’ 병영의 관문이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다리 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남녀 석장승 2기가 작은 길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서 있다.

 오랜 시간 이곳을 지나는 많은 사람들을 지켜보며 삿되고 더러운 것들을 두 눈 부릅뜨고 물리쳐 왔을 터. 수백 년을 그 자리에 서서 이 고을을 지켜온 영험한 존재이지만, 탐욕에 눈먼 이들에겐 그저 돈이 되는 `물건’이었을 뿐. 십 수 년 전 어느 해 여름 도둑맞아 지금은 그 행방을 알 수 없다. 지금의 석장승은 예전 그 자리에 새로이 복원해 놓은 것이다.

 홍교 안내판에는 `직사각형 화강석재 74개를 무지개(홍예)형으로 서로 짜 맞추고, 잡석을 채워 보강한 후 점토로 다리 위를 다졌다’고 홍교 축조법을 설명해 놓았다.

 이곳 병영 사람들은 놓기 쉬운 `널다리’를 대신해 공력이 많이 들어가고 축조하기도 힘든 `홍교’를 택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예전 어른들이 노상 하신 말씀에 `북에는 개성상인, 남에는 병영상인’이라는 말이 있어. 그 만큼 여그가 장도 크고 봇짐장시들도 많았어. 당연지사 물산도 많이 들고나고 했겄제. 그러니 사람들도 오지게 많이 안 댕겼겄는가. 또 여그다가 왜놈들 막을라고 성을 쌓아서 군사들이 지켰응께 션찮은 다리 갖고는 안됐겄제.” 











 ▲순천 송광사.



 병영면 양로당에서 만난 신경식(85) 어르신은 배진천에 홍교 돌다리가 들어선 내력을 그렇게 들려준다.

 “그 뿐이간디, 천지에 널린 것이 돌이었제. 병영 사람들이 일찍이 돌 쌓는 데는 귀신도 쩌리 가라여. 전국서 질로 잘할 것임마. 근께 쩌그 수인산에도 성 쌓고 그것도 부족해서 여그 병영성을 다 쌓은 거 아니여. 어디 넘이 와서 했간디, 도새 여그 우덜 할배들 솜씨겄제. 병영 동네 담쌓은 것 좀 봐봐. 어디 여그맨키로 돌담이 높은 디가 있간디. 옛적 양반들이 다들 한가락씩 한 것이제. 그래서 나라서도 여그 돌담을 문화재로 지정한 것 아니여!”

 옆에서 말을 보태시는 김정복(83) 어르신의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병영 홍교 용두.

 

 이맛돌이 빠져나가지 않으면 다리는 절대 무너지지 않아

 당시 병영에는 전국적인 상단이 꾸려져 있었고 그 규모가 개성과 중부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개성상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그 세가 컸다. 인근 장흥, 강진, 해남 등지의 생산물과 남해안의 수많은 해산물 등이 이곳을 거쳐 전국의 보부상으로 팔려 나갔다.

 또 1417년부터 이곳에 마천목(1358~1431) 등이 병마절제사로 파견돼 성을 쌓고 해안에 출몰하는 왜구를 방비할 병영을 두었을 만큼 군사적 요충지였다. 이쯤이면 이 작은 홍교가 지녔던 의미는 단순한 `돌다리’ 그 이상이어야 했던 것. 구조적으로 튼튼하고 안정된 축조형식을 지닌 홍예교를 쌓은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홍예교의 튼튼함은 산 속 계곡처럼 물 흐름이 빠르고 수량이 많은 곳에 적합했다. 실례로 순천 선암사(仙巖寺) 승선교(昇仙橋, 보물 제400호, 1713년)나 여수 흥국사(興國寺) 홍교(보물 제563호, 1639년), 순천 송광사(松廣寺) 우화각(羽化閣)의 삼청교(三淸橋, 전남유형문화재 제59호, 1707년)와 청량각(淸?閣) 극락교(極樂橋, 1730년대) 등의 다리가 모두 홍예교이다.

 사찰의 다리는 물을 건너는 기능성외에도 속(俗)과 성(聖)을 구분 짓는 경계이자, 절을 찾는 이로 하여금 흐르는 물에 세상의 때와 번뇌를 깨끗이 씻고 청정한 도량에 이르기를 바라는 마음도 함께 담겨 있다.

 사찰 뿐만이 아니라 벌교 홍교(보물 제304호, 1729년)나 고흥군 옥하리와 서문리에 있는 홍교(전남유형문화재 제73호, 1871년), 남원 광한루의 오작교(명승 제33호, 1461년), 영광 도동리 홍교(전남문화재자료 제190호, 1479년), 진도 남동리의 쌍운교(전남문화재자료 제21호, 1870년대)와 단운교처럼 통행이 많고 다리 아래 물이 많은 곳은 모두 홍예교를 세웠다.

 홍예교는 좌우에서 나란히 돌을 쌓아 올리다가 맨위 가운데 마지막 돌, 즉 이맛돌을 끼워 넣으면 완성된다. 이 이맛돌이 빠져나가지 않으면 다리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더욱 놀라운 것은 우리의 홍예교에는 돌과 돌 사이에 시멘트와 같은 접착제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돌이 허공에 떠있는 셈이다.

 

 `월천공덕(越川功德)’의 마음인양 순정한 표정

 병영 옛사람들은 다리를 놓으면서 어느 곳도 허투루 하지 않았다. 어떤 물난리에도 견딜 수 있는 튼튼함은 물론, 사람의 눈길이 잘 닿지 않는 다리 아래에까지 정성을 다해 염원을 담아 조각을 새겨 놓았다.

 홍교 다리 아래 보이는 길고 묵직한 것, 용머리(龍頭)다. 커다란 퉁방울눈에 주먹코,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다. 다리 아래 수기(水氣)를 타고 고을로 들어오는 삿되고 더러운 것, 재앙이나 잡귀를 물리쳐 주길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 용머리다. 다리 아래까지 그야말로 물샐 틈 없는 방비인 것이다.

 맡겨진 소임으로는 험상궂어 놀라 달아날 만큼이어야 하나 어찌된 탓인지 그 얼굴은 한없이 순하고 해학적이기만 하다. 위압감도 없다. 금방이라도 배시시 웃음 흘릴 듯 입가에 담은 표정이 밝고 따스하니 어찌 제 소임 다할까.

 다리를 놓은 사람들의 표정도 저렇듯 순정했을 것이다. 다리를 놓아 모든 사람이 편안히 다닐 수 있게 하려는 `월천공덕(越川功德)’의 마음이었으니 그 마음 어찌 밝지 않았을까. 그런 마음들이 모이고 보면 무서운 얼굴보다 웃는 얼굴이 더욱 큰 힘을 갖는 것일는지도 모른다.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용을 `미르’라고 적고 있다. 미르는 `물’과 어원이 같으며, 용은 늘 비와 구름을 몰고 다녀 비를 내리게 하는 힘을 지닌 `수신(水神)’으로 생각했다. 전통 농경사회에서 비는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신의 영역이었다. 곧 비는 한 해의 생산을 결정짓는 제일 중요한 요소였다.

 홍교 다리 아래 새겨진 용두에는 제때에 알맞게 비가 내려 풍년이 깃들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도 함께 담겨져 있다.

 강진 병영의 홍교 외에도 다리 아래 용을 새겨 놓은 곳이 많다. 여수 흥국사의 홍교, 순천 선암사의 승선교, 송광사 우화각의 삼청교, 보성 벌교의 홍교, 고흥 옥하리와 서문리의 홍교 에도 모두 용을 새겨 놓았다.

 본래 다리 아래 새겨지는 용을 일러 `공하(蚣河)’ `범공(汎蚣)’ `공복(蚣?)’이라 했다. 공하는 용의 아홉자식들 중 하나로, 물을 좋아하고 물속의 악귀를 물리치는 힘을 지녀 다리나 배수 등의 시설에 이 공하를 새겼다한다. 홍교 아래의 용도 이 `공하’인 셈이다.

 이렇듯 이 홍교 아래 공하에는 병영 백성들의 간절한 마음이 깃들었고, 늘 함께 하는 일상적 공간이었다.

 “우리가 째끄만 했을 때는 대보름 밤이먼 전부 그 다리에 나가. 어른 아이 할 것없이 미영씨(목화씨)하고 소금하고 섞어서 던져 뿌리고 지 나이대로 건너 댕겼어. 말하자먼 `답교(踏橋)’를 한 것이제. 그라먼 어른들이 다리가 안아프다고 했어. 근디 인자는 그런 풍습도 다 없어져 불었어….”

 양로당 김정복(83) 어르신의 말끝이 흐리다. 이제는 모두 옛일이 되어 버린 아쉬움 때문일 것이다.

 정월 대보름 밤, 하늘에 덩실 떠오른 허연 달빛 아래 서로 한 해의 건강을 기원하며 웃음꽃 띄워 홍교아래 배진천에 흘려보내던 광경은 이제 기억 저편의 일이다.

 “그때가 좋았제. 호시절이여. 가난해도 사람들 북석임시롬. 나이 더 묵기 전에 다시 그 시절로 가고 싶구만.” “갔다 오소, 뭐이 걱정인가, 내가 여비 주께 갔다 오소.” “글랑가, 그라먼 나 혼자 말고 같이 갔다 오세. 그때 홍교 다리 아래로 오줌 쌌던 것들 다 강진바다에 있겄제.” “그것이 아직 있간디, 다 섞어져 없어져 불었제.” “그래, 그 오줌맨키로 나이도 좀 싸 불먼 좋겄네.” “그랄 수만 있다먼 내가 젤 먼저 홍교다리 아래 가서 오줌 눌라네.”

 병영 양로당 큰방에 물 좋다는 강진 설성막걸리 두 병이 놓이고, 카스텔라 안주 삼아 두어 순배 잔이 돌더니 텅 빈 잔만큼이나 술잔 아래 수북히 농이 쌓여 간다.

 글·사진 = 김정현 기자

※이 원고는 전라도닷컴에 게재됐던 글입니다. 전라도닷컴 구독 문의 062-654-9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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