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바느질골목<1>

▲ 그림지도·`바늘소녀공작소’ 윤슬기.
 `노 엉킨 것은 못 풀어도 실 엉킨 것은 푼다’ 하였다. 세상살이엔 쉬워 보이는 일이 쉽지 않고, 어려워 보이는 일이 어렵지 않다는 말씀. 그 골목엔 엉킨 실을 잘도 푸는 사람들이 산다.

 들들들들…달달달달….

 소리는 그곳의 정체성의 일부를 이룬다. 골목에 늘어선 집집이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가 쉼없이 흘러나오던 시절이 있었다.

 전주 남부시장을 지척에 둔 좁다란 골목. `○○혼수’ `○○주단’ `○○수선’이란 간판을 매단 가게들이 잇대어 있는 `바느질골목’이다. 개업 이래 한번도 바꿔 달지 않았을 성 싶은 간판들이 바깥 풍경에 고색을 더하고, 고개 수그려 재봉질에 몰두한 달인의 풍모가 그곳의 안쪽 풍경을 이룬다. 늘 조급하게 새것으로 갈아치워지는 도시의 대로변에서 비껴나 여전히 고요하고 느릿하게 시간의 흔적을 쌓아가고 있는 고수들의 세상이다.

 

 “이 골목이 옛날에는 아조 번화가였어. 헌옷 군복 사지바지 이런 거 파는 데로도 이름났고 가차이 남부배차장도 있었고. 사람이 버글버글해서 어깨를 부닥침서 걸어댕기던 곳이었어.”

 이 골목의 역사를 소상히 꿰는 `송양화점’ 주인 송창년(83) 할아버지의 말씀.

 `고물자 골목’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1950년대 전쟁 직후에는 미군부대 구호물자 보급품들이 거래되고 미국에서 들어온 헌 옷을 팔고 사고 고쳐 입던 `구호물자 골목’이었고, 1960~70년대에는 군복염색 상가가 이어지고 푸대 같은 구제 청바지를 줄여주던 `청바지 골목’이었다.

 1980~90년대에는 교복수선집들이 줄을 이어 치마길이와 바지통의 유행을 이끌었고 경찰복 교련복 예비군복 등 단체복 등을 생산해 내던 곳도 이곳이었다.

 장소에도 DNA가 있다는 말처럼, 시대의 굽이굽이를 헤쳐오는 동안 질기게 `옷’과 인연을 이어온 골목. 부침은 있었으되, 수십 년 된 한복바느질집과 옷수선집이 여전히 명맥을 잇고 있는 곳이다.

 한사코 “나는 얼마 안돼”라고 말하는 `까치한복’ 주인 유호순(74)씨. 하지만 알고 보면 장사 이력이 30년. 여기서는 그저 40년 이상은 해야 `바느질 좀 했다’고 말할 자격이 있는 것인가.

 “사양길이제, 그래도 자기 솜씨 있으문 아직도 일은 있어.”

 변해가는 세상을 버텨온 힘은 솜씨라는 듯, 은근한 자부심 서린 말들도 흔히 듣게 되는 바느질골목.

 `자신이 만드는 물건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말하는 곳’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기의 일을 자랑스러워하는 존엄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곳, 전주 바느질골목은 그러한 장인들이 `복(服)’을 짓고 `복(福)’을 짓는 골목이다.

 

 #조숙영 고전방

 조숙영(68)씨가 광주 `노라노 양재학원’의 문을 밀고 들어간 것은 열아홉 살 때였다. `째깐한 바늘’에 식구 목숨줄을 거는 생애의 문인 줄 그때는 몰랐다. 배운 기술로 처음엔 양장일을 했다.

 “기성복 시대가 됨서 양장으로는 생계가 힘드니까 한복을 시작했어요. 첨엔 치마를 꼬맸어.”

 치마는 공임이 천 원 아니면 이천 원인데 저고리 한 벌 공임은 2만5천원이었다. 25만원을 마련해서 한복 전 과정을 배웠다.

 “치마 꿔매 줌서 일을 배운 거여. 속바지 속치마 조끼 마고자 두루마기까지 사람이 몸에 입는 것 일습을 다 배웠어.”

 그때 할머니 한 분이 한산모시 치마를 들고 와서 뜯어서 등거리를 해달라고 했다. 새로 지은 옷을 입어 본 할머니가 축원했다.

 “복 받어, 복 받어! 이 좋은 손으로 늙지도 말고 아프지도 말고 놈 존 일 해.” 복 짓고 복 받으라고 치하하신 그 말씀이 바로 `금과옥조’였다.

 `조숙영 고전방’이라는 간판을 내어걸고 행여 내 자식 못 갈칠까 굶길까 밤을 낮을 삼고 일했다.

 “전에는 최고 자야 세 시간이나 잤을까. 그늘에 앉아서 흙 안 묻히고 헌게 넘 보기에나 신선놀음이지.”

 오로지 몸공으로 하는 일이다.

 “손님이 처음 오문 내가 당부를 해. `맘에 안 들문 돌아서서 숭보지 말고 맘에 들도락 고쳐주라고 허씨요, 몇 번이고 손봐 드리께 해 도라고 허씨요’ 그 말을 꼭 해.”

 그리 친절하다고 입소문이 났는지 알음알음 생긴 단골들로 `아이엠에프도 몰르고’ 살았다.

 “올 초에 첨으로 일이 줄었어. 시간 날 때 내 옷 꼬매야겄다 하고 내 `갈 옷(수의)’을 꼬매 놨어요. 남편 갈 옷이랑 나란히 해 놓고 나니까 맘이 편해요. 하하!”

 돈을 들고 와도 가게를 못 얻었다는 `한복 골목’. “시나브로 없어지고 있지 뭐. 아파서 들어가고, 늙어서 들어가고, 갈 디 가느라 가고….”

 오늘은 새벽하늘 같은 치마를 박고 있는 그이의 재봉틀 너머 마음 다스리는 글이 보인다.

 <눈을 조심하여 남의 그릇됨을 보지 말고 맑고 아름다움을 볼 것이며, 입을 조심하여 착한 말 바른 말 고운 말을 할 것이며, 몸을 조심하여 어질고 착한 이를 가까이 하라…>

 바느질 수양만으로도 그 마음자리 정(情)하고 정(靜)하였을 것을.

 

 #명륜 두루마기

 <유학자들의 두루마기는 잠자리 날개처럼 가볍고 엷은 비취 빛으로 조상의 신들과 교감한다.>

 신들과 교감하는 옷, 그런 두루마기로 평생 업을 삼은 지상선(61)씨.

 5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그이는 중학교를 졸업하자 오직 배고픔을 면하려고, 쌀밥이 먹고 싶어서 이 일을 시작했다.

 “시다 시절엔 한 달에 5백원을 받았어요. 완주 소양에서 쩌어 삼거리까지 버스비가 7원이던 시절이에요. 배움서 참 많이 맞았어요.”

 몸으로 받자온 가르침을 준 스승은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명륜’ 어르신. 2대 명륜이라는 자부심과 책임감으로 `명륜 두루마기’를 간판으로 쓰고 있는 그이가 내보이는 건 `스승님이 쓰던 가위’.

 물려받을 당시 60년이 된 거라 하였으니, 100년이 넘게 일하고 있는 가위다.

 “하도 갈아서 날이 야위었잖아요.”

 몸피를 덜어내며 쌓은 공덕이 얼마일까. 집집이 가위를 쓰는 골목인지라 가위 가는 분이 들락거리는데 “이런 가위는 여그뿐이여”라고 `감정’을 하셨다.

 김대중 대통령도 이 가위로 지은 두루마기를 입은 분이고 전북도지사 두루마기도 `명륜’에서 나간 것이다. `근동에서 엔간히 잘 나간다 하는 분들’ 옷은 다 지어냈단다.

 그 이가 옷 한 벌에 받는 공임은 12만원.

 “내 맘에 안 이쁘면 못 내보내요. 그 사람이 입어보고 좋다 해도 티끌만큼 거슬려도 고쳐야 해요. 다른 눈은 속여도 내 눈은 못 속이죠.”

 `미제(未濟)’ 라는 말이 있다. 여우가 강을 거의 다 건너갔구나 싶은 그 순간 꼬리를 적시니 `아직 다 건너지 않았다’는 그 말. 마지막 한 땀까지 공을 들인다.

 그이의 재봉틀 앞에 거울 붙은 사유를 묻는다. 모양 내려는 용도가 아니다

 “일이 바쁠 때는 잠깐도 뒤돌아볼 틈이 없어요. 손님이 오시면 한없이 기다리라 할 수 없으니 뒤 안돌아보고 거울 속으로 이야기하죠.”

 중학교 때 상급학교 가라는 말씀 대신 `내 지게’를 받았던 소년. 소두벙 만한 손으로 이 남자는 오늘도 바느질중.

 

 #`청일사’

 유리창마다 `Y샤스 신사복 학생복 작업복 작크…’ 그런 낡은 글씨들이 빛바래가는 골목.

 숱많은 눈썹에 지난 시대 미남배우의 풍모를 지닌 `청일사’ 주인 이광희(68)씨는 양복 짓는 일을 하다가 16년 전 `세탁수선’으로 전환했다.

 “양복점, 양장점, 양화점…. 그전에는 `양’자 들어가는 일들이 먹고살 만했죠. 기성품 시상이 되기 전인게 기술자라고 알아도 주고. 70∼80년대만 해도 양복점이 잘 나갔어요. 기성복 시대가 되면서 일이 자꾸 줄어들고 양복점이 사양업이 돼 가니깐 양복 일 하던 사람 대부분이 세탁수선 겸하는 일로 전환했죠.”

 70년대 `우와기’(윗도리) 한 벌 하는 데 공임이 800원이었노라고 또렷이 기억한다.

 “양복점에 바지 하는 사람, 우와기 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죠. 우와기 하는 사람이 훨씬 고급기술자죠. 한번에 정확하게 해야제, 안 그러문 아무리 고쳐지어도 울고 튿어지고 태도 안 나요.”

 바느질 솜씨라면 자신하는 그가 안타까워하는 것은 고치고 깊는 `수선(修繕)’의 마음들이 점차 잊혀지고 사라져가는 것.

 “옛날에는 고쳐 입고 물려 입고가 당연했는디, 인자 시상이 변해버렸어요.”

 

 #루비 한복

 옷은 사람을 본떠서 만드는 것. 그 사람을 본떠 만든 것이 그 사람의 옷이다.

 `루비 한복’ 오정자(74)씨한테는 `루비 옷을 입으문 옷 태가 좋다’는 그 말 듣는 순간이 작업 완료시점이다. `예쁘다’는 말에는 반드시 `편하다’가 따라야 한다는 한복 고수.

 꽃다운 열여덟 살부터 노상 바늘을 쥐고 살았다. 고향인 완주군 고산에서 개성양재학교를 나와 전주 `뉴스타일 양재학원’을 다녔다. 양장점을 하다가 21년째 되던 해, 기성복에 밀려 한복으로 길을 바꾸고 전주역 쪽에서 한복을 하다가 이 골목으로 들어왔다. 앞집도 옆집도 한복집이었던 시절, 꽃 피어나는 봄에 그 중 일거리가 많았다.

 “봄이 아무래도 결혼철이고 행락철이고…. 밤을 수도 없이 새웠어요.”

 펼쳐진 옷감에 떠오른 꽃무늬를 자르고 맞추고 바느질하는 것이 그이의 꽃놀이였다.

 “전에는 결혼식이나 회갑연이나 인생의 중대한 날에는 식구들도 당연히 한복을 입었죠. 지금은 많이들 대여해서 입고, 입지 않기도 하고.” 우리옷이 이렇게 사그라드는 게 아쉽다.

 “한옥마을에 온 젊은이들이 한복 차림으로 돌아다니고 사진을 찍는 게 유행이더라고요. 한복만이 갖는 아름다움이 전혀 없는 한복을 보면 내 얼굴이 막 부끄러워요. 한편으론 그나마 관심을 갖고 그나마 입어주는 것이 고맙기도 하구요.”

 자식들 혼례식 옷부터 손주들 베냇저고리며 돌옷까지 손수 지어 입힌 그이. 12년 전 떠난 남편의 수의도 손수 지어 입혀 보냈다. `얼마 안 남으셨습니다’라는 진단을 받고 황망한 마음을 주저앉히며 수의를 지었다. 눈물방울을 떨구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결혼옷 하러 오셨던 분들이 수의를 한다고 찾아와요. 한복이라곤 안 입던 사람도 마지막 길을 양장으로 가지는 않잖아요.”

 함께 늙어가는 친구들이 수의 부탁을 한다. 주머니 없는 흰 옷을 바느질하다가 `인생은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가’ 싶어 문득 고요해진다.

글=남인희·남신희 `전라도닷컴’ 기자/사진=박갑철 `전라도닷컴’ 기자



※이 원고는 월간 `전라도닷컴’(062-654-9085)에도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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