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낚시가 내게 찾아온 것은 언제일까? 담양의 산골짜기에서 태어난 나는 유년 시대에 큰 강물을 보지 못하고 자랐다. 동네의 또랑에서 미꾸라지와 누군가 농약을 치면 떠오르는 붕어를 보면서 자랐다. 그러다 3km 정도의 거리에 있는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큰 강을 만나게 되었다. 증암강이라는 강은 시루바위쪽에서 흘러내려왔는데 이것은 무등산이 그 발원지였다. 넓디넓은 강물은 그 유역까지 합치면 그야말로 너무나 큰 강이었다. 커서 한강이나 금강이나 낙동강을 보기 전까지는 그것이 모든 강의 실체인줄 알았다. 하여튼 그런 강은 나의 벗이 되었다.

 

 고요한 수면 위 평정심을 내려놓고…

 

 틈만 나면 강으로 달려 나갔다. 이를테면 학교가 끝나면 걸어오는 길에 목욕을 한다고 물속에 들어가 자맥질을 하며 물고기를 잡았다. 어종이 달랐다. 고작 미꾸라지와 붕어를 보던 내게 그 강물은 피리와 가물치와 메기와 빠가사리 같은 것도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한번은 물넘이가 있는 제방에서 물속을 유심히 보는데 커다란 붕어 한 마리가 큰 돌 밑의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다이빙을 했다. 그리고 붕어를 손에 쥐었다. 자꾸 빠져나가려는 붕어를 움켜쥐니 내 손이 빠지지 않았다. 이를 어쩌지 하며 망설이다 결국 붕어를 실신시키고 손을 뺐다. 숨이 가빠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된 것이다. 다시 들어가 겨우 붕어를 건져온 적도 있다. 수렴 본능이랄까 그것을 직감한 순간이었다. 그러다 동네의 형들이 대나무를 베어서 낚싯대를 만든 것을 보았다. 내게도 필요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짓을 좋아할 리 없는 부모님이 계시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참을 수 없는 유혹에 결국 낚싯대 하나를 만들었다. 부력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지렁이를 끼어 낚시를 던져 놓으면 붕어는 신통하게 걸려들었다. 그리곤 어느 날 내 낚싯대로 오지게 맞았다. 바쁜 농사철에 일손은 돕지 않고 낚시를 하다 걸린 것이었다. 그때부터 낚시는 내 곁을 떠났다.

 20대 중반 여행사를 하다 어려움이 봉착했다. 다시 낚시가 찾아왔다. 고요한 수면에 내 마음의 평정심을 던져 놓고 구름을 담아내고 바람의 자취를 읽어 내고, 미세한 찌의 흔들림에 한껏 부풀어 오른 긴장감 같은 것이 벗이 되었다. 밤낚시는 초절정의 고요함 속에서 바스락 거리는 외부의 소리만 나도 두려운 밤에 이뤄지는 것임에도 무아의 몰입에는 최고의 약이 되었다. 정지된 캐미라이트의 푸른 색감 속에 온 신경을 집중하여 올라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은 낚시를 해보지 않은 이들은 모른다.

 

 세종류의 낚시대를 갖추고

 

 그런 낚시도 어느 새 시큰둥해서 다시 산을 찾았다. 해지기 전에 무등산의 새인봉에 오르고, 배바위에서 일박을 하며 야바위를 탔다. 무서운지도 모르고 암장에 매달리는 순간 자일과 내가 한 몸이 된 것에 오히려 안도했다. 그 또한 지나갔다. 다시 낚싯대를 잡았다. 서른 무렵의 낚시는 앉아서 하는 낚시가 아니라 가짜 미끼를 이용하는 루어낚시였다. 섬진강으로 영산강으로 다니면서 꺾지와 쏘가리 얼굴만 보고 다녔다. 하지만 개체수가 많지 않은 그들은 낚시를 힘들게 했다. 이번에는 베스낚시로 바꿨다. 하천 생태계의 파괴자 베스를 잡아 없애자는 모토로 강과 호수를 쏘다녔다. 한데 베스는 맛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길들여진 민물고기 맛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나는 실속형 낚시를 추구하고자 했다. 서른 중반 저수지를 찾아 다시 붕어 낚시를 갔다. 처음 시작할 때 그 많던 붕어가 이제는 잘 보이지 않았다. 환경 탓이고 한편으로는 나 같은 낚시꾼들이 많아진 탓이었다. 낚시의 장비는 더욱 고급화 되면서 정밀하게 반응하는 채비로 진화하고 있었다. 잡기 어려운 것을 잡아야 하니 그랬고 레저 기반의 소비 생태계가 그만치 반응한 것이었다.

 어느새 내게는 단골 낚시점이 생겼고 그곳을 출입하면서 세 종류의 낚싯대가 갖춰졌다. 그중 하나는 뻘과 수초가 많은 곳에서 하는 낚싯대였다. 수초에 붕어가 걸리거나 쳐 박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낚싯대의 탄력이 좋아야 한다. 그야말로 강제견인이 가능한 낚싯대를 말하는 것이다. 두 번째 낚싯대는 수초가 그다지 없는 저수지나 호수에서 할 수 있는 낚싯대였다. 여유롭게 물고기의 앙탈을 손끝으로 느끼면서 하는 낚시다. 그리고 세 번째 낚싯대는 내림낚싯대다. 이건 그야말로 물고기를 잡기 위해 개발된 신종 병기 같은 것이다. 이런 세 가지 채비 중에 가고자하는 곳의 특성을 고려하여 장비를 챙기고 쏘다녔다. 운이 좋은 날, 아니 날씨의 협력이 있는 날(생각해보면 이런 날은 꼭 비가 오는 날이거나 좋은 날씨였다 비가 오는 날)은 가져간 살림망에 한 가득 잡은 적이 세 번이나 있었다. 두 번은 곡성의 섬진강 습지였고 한번은 신안의 섬이었다.

 

 육지의 붕어가 사라지고

 서울을 중심으로 낚시꾼들의 편대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좋은 장비를 갖추고 보트를 가지고 오거나 대형버스를 타고 남도로 내려왔다. 마치 물오리 떼가 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 저수지도 아닌데 내 강도 아니고 모두 공유하는 곳인데도 그들이 몰려오면 내 것을 강탈당하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어족 자원은 점점 고갈되어 가고 저수지 자락에 쓰레기는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조사들이 지역민과 다투는 경우도 많아졌고, 급기야 나는 신안의 섬으로 낚시를 다니기 시작했다. 어느새 늘어난 실력은 어부라는 칭호까지 주변으로부터 듣는 처지가 되었다. 가기만 하면 커다란 붕어를 잡아오는 것에 맛이 들어간 것이다.

 마음의 평정심을 찾던 초기의 낚시는 가버리고 먹잇감을 잡는 것에 집중하는 내 꼬락서니가 몇 해쯤 지나니 싫어졌다. 입적하신 범능스님은 내가 낚시를 즐겨하는 것을 말리시며, 나중에 지옥에 가면 갈고리로 어떤 형벌을 감수하려고 그러냐며 나무라셨다. 그래 조용히 낚싯대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전과 같지 않았다. 저수지로 저무는 노을의 아름다움, 물고기들의 군무, 가물치의 사냥소리, 물새들의 이륙, 이른 아침의 물안개, 달과 조응하는 별 무리들이 잊히지 않는 것이었다. 길을 나섰다. 9개월만의 행보다. 신안 안좌도의 한 저수지로 갔다. 물풀로 우거진 수면을 보고, 그 수면가로 산보 나온 우렁이들의 군집도 보고, 새우와 징거미들의 모습을 보다 벌써 산란을 위해 집을 짓고 있는 가물치의 우람한 몸집도 보았다.

 이제 낚시가 주요한 목적이 아니라 그 속에 집짓고 사는 생물들의 안부를 묻는 것이 즐거웠고, 밤이슬을 맞으며 저수지의 제방에서 스며드는 벌레들의 합창이 좋아졌다.

 텐트를 펴고 이래저래 벗들과 나누는 이야기도 흥겨웠고, 지나가는 마을 어르신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펼칠 적이면 그 어떤 자서전을 보는 것 보다 소중한 시간을 함께 함이 즐거웠다.

 사는 것, 결코 집중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이뤄지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고 냉소하고 비관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을 것인데, 그럼에도 가끔은 이렇게 길 밖으로 나와 길의 외곽을 어슬렁거리며 새로운 말 걸기를 해도 좋다는 생각. 이 또한 여행 아닐까. 날이 더워졌는데 이번 주말에는 피리통이라도 하나 장만해서 강변에 가서 잊었던 옛 고기들의 이름을 호명해 보시는 것은 어떤지 한번 권해 드리고 싶다. 다만 물 조심은 잊지 마시고 말이다.

글·사진=전고필 <여행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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