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팔마비. 그리고 걸어서 만나는 순천의 갖가지 풍경들.
 순천의 이름에는 순박함이 묻어 있다. 하늘에 순응하는 사람들의 품성이 듬뿍 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다. 그런 기대를 모으고 순천을 간다. 순천의 상징은 어찌 보면 조계산과 그 산이 품고 있는 승보사찰 송광사, 유적의 보고와 같은 선암사가 있고, 또 국가가 정원이라고 명명할 정도의 아름다운 순천만이 그곳을 대표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의 발길은 순천만과 와온포구로 이르며 곽재구 시인의 시와 유재영 시인의 시를 읊조린다. 유재영의 ‘와온의 저녁’ 전문을 보면 “어린 물살들이/ 먼 바다에 나가/ 해 종일 숭어새끼들과 놀다/ 돌아올 시간이 되자/ 마을 불빛들은 모두 앞 다퉈/ 몰려나와 물길을/ 환히 비처 주었다.”

 해질녘의 와온은 그렇게 넉넉한 곳이었다. 두루미가 오도록 전봇대를 치워 버린 뜨락, 칠면초가 붉게 물들고 갯벌은 더욱 검은 원시의 색감으로 치장할 때 석양을 떼 메고, 물살을 가르며 들어오는 어선 한척이 주는 아름다움이 그곳 순천만에 있었다. 하니 대한민국생태수도 순천이라고 스스로들 부르고 인정받지 않는가.

 

▲말 8마리 돌려준 원님의 선정비

 

 순천의 외곽에는 또한 낙안읍성이 있다. 대부분의 성곽이 산을 두고 쌓는데 반해 평지에 성을 만들어 평소에는 치소의 장소로 활용하다 전시에는 항전의 장으로 활용하는 희소한 평지성이 바로 낙안읍성이다. 인접하여 곡물과 수산물의 창고라 할 보성이 있는데 기인한 바도 있다. 하여튼 산과 바다의 아름다움에서 발원하여 그 산에 깃든 사찰이 지닌 보배스러움과 그 산천의 기운을 받아 고향을 지키고 있는 토박이들의 순정한 인심은 그야말로 절창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순천을 가면 항상 다시 보는 것이 있다. 바로 팔마비이다. 여덟 필의 말을 돌려준 한 원님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비석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최석이라는 인물이 그 주인공이다. 고려 말 충렬왕 시기에 그는 승평부사로 이곳에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다. 부민들의 흠모와 존경을 받았던 그가 새로운 자리로 이직을 하자 존경심을 담은 부민들이 관례에 따라 8마리의 말을 받쳤다. 하지만 최석부사는 완강히 거절한다. 이에 주민들은 그가 부임지를 떠났음에도 말을 따라 개경으로 보냈다. 그런 얼마 후 최석부사의 편지와 말 아홉 마리가 돌아왔다. 부사의 글에는 부민들의 따스한 마음에 감사하고 충분히 공감하는 바이며 본디 여덟 마리였는데 개경에서 말 한 마리가 출산해서 아홉 마리를 보낸 것이라는 사연과 함께 보낸다는 내용이었다.

 어지러운 원의 섭정 시기, 당시 관리들이 이임하면 헌마제도가 있어 말을 주는 것이 관례화 되어 있는데 최석부사는 그것이 못된 관례라는 것을 알고 몸소 말을 돌려보내는 실천을 했던 것이다. 이후 헌마제도는 폐지되었다. 그런 부사의 고마움에 부민들은 이 일을 절대로 잊지 말자고 비를 세우게 된다. 고려 충렬왕 34년 1308년의 일이다. 한데 이 비석의 의미가 크다. 바로 이것이 우리 역사상 최초의 지방관의 선정과 청렴을 기리는 선정비의 효시라는 점이다. 전국의 관아가 있었던 곳을 가면 만날 수 있는 선정비가 본디의 올곧음에 반응하는 백성의 뜻도 서려 있지만, “아나 공덕” 이라면서 비아냥거리는 채 서 있는 비도 많다. 한데 그야말로 청렴과 애민의 효시로서 최석을 기리는 비가 ‘최석 팔마비’라는 표제를 달고 승평부민들에게 결코 잊히지 않는 미덕으로 남겨진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비는 정유재란으로 파괴되고 만다. 이에 이 강토의 지리와 역사를 담은 지봉유설로 유명한 광해군 당시 순천부사로 부임한 이수광이 새롭게 비를 세우며 최석의 이름을 뺐다. 그가 비를 세우고 찬한 글에는 이름을 뺀 이유를 담았는데, 고려 공민왕때 부사였던 최원우가 비를 세우면서 스스로를 자찬하는 시를 지었던 것을 경계하기 위함과 후대 모두 이 비를 기억해 주기 바라는 애정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 시를 보면 “예로부터 산천이 얼마나 바뀌었던가/ 비가 터가 없어서 매몰된 지 오래네/ 성명을 다시 돌에 새길 필요 없으니/ 좋은 일은 서로 전해 입이 곧 비석이기 때문이다” 라고 읊었다.

 입이 곧 변하지 않는 비석이라는 글을 보면서 오늘날의 바이럴 마케팅을 떠 올린다. 온갖 기록과 화려한 영상의 유혹도 결국 입소문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 입이 비석이 맞다는 것을 실감하는 오늘이다.

 

 ▲승선교·고인돌공원…돌 유적 곳곳

 

 그러고 보니 순천에는 돌문화 유적도 만만치 않다. 지상에 가장 아름다운 돌다리 선암사의 승선교가 그러하고, 주암댐의 고인돌공원이 선사유적을 대표하고 있으며, 돌로 쌓은 성곽 낙안읍성도 바로 순천에 있으니 말이다. 여행을 상징적 경관으로만 떠날 때도 있다. 어느 날의 일몰이나 일출과 만나야 하고 화려한 새들의 군무나 꽃들이 만개하는 만화방창의 시기도 좋다. 하지만 이렇게 입이 비석이 되어 청백리의 귀감이 되는 최석과 같은 존재감을 만나는 것도 좋은 여행이다. 팔마비가 있는 곳은 순천의 중앙과 같은 곳이다. 길을 내려서면 중앙시장이 자리하고 있다. 거의 모든 오래된 시장이 힘겨워 하듯 중앙시장도 비틀거리는 처지이다. 하지만 상인 분들이 똘똘 뭉쳐 시장 활성화를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있었다. 중앙의 저쪽에는 아랫장이 있고, 이쪽에는 윗장이 있다. 모두들 마찬가지였다. 시골의 장옥과 같은 공간은 아니지만 상가 건물에 빼곡히 입점해 있는 상인 분들의 고군분투가 눈물겹다. 상권 활성화를 위한 교육이 이어지고, 중앙정부의 골목형 시장, 문화관광형 시장, 글로벌 시장 사업 지원에 더해 청년몰 조성 사업 등에 대한 관심도 커 보였다. 대인시장에 있으면서 다른 시장에 일부러 들러보고 무언가 새롭게 흥미로운 것을 찾으려고 노력해 본다. 그중에 가장 먼저는 상인들 간의 관계에 집중해서 보게 된다. 상부상조하는 전통이 있는가, 치열한 삶의 경쟁 안에서도 돌아서면 웃을 수 있는 이웃의 관계인가, 시장의 조직은 건강하고 포용력을 지녔는가 같은 것이 주된 관심사로 떠오르지만 눈에 보이는 미관도 무시하지 못한다. 깔끔하게 단장하고 위생적이고, 작은 것도 나눠서 팔려는 소분시장의 형태까지 갖췄다면 금상첨화겠다는 생각도 들어온다.

 

 ▲박제화된 거리, 생동감 있는 문화거리로

 

 휘적거리며 세 개의 장을 시간별로 다니며 이야기도 하고 눈 구경도 하다 보니 시간은 금세 밤이 되어 버린다. 바다와 인접하고 순후한 기온을 가진 땅이라서 나오는 물산들이 갯것뿐만 아니라 육지 것도 많다. 어염시초가 풍부하니 먹을 것도 산해진미다. 한데 이 또한 그림의 떡이다. 혼자서 기웃거리다 보니 선뜻 들어갈 집이 나오지 않는다. 지친 다리 쉬어갈 곳도 잘 안 보인다. 나그네에게 이런 것은 아쉬움이다. 길을 다시 잡아 문화의 거리 쪽으로 왔다. 광주 예술의 거리와 같은 곳이다. 각종의 예술체험 공간이 자리하고 있고, 갤러리와 커피숍이 즐비하다. 거기에 커뮤니티센터까지 자리하고 있다. 광주 예술의 거리와 비교해 본다. 외형상에는 차이가 없지만 그곳을 가꾸어 가는 기획자를 만나니 판이 다르다.

 점포 혹은 공간을 얻은 후에도 벌이가 쉽지 않으니 외부의 문화센터나 주민자치센터로 강의를 가서 벌어온 돈으로 현장을 유지하던 관행을 고쳐나가고자 노력했단다. 우선 방과 후 학교나 자유학기제 등으로 현장문화활동에 대한 관심이 많은 학교를 대상으로 이 거리에서 이뤄지는 모든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전문성 있는 운영자들의 면모를 알리니 수시로 체험 교실이 열리는 문화거리가 되었단다. 체험객이 오니 공간 운영자들은 외부로 나갈 이유가 없고, 이곳에서 정기적으로 강좌를 개설하니 시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선순환적 생태계를 갖추어 나가는 중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순천을 배회하며 많은 것을 얻었다. 함께 살고자,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고자 노력하고 사표가 되었던 팔마비의 최석과 같은 인물, 그를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세운 비석, 비석을 통해 또 하나의 교훈을 던진 이수광, 옛 순천읍성의 둘레에서 전통을 이으면서 새로운 방식의 전통시장을 만들려는 웃장, 아랫장, 중앙시장 상인들의 노력, 그리고 박제화된 거리를 생동감 있는 문화거리로 되살리려는 갤러리 디투의 허명수, 이강숙 선생의 노력들을 배워온 시간이었다.

글·사진=전고필 <여행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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