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에겐 쌀밥을… 청산도 다랭이논에 깃든 삶

▲ 청산도 초분.

 완도를 찾았다. 광주에서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은 곳, 하지만 접근성이 그리 만만치 않은 곳이 완도다. 예전 ‘개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녔다’는 전설의 섬은 이제 최경주로 대표되는 골프의 고장, 뚝심 좋은 건강의 고장이 되었고, 전복 양식으로 배가 길을 트기가 어려울 정도로 번창한 곳이 되었다. 섬이 육지와 연결되어 10년이 지나면 섬이 아니라는 판정을 내리긴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완도를 섬으로 기억한다. 마치 진도가 그렇듯이 말이다. 그런면에서 완도는 확실히 바다를 기반으로 한 산업에 익숙해져 있다. 섬진강 끝물 광양에서 시작된 김이 완도에서 정점을 찍었고 이제는 신안의 도서로 파급돼 있다. 김 대신에 완도는 전복과 광어 양식으로 대표되는 양식업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바다 자원의 고갈은 기실 예측되지 못했다. 근해 어업으로 근근히 양식을 대었던 어업이 어느 사이 원양으로 까지 성장해 버릴 것이라고는 모두들 상상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거기에 근해어업에서도 각종 어망이 발달하고 어군탐지기가 등장하고 배를 활용한 응용기술이 발전하면서 그야말로 바닷고기는 씨가 마를 정도로 변화했다. 고등어와 삼치로 파시를 섰던 곳의 위용은 지금 현재 명태 한 마리도 찾지 못하는 강원도의 고성이나 속초와 다름이 아니다. 쫓아가던 어업에서 키우는 어업으로 돌아서는데 걸린 시간은 채 30년도 안된다는 것을 누가 예측했을까.

 

 유배온 선비들 통해 학문 직수입

 

 하여튼 완도로 들어서는 초입은 해남과 완도를 잇는 교량이 이곳이 완도임을 말해주고, 다시 해상왕 장보고의 동상이 남쪽 바다를 보며 각인시켜준다. 거기에 완도의 섬을 조망하도록 만든 탑까지 있어 완도해상의 섬들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게 해 준다. 장보고의 기념관과 유적지를 지닌 완도지만 옛적에는 장보고의 이름조차 담지 못하던 시대도 있었다. 장보고의 사당에는 송징장군의 영정이 그려져 있었으니 그야말로 금기어로서 장보고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누대의 왕조는 장보고 시대 이후 섬을 터부시했다. 때문에 섬에 사람이 드는 것을 제어했고 혹은 섬을 비우는 공도 정책을 폈다. 이유는 왜구의 침입과 약탈로부터 자국민을 보호하겠다는 것이지만 실상 왕들은 섬에서 이뤄지는 일들이 왕실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두려워했다. 권력의 힘이 도달하지 못하는 섬, 그런 섬중에서도 사람들이 사는 곳은 유배지로서 활용하기도 했다. 서슬퍼런 권력이 더 큰 권력 앞에서 옴짝 달싹 못하고 금부도사에 이끌려 섬으로 들어오는 현실, 아니 거기에 탱자나무를 심고 위리안치를 시키거나 그도 모자라 방 앞까지 가시덤불로 덮어 나오지 못하도록 했다는 천극형까지 집행하게 되면 섬사람들은 권력의 무상함을 넘어 권력에 대한 두려움 마저 느꼈을 터이다. 신안이나 완도의 많은 섬들이 대체로 그런 용도로 왕조의 요청에 사용 당했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인지라 아직 글공부도 못한 아이들은 문자 알고 그림 알고 예기를 아는 그런 양반과 간극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졸라서 글 공부를 배우고 그 동네의 삶도 함께 나눴다. 문화접변의 현상이 그 가운데 일어난 것이다. 신지도로 유배를 온 원교 이광사는 그곳에서 동국진체를 완성했다. 명사십리의 모래 울음소리를 벗삼아 갈고 닦으면서 그만의 독특한 서예 세계를 창출한 것이다. 임자도로 귀양온 조희룡도 화업의 세계에 전념하며 진경과 상념을 화첩 안에 꽃피웠다. 흑산도로 귀양왔던 손암 정약전은 흑산도와 우이도를 오가면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뱃사람 문순득의 5년여에 걸친 표류의 본말을 정리하기도 했다. 면암 최익현도 왜적들이 침탈해오는 것에 항거하다 흑산도에 들어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그렇게 섬은 강직하고 문재가 빼어난 이들로부터 학문을 직수입하는 경우도 있었다.

 

 섬중의 섬…옛 문물 교류 중심지

 

 그런 섬중의 완도는 옛 문물교류의 중심지이면서 교역항의 역할과 해상 패권의 중심 역할을 했던 곳이니 그 번영이 오늘과는 참으로 다름이 느껴지는 곳이기도 하다. 전라도 사람을 갯땅쇠라고 칭하는 이유를 해석한 어느 분의 글에는 청해진을 폐하고 공도 정책을 펴면서 이곳 사람을 김제쪽의 바닷가에 이주를 시켰다고 한다. 바닷일 밖에 모르는 이들이 농사를 지어야 하니 그게 쉽지 않은 터였다. 매일 매일 갯가에 나가 땅을 파고 개간하여 농사를 지으니 그 소출이 많지는 않으면서 일만 서리 서리 하는 짓이었다. 해서 갯가에 땅을 부쳐먹는 사람이라고 갯땅쇠라고 비하하여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연상해 보면 담양 사람 전우치가 하늘의 금 대들보를 가져다가 담양땅에 뭍고 사라졌는데 사람들은 그 대들보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땅을 파 들어갔다고 한다. 옅은 땅에 농사를 짓다보니 양분이 다 빠졌는데 깊이 땅을 드러내니 농사는 그 전해보다 더 잘될 수 밖에 없는 아이러니가 발생하면서 마을 이름이 황금리가 되었다는 이야기와 설핏 같아 보인다. 갯가의 신선한 땅에서 나는 쌀이 간척미로 더 각광을 받는 오늘의 관점에서 그렇지 그 옛날 변변한 농기구도 없이 서리 서리 땅만 파야했던 그들의 노고는 다시 생각해봐도 아찔할 지경이다.

 

 최초 슬로시티…자연과 조응한 삶

 

 뱃고동이 울린다. 청산도로 가는 배표를 끊었으니 탑승한다. ‘퀸 청산’ 여왕의 배다. 태풍이나 배의 이름은 바다를 순후하게 달래고자 하는 염원이 담겨 있다. 바다를 달래고 공생해야 하는 인간의 숙명을 다시금 느껴 본다. 누군가는 지구를 땅 보다 물이 많으니 ‘수구’라고 부르자 한다. 고개가 끄덕여 지는 구절이다. 완도항을 벗어나니 배에 가려져 있던 천연상록수림으로 우거진 주도라는 섬이 보인다. 80년대 중반 처음 그 섬을 봤을 때 그야말로 모기 한 마리도 얼씬 못할 정도로 삼림이 우거졌는데 지금도 다르지 않다. 완도인이 모시는 신성한 섬으로서 주도가 갖는 상징성은 여전히 유효했다.

 ‘퀸청산’은 무척이나 깔끔한 철부선이었다. 객실에는 시원한 에어컨이 나오고, 선실과 선실 사이로 막힘없는 동선이 연결되었고, 구난시 응급조치를 치하기에도 어려움 없는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얼마전 제주의 가파도를 찾았을 때 느꼈던 낡은 선실과 위태로운 바다와는 전혀 다른 설비였다. 아무래도 청산도가 지닌 관광의 가치가 더욱 고양되었다는 점을 배에서도 느끼게 하는 구절이었다. 완도군지에는 청산도에 본격적인 사람이 살게된 것을 1800년대로 상정하고 있는데, 제주사람 장한철이라는 선비가 과거를 보기 위해 제주에서 배를 타고 오다 풍랑을 만나 이곳에 표착한 것이 1775년의 일이었고 이곳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다시 떠난 것이 그의 표해록에 기술되어 있으니 섬에 입도한 이들은 훨씬 전이라고 알 수 있다. 게다가 읍리의 고인돌의 분포로 보면 이곳은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기에 적격한 곳이었음이 입증된다. 최초의 슬로시티로 지정된 청산도의 명성답게 자연과 조응하며 살아온 흔적이 곳곳에 드러난다.

 

 돌로 집 짓고, 울 쌓고, 경계 나눠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돌담이다. 청산도는 돌로 집을 짓고 돌로 울을 쌓고 돌로 논과 밭의 경계를 구분한다. 거기에 다른 섬 사람들이 쌀밥을 곤밥이라 부를 정도로 쌀을 귀하에 여기는데, 여기분들은 자식에게는 보리밥 먹일 수 없다고 산사면의 비탈을 개간을 했다. 구들장을 깔고 풀과 흙을 다져넣어 돌널로 만든 논을 형성했다. 다랭이논인데 사면을 활용하다 보니 지형과 어우러져 원형의 곡선이 아름답다. 이것이 계단을 이루고 있다. 피아골의 다랭이논, 남해 가천의 다랭이논도 아름답지만 자식 사랑이 한껏 드러난 청산도의 다랭이논이 갖는 가치와 의미는 또 남다르다. 정부는 이곳을 국가중요농업유산으로 지정을 했고,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에서는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지정을 했다. 핍진했던 삶이 일군 생활이 이제는 세계가 인정하는 유산으로까지 승화한 것이다. 뭇 사람들의 관심이 그다지 없을 때 청산도는 보리와 마늘이 주산업이었다. 그러다가 70년대 고등어와 삼치가 많이 나와 파시를 이룰정도였다. 하지만 그 맥이 끊기면서 어업은 전복양식업쪽으로 선회하였다. 그럼에도 이전의 농사를 지었던 방식은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 촬영이후 들이닥친 관광의 열풍이 많은 변화를 가져왔고, 거기에 봄의 왈츠라는 드라마까지 촬영하면서 청산도의 다소곳한 풍경을 바꾸기도 했지만, 여전히 청산도는 보리와 벼와 마늘의 본고장이면서 봄이면 유채꽃의 아름다움과 동화된 돌담의 선명한 라인이 관광객의 찬탄을 불러오는 곳이고, 허둥지둥 바삐사는 도회지의 사람들에게 제발 청산도에서는 달팽이처럼 느리게 다니자고 이야기하는 섬이다. 환절기 관광객이 떠들썩 거리지 않을 때 조용히 청산에 깃들여 보면 어떨련지 권해보고 싶은 섬이다.

글·사진=전고필 <여행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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