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이 되신 가수 이장순 선생님의 노래에 ‘충장로의 밤’이 있다. 지역에서 초창기의 뮤지션으로 활발하게 움직이시다 서울로 가셔서 방송작가로 활약하며 열린 음악회 같은 좋은 프로그램을 만드신 분의 향수 어린 음악이다. 도시의 밤은 대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어야 할까. 광주의 밤은 그야말로 충장로가 대변했던 시대가 있었다. 특히나 70년대와 80년대를 관통하며 충장로는 광주의 심장이었다. 충장로의 명칭이 임진왜란시 조선의병의 총대장이었던 김덕령 장군의 시호를 따서 지었던 이름인 만큼 광주의 백성들은 모두들 충장로에서 안부를 물어야 했던 시대였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충장로는 시들해졌다. 지구단위의 개발이 이뤄지면서이고 대학가를 중심으로 한 유희문화가 발달하면서 그랬고, 상무지구라고 하는 메머드형의 유흥가가 등장하면서 그랬다. 거기에 도청의 남악 이전은 쐐기를 박았다. 무너진 상권 앞에서 처연한 상인들이 있었지만 광주의 일상은 아무렇지 않게 돌아갔다. 전통시장의 대표주자인 대인시장도 쇠락해졌다. 도시는 생물과 같은 것이다. 영쇠고락을 겪는 것이 이치이다. 하지만 도시의 사람들은 도시의 번화함을 찾았지 쇠락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나주가 전라도의 중심에서 광주로 옮겨왔을 때 그런 나주사람의 속앓이를 광주사람들은 기억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버드나무 우거진 천변 언덕배기 마을

 

 그렇다고 손 놓을 수는 없는 것이어서 국토부나 행자부 같은 곳에서 나서서 도시재생이나 활력을 넣기 위한 정책을 쓰고 있다. 대인시장은 문화체육관광부와 광주시가 10여년에 걸쳐 링거를 투여하고 있는 실정이기도 하다.

 그런 또 하나의 동네가 있다. 바로 광주천 남쪽의 양림동이다. 버드나무 우거진 천변위의 언덕배기 마을은 옛적에는 애기 무덤이 있던 별로 주목받지 않는 땅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근대의 문명과 서양의 문물이 들어오면서 이야기는 달라졌다. 선교사들은 양림동에 집중했다. 그들의 사택을 짓고 교회로 활용하고 그들의 의술을 광주사람에게 풀어놓았다. 어느 누구도 고개를 저었던 나환자를 내 가족보다 더 진심으로 거두어 들였다. 이런 선교사에게 감명을 받은 이가 다섯 가지의 욕망을 끊어 버리겠다고 ‘오방’이란 호를 쓰신 광주의 괴력 주먹 망치 최홍종 목사시다. 국가도 버린 천형을 가진 이들을 거두어 이들의 삶을 지탱하고 보호할 구랍행진을 하셔서 오늘날의 소록도라는 천사의 섬을 만드신 분이 양림동을 기반으로 활동하셨다. 제중병원이 오늘 기독교병원의 전신이라는 것을 누구도 다 아는 바이고, 광주의 첫 예배당도 그곳 양림동에서 출발했다. 광주를 대표하는 중요한 사이트들은 그렇게 공간이 지닌 특성에 기인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무등산의 금곡동과 같은 경우도 예사롭게 보면 무등산 수박인 푸랭이의 고장이고, 조선시대 가마터에서 백자와 분청사기가 발굴된 도요지로 알려져 있지만 좀 더 깊게 들여다 보면 의병장 김덕령이 이 자락에서 병장기를 만들었던 터전이었고, 예부터 질 좋은 종이가 나는 산지였다. 하니 광주학센터를 운영하는 송갑석 선생은 이곳을 조선시대의 첨단 클러스터 산업기지라 칭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깊게 들여다보아야 할 광주는 곳곳에 있다. 오치가 그렇고, 군왕봉이 그렇고, 견훤대가 그렇고, 생룡동이 그러하며 소촌동의 삼호영당이 그러한 곳이고, 너브실의 고봉 기대승이 그러하다.

 

 다형다방 중심의 ‘문화가 있는 날’

 

 ‘매마수’, 현 정부는 국민의 문화향수 진작을 위해 매주 마지막 주 수요일을 문화가 있는 날이라 지정하여 문화 활동을 독려하고 있다. 매마수는 정부 휘하의 문화기관과 지자체에서는 거부할 수 없는 행사다. 그런 행사를 민간 영역에서도 국가문화융성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시행하고 있다. 광주에서는 쥬스컴퍼니라는 기획사가 매월 양림동에서 매마수 행사를 하고 있다. 그 행사장을 찾았다. 낮에만 가던 양림동과는 확연하게 달라진 모습이 눈길을 잡았다. 모던걸과 모던뽀이가 양림동이 생성되던 시절로 분위기를 바꾸어 놓았다. 나는 지금 21세기의 인간이 아니라 1930년대의 한 초라한 중년의 남자가 신식의 사내와 여자를 보고 있는 몰골이 되었다. 백석의 시가 불현 듯 지나갈 때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다형다방”이었다. 다형 김현승선생이 이곳 양림동을 기반으로 하여 수많은 시어를 찾아내고 그 고갱이를 말씀의 사원(詩)으로 담아냈던 터전이다. 한 북도의 시시한 사내라 곽재구 시인이 말했던 미당 서정주 시인도 이곳에서 ‘가난이야 한 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 는 “무등을 보며” 라는 시를 길러냈던 곳이다. 광주의 내로라하는 문학인은 이곳을 거쳐 갔다. 문순태 선생도 양림동의 시간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새로운 문물이 오가는 곳의 접점에서 점진적으로 광주의 정신을 깊게 맑게 만들었던 양림동의 영성은 결코 시들지 않는 법인데 시절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양림동은 타임캡슐안의 일제 강점기를 걷게 만들었다. 결코 즐겁지 않은 기억들 하지만 그 어둠을 헤쳐 나가야 하는 터널 같은 압박감이 감도는 곳이었다. 플라타너스·은단풍 같은 외래종 나무가 우리의 호랑가시나무와 어우러져야 하듯, 저 아래 초가집을 보며 아메리카 풍의 가옥이 들어서고 적산가옥 또한 들어섰다. 그런 모습들이 하얗게 지워진 지금의 시점에서 다형다방을 중심 공간으로 하여 매마수의 행사는 돌아가고 있었다. 모던걸 테이블에서는 당대의 신사와 숙녀가 입는 옷을 대여해 주고 있다. 5000원하는 텀블러를 판매하는데 이 컵의 진짜 가격은 2000원이고 3000원은 당대의 화폐단위인 양으로 3000냥을 돌려주었다. 제휴된 양림동의 카페에 가면 사용할 수 있는 일종의 지역화폐는 양림동의 지역사회를 구성하는 네트워크의 고리들이 얼마나 단단한가를 느낄 수 있게 했다.

 

 연극 마당·오픈 스튜디오…

 

 몇몇 카페와 갤러리에서 이뤄지는 쌀롱콘서트와 아카데미를 찾았다. 양림동의 따스한 숨결을 화폭에 담아온 한희원 화백의 갤러리에서는 기타 연주를 하고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든 관객과 가까이서 화음을 적시는 마당은 경계의 넘나듦이 없는 활달한 자리였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속에 들려오는 음악을 뒤로하고 카페 파우제를 찾았다. 고건축분야를 연구하는 전남대학교 천득염 교수님의 양림동과 근대건축에 관한 강좌가 자유롭게 이뤄지고 있었다. 문화의 시발은 어찌 보면 주거에서 시작되었는데 빠질 수 없는 마당이 이런 날 관객과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호랑가시나무 창작소에서는 연극 마당이 오르고, 오픈 스튜디오가 열리고 있었다. 그리고 호랑가시나무 길에는 프리마켓이 열리고 있었다. 30여 명의 셀러들은 저마다 개성을 담은 물건을 가져와 쓰임과 가치를 공유하는 마당에 빠져 있었다. 밤이 되면 별빛보호지구처럼 어둑시근했던 양림동에 볕이 들어오는 시간이 바로 매마수의 날인 것 같았다. 그래 떠나는 것은 공간을 찾는 것이고 그 안에 깃들인 무늬를 찾는 것인데 자꾸만 일상적 시간, 내 되는 시간에만 떠나는 것이 아닌 것이란 생각이 인다. 여행은 다리가 떨릴 때가 아니라 가슴이 떨릴 때 떠나는 것인데 그때 어느 시간을 택할 것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양림동의 밤이었다.

글·사진=전고필 <여행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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