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어먹겠다고 정성들여 써붙인’

▲ 그 골목에 온기를 더하는 남원 `수복고추상회’ 간판. “우리집 양반이 아조 필체가 좋제.” 송유남 할매는 남편의 솜씨를 먼저 치켜세운다. 고추장사 경력이 40년, 간판에도 연륜 스몄다.
 “벌어먹겠다고 구루마에 정성들여 써붙인 글씨 `군고구마’, 그 이상 잘 쓸 수 있겠어?”

 서예가이기도 했던 무위당(无爲堂) 장일순 선생이 생전에 했던 이 말씀은 장삼이사들의 손글씨 간판에 바쳐진 빛나는 헌사. 손글씨 간판에 흐르는 건강한 민중심성과 생업의 엄중함을 한데 꿰뚫은 애정 깊은 통찰이다. 그에 따르면 손글씨 간판이란 `벌어먹겠다고 정성들여 써붙인’ 것. 하여 일필휘지와는 거리가 멀수록, 마음으로 꾹꾹 눌러 쓴 기색 역력할수록, 삐뚤빠뚤 허술할수록, 맞춤법 따위에 주눅들지도 않을수록, 더 끌린다.

 저 글씨를 쥔아저씨가 썼을까, 큰딸내미가 썼을까 얼굴 본 적도 없는 식구들을 헤아려보게 되는 간판들. 정성들여 써서 이윽고 내걸 적의 설렘과 희망까지도 짚어지는 간판들. 프로 디자이너가 매끈하고 번듯하고 세련되게 뽑아낸 간판은 지니지 못한 온기마저 전해 준다.

 그러한 손글씨 간판들을 만나는 곳은 대로이기보다는 시장통이나 노점이나 골목길이기 십상이다.

 생색내지 않고 우리 곁에 아무렇지 않게 펼쳐진 일상예술. 생업을 거드는 그 대견한 글씨들은 주인을 닮아 저마다의 목소리와 성정을 갖는다. 텁텁하고 왁자하고 소탈하고 수줍고 호방하고 귄있고….

 남원 동충동 골목에서 만난 `수복고추상회’ 간판.

 칼국수 면발마냥 굵고 윤기 흐르는 획에서 넉넉한 심성이 느껴진다. `뉴로얄양복점’이 이웃이다. `뉴’도 시간 따라 낡아지는 것. `수복고추상회’는 시절 따라 유행 따라 흔들리지 않고 그저 `생긴 대로’의 모습을 간직해 온 자태다.

 고추가게 아니랄까봐 이리 푸르르게 고추를 키우시는 건가. 조르라니 늘어선 고추 화분이 간판과 어여쁜 짝을 이룬다.

 “우리집 양반이 아조 필체가 좋제.”

 남편의 솜씨를 치켜세우는 송유남(70) 할매.

 “내가 잘 써서 쓴 거이 아녀. 맡겨서 하문 돈 들잖애. 근게 요 틀만 짜갖고 썼지. 첨에 붓글씨로 썼다가 빛바라분게 난중에 그 욱에 매직펜으로 덮어서 썼어.”

 목숨 `수’에 복 `복’. 황동안(81) 할아버지 말씀에 따르면 “인생에서 젤로 중요한 두 글자”를 간판에 올린 것. 간판의 나이는 할매의 장사이력과 같다. 고추장사로 살아온 세월이 40년인 할매가 말하는 좋은 고추란 “햇빛 잘 봐서 잘 말르고 색깔이 말금하문서도 발그레하니 이뻬야제. 그래야 맛도 좋아. 꼬치가 좋으문 음식을 해도 환하제.” 그 말씀 속에 말금하고 환한 기운 감돈다. 다시 쳐다본 `수복고추상회’의 글자도 그렇다. 말금하고 환하다.

 심호흡하고 한 자 한 자 공들였으리라. 특히 곧 굴러갈 듯 동그란 `ㅇ’자마다 정성이 담뿍 담겼다. 전주 남부시장의 `중앙상회’ 간판.

 “암것도 아녀. 기냥 팔라고 쓴 글씨제!”

 손글씨 간판의 탄생 배경은 대개 그러하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생업을 위한 효용. 그래서 생활의 구체적 질감을 거느린 간판들. `기냥 팔라고’라고 심상하게 말해지지만, 거기 애틋하고 절실한 소망을 한데 얹었으리라. `이왕이문 더 뽄있게 보일라고’ 정성을 한껏 보탰으리라.

 손글씨의 맛, 유정(有情)하게 다가온다. 김제 원평장 `유정상회’ 간판. 삐뚤삐뚤, 그러면서도 곡진한 성의가 느껴지고 전체적으로 조화미를 이룬다.

 흰 바탕에 그저 검은 먹글씨. 단순한 흑백의 조화가 슴슴하고 의젓하여 더욱 마음에 앵기는 간판들도 있다. 남루한 대로 당당하고, 수수한 대로 소신 있다. 그리하여 고유한 표정과 목소리를 갖는다.

 `간판 정비’ `간판 시범거리’ `공공디자인’ `시장현대화’ 등등 각종 명목의 사업으로 읍면소재지 가게나 오일장의 간판들도 획일화를 강요당하고 성형한 듯 무미(無美)하고 무미(無味)해져 가는 오늘, 손글씨 간판에서 만나는 것은 우리 시대의 민체(民體) 혹은 저마다의 개성이 빛나는 캘리그라피에 다름아니다.

 절로 눈길 닿고 발길 멈춰지는, 그리하여 행인의 심금을 울리는 것은 꾸밈없이 굳셈을 잃지 않은 자작(自作) 수공(手工)의 간판들이다.

글=남인희·남신희 `전라도닷컴’ 기자/사진=박갑철 `전라도닷컴’ 기자·최성욱 <다큐감독>



※이 원고는 월간 `전라도닷컴’(062-654-9085)에도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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