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 이서면 보월리 ‘가운뎃점빵’

▲ “옛날에는 만물상이었어요.” `지킨다’는 맹서도 생색도 없이 한영도 씨는 이 오래된 가게를 지켜왔다.

 여느 살림집마냥 한쪽 벽에는 조르라니 장독들이 늘어서있다. 화순 이서면 보월리, 가을햇볕만 길바닥에 쟁글쟁글 고여 있는 한적한 국도변의 가게.

 간판도 없다. 빛바랜 ‘담배’ 간판과 집 옆구리께에 쌓아둔 맥주병박스가 다만 그곳이 가게임을 알려준다.내부는 고색이 창연하고, 파는 물목 또한 단촐하여 한눈에 다 들어온다.

 안방에 담뱃진열장이 모셔져 있고, 바깥 마루에는 새우깡, 초코파이, 라면, 참치캔, 식용유 등등이 헐렁하게 진열돼 있다.

 그 시절의 만물상 혹은 백화점, ‘댐배집’



 “옛날에는 만물상이었어요.”

 한영도(60) 씨는 가게의 은성했던 시절을 그렇게 증언한다. 요즘의 대형마트가 하는 일을 이 조그만 구멍가게가 거의 해냈다.

 “내가 초등학교 4,5학년이었을 때(그러니까 67,68년도쯤에) 우리 집에서 마을구판장을 낙찰받아 가게를 시작했어요.”

 일대에서 유일한 가게였다. 장날을 빼고는 이곳에서 상거래가 모두 이뤄졌다.

 “여그 보월리를 중심으로 인계리, 영평리, 안심리까지 물건들을 다 조달했다니깐요. 담양 남면에서도 걸어서 여그를 댕겼고요.”

 그 시절, ‘댐배집에 간다’는 것은 요즘으로 치면 백화점이나 마트에 간다는 말과 같은 말이었다.

 “댐배만 폴잖애 비라빌 것을 다 폴았제. 아침밥 허다가 ‘아야 댐배집 가서 미원 한 봉다리 갖고오니라’ 허고 애기들한테 심바람을 시기제. 꺼멍고무줄도 있고 무명실도 있고 뭐이든 필요한 것을 다 갖촤놓고 있었제.”

 보월리 마을회관에 모여서 삶은 밤을 노놔 드시던 할매들한테 보월리 댐배집 앞이 소란스럽던 시절의 이야기란 꽃각시적 추억에 다름아니다.

 전기가 아직 안 들어왔던 시절에는 석유도 팔았다. ‘아야, 시구지름(석유) 잔 사온나’는 엄니 말씀이 떨어지면 머리 굵은 그 집 아이가 빈 됫병을 손에 들고 달려가던 곳도 이곳 ‘댐배집’이었다.

 “그러다가 전기가 들어왔던 초기에는 정전이 하도 잦은께 초하고 성냥이 진짜 잘 나갔지요. 문종우랑 못 같은 것도 팔고, 미역도 팔았어요. 갑자기 애 났을 때 산모가 묵어야 한께요.”

 점방집 아들 영도씨의 초등학교 시절은 더할 수 없는 호시절이었다. 동네 또래들한테 ‘가겟집 아들’이란 지위는 선망과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때는 독사탕 하얀 것이 젤로 인기였죠. 몰래 독사탕 꺼내다가 친구들한테도 나놔주고 나도 묵고. 엄마한테 잽히문 야단도 맞았지만 이녁 아들인디 어짤 것이요”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는 유행가 가사처럼 보월리 어매들한테 눈깔사탕의 기억은 가슴 한켠이 아린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때는 집집이 돈은 없는디 집집이 애기들은 많애. ‘오다마’라고 눈깔사탕 한나가 5원인가 했어. 그 놈 한나를 사갖고는 이빨로 깨서 조르라니 지캐보고 섰는 애기들 손바닥에 나놔줘. 독으로 탁 깨 갖고도 나놔 주고. 그러문 ‘성아야는 큰 놈주고 내야는 째깐한 것 준다’고 울음이 터지고 그래.”

 안일순(75) 할매 옛이야기에 다른 할매는 눈시울이 먼저 붉어진다.

 “울 애기들은 사탕이 달다는 것을 모르고 컸어라. 크도락 그것 한나를 내 손으로 못 사줘봤은께.”

 지금으로 치면 ‘금수저’쯤으로 동네 아이들 부러움을 샀을 점방집 아이 영도한테 맛의 신세계는 ‘삼양라면’이었다.

 “그렇게 맛있는 것이 세상에 또 있을까 싶었죠.”

 ‘댐배집’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세월 속에서도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담배 진열장. 거쳐간 담배 상표에서도 시대는 드러난다.

 “풍년초, 금잔디, 아리랑, 파고다, 은하수, 솔, 88…. 말아서 피우는 풍년초가 옛날에는 제일 인기 있었죠. 서민들의 담배랄까요. 값도 싸고. 70년대 초에 아마 10원인가 15원인가 했던 것 같아요.”

 ‘지킨다’는 맹서도 생색도 없이 지켜온 가게



 이 가게를 오래도록 꾸려왔던 어머니(이연봉)는 돌아가신지 십여 년.

 “울 어무니가 한창 장사하시던 시절에는 거의 외상 거래였어요. 여름에 보리매상하문 갚으고 가을에 쌀매상하문 갚으고. 외상공책이 하루에도 두 페이지 넘어가도록 빼곡하게 채워졌죠. 농번기에는 더 나가고요. 어무니는 글을 잘 모르신께 몇 집인지 머릿속으로 시어놔요. 저녁에 우리들이 학교에서 돌아와선 외상공책 들여다봄서 몇 집인가 시어보고 어머니께 알려드렸어요. 숫자가 안 맞으문 누구누구 집에서 가져갔는지 어무니가 일일이 기억을 헤아려서 빠진 외상을 기록하고 그랬죠.”

 그렇게 장사하던 시절은 이제 전설 같은 이야기로만 남았다.

 점방이 아래에도 생기고 위쪽으로도 생기면서 ‘가운뎃점빵’으로 불리던 영도씨네 댐배집. 동네에서 유일하게 텔레비전이 있던 집이기도 했다. 전기가 들어왔던 1970년대 중반 그 해에 바로 텔레비전을 샀다.

 “울 어무니가 다리가 불편하셨어요. 그래서 어디 구경을 못다녔거든요. 긍께 형님들이 앙거서 세상구경하시라고 젤로 몬자 테레비를 사드린 거죠. 저녁밥만 묵으문 동네 사람들이 다 모태들던 안방극장이 우리 집이었어요.”

 가게를 시작할 때 제일 먼저 마루를 깔았던 이유도 어머니 때문이었다.

 “어무니가 거그 핀히 앙거서 장사하실 수 있게끔 널찍하게 깔았죠.”

 그 마루는 여전히 성성하다. 손으로 쓸며 어루만지며 그가 말한다.

 “수십 년 동안 수백 수천 명이 앙겄다 간 마루네요.”

 마루의 널빤지 몇 칸은 여닫을 수 있게 만들어 그 밑을 수납공간으로 이용했다.

 “마루이자 창고이죠. 나무로 된 소주상자가 스무 개 넘게 들어갔어요.”

 이제는 마루 밑에 쟁일 것이 없다.

 “촌에 사람이 있가니요. 사 갈 사람도 벨로 없응께 쟁일 것이 없어요.”

 1960~1970년대 150여 명이었던 보월리의 지금 인구는 80여 명.

 “전에는 동네 지피지피 고샅고샅에 애기들이 꽉 들어차 있었제. 인자 없어. 지금은 도시로 싹 다 빠져 불어서 없어.”

 보월리 할매들은 “인자 촌에서는 애기 우는 소리가 젤로 귀한 소리” 라고 고적한 심사를 말씀하신다.

 가게벽 귀퉁이에 걸린 액자는 이발관을 했던 영도씨 형님이 남겨준 것. 소와 더불어 쟁기질하는 농부와 새참 나르는 아낙이 그려진 그림 옆에 ‘인생- 우리 쉬지 않고 일하리라. 어떻한 운명도 헤쳐나갈 정신으로…’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지금은 돌아가신 형님이 젊은 시절에 이발관 하면서 걸어놨던 액자여요.”

 8남매 중 일곱째인 영도 씨. 집안의 역사이자, 이 마을의 역사의 일부이기도 한 ‘댐배집’의 명맥을 오늘도 잇고 있다. 그로 하여 보월리 ‘가운뎃점빵’은 “제일 몬자 생개갖고 제일 마지막까지 남은 점빵”이 됐다.

 “어쩌다 오랜만에 고향 찾는 사람들은 겁나 반가와라 해요.

 ‘오매, 옛날 그대로네’라고.”

 ‘지킨다’는 맹서도 생색도 없이 지켜온 가게. 누군가에게는 고향마을 정자나무처럼 변함없이 거기 서 있는 존재로 다가선다.

글=남인희·남신희 ‘전라도닷컴’ 기자

사진=박갑철 ‘전라도닷컴’ 기자·최성욱 <다큐감독>



※이 원고는 월간 `전라도닷컴’(062-654-9085)에도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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