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찬바람이 맵차다. 단지 바람만의 영향은 아니다. 분노를 넘어 늑골 깊숙이 올라오는 내 조국에 대한 무언가는 몇 달째 가시지 않고 있다. 세상은 병들었는데 세상만 그렇지 않고 나도 병들어간다. 2년간을 모른 체했던 고혈압이 이제 압박을 가해 온다. 이만치 나댔으니 내 몸에 보링도 해 줘야 되건만, 그렇지 않고 혹사만 시켰다. 그 죗값이다. 쾌락 뒤의 고통이라고 했다. 하여튼 이럴 때 세상 가장 맑은 곳을 찾아야 한다. 어디일까. 애써 가고자 하지 않아도 훌쩍 만날 수 있는 곳이면 최고다. 강원도 원주의 문화재단에서 전갈이 왔다. 원주에서 자생할 청년문화기획자를 양성중인데 광주에서 성산계류탁열도를 재현했던 이력을 찾아 인터뷰하고자 한다 했다. 그래서 한 청년과 만나고 그 청년은 광주에 내려와 대인시장의 민낯도 보고 전통 공간의 전승과 현재적 활용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는지 올라오라 한다. 공개석상에서 1:1 심층 인터뷰를 하며 공유하는 마당이라는 것이었다. 흔쾌히 차를 몰았다. 광주에서 북상하는 호남고속도로는 너무나 식상하다. 이제 길가에 방치된 폐타이어가 치워졌는지도 눈여겨 볼 정도이다. 그럼에도 고속도로에서 멈추고 싶은 곳 하나가 있다. 바로 생거진천의 농다리다. 고속도로와 인접한 곳에 지네발처럼 강물을 건너가는 이 나라의 가장 멋진 다리가 바로 그곳이다. 예전에는 사진이라도 찍게 하려고 가변의 차폭을 넓혀 두었는데 위험한지 치워버렸다. 겉보기에는 가깝지만 인터체인지를 통해 들어가면 족히 이십여 분은 돌아가야 한다. 언제 가볼까 한번 가야하는데 그런 마음을 거둬들이며 원주를 향했다. 이전의 길들은 이천을 통해 들어가지만 T맵은 평택과 충주와 제천을 연결하는 지선을 통해 들어가라고 일러준다.

 

 원주 청년들 들뜨게 하는 프로젝트

 

 가는 길, 충주호의 맑은 호수가 보인다. 남한강의 커다란 품은 언제나 호쾌하다. 여름이면 이곳에서 모터스키가 요란하게 움직이고 강변의 낚시꾼은 세상을 낚을 폼으로 낚싯대를 드리우는 곳이다. 이 강변을 따라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싸움이 거세었다. 하니 중원고구려비는 그 대표적인 유적으로 가치를 가진다. 하여튼 강자락을 따라가니 이번에는 목계나루라는 이정표가 계속 눈에 띈다. 그래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못난 농투사니와 장돌뱅이와 사공이 있었던 그곳, 그곳이 부르는 손짓 같았다. 오늘은 당장 원주의 행사장에 도달해야 하니 내일 이른 아침에 여기를 들리는 것을 혼자 약속하고 떠났다. 타향의 밤은 한편의 즐거움과 한편의 쓸쓸함이 있다. 하지만 예전보다는 많이 변했다. 이런 생활에 나름 길들여진 탓이다. GG대 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원주의 미래를 걸머질 9명의 청년들이 생활하는 공간은 원주의 원도심내에 있었다. 아무런 설비도 없는 50여 평의 공간을 나름대로 쓰임이 있는 곳으로 만들어 청년 공간으로 탈바꿈하며, 스스로 지역 사회에 도움이 될 기획안을 잡아가는 프로그램은 원주 청년들을 들뜨게 만들고 있었다. 내가 사는 영원한 청춘의 도시 광주에서 나 또한 문화기획자를 꿈꾸는 전도유망한 청년 12명과 함께 “유망주”라는 프로젝트를 수행했지만, 여기 분위기도 못지않았다. 숨을 돌리고 이들과 대화를 나누며 오늘 기득권이 되어 버린 나를 되돌아보며, 이들의 고민과 애환을 들으며, 앞으로 진로를 함께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공식적인 자리를 밤늦게 마감하고 우리판에서 이야기하는 진짜 공식적인 뒤풀이 장으로 넘어간다. 족히 20여명이나 되는 친구들과 술판을 벌이며, 현재의 문화정책 상황과 원주의 현장이 갈급 하는 문제를 논하고, 무엇이 될꺼나를 고민하기 보다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중요함을 다시금 이야기 하며 자리를 파한다.

 혼자만의 숙소에 돌아와 내 젊음의 한때를 복기해 본다. 관광분야는 일감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고, 나는 그 안에서 여행분야에 천착했다. 그러다 공부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책상위의 공부는 기본이었고, 현장에서의 공부는 필수였다. 마음먹고 덤벼드니 운이 따랐다. 학업의 기회도 열리고, 강의의 기회도 열렸고, 현장체험의 기회도 쉽게 주어졌다. 소쇄원에서 6개월여를 상주하고 다시 2년여 간을 출입하면서 부쩍 자란 나를 느꼈다. 그러고 다시 심드렁해 질 때면 책을 주워들었다. 너무나 안락한 생활을 보냈다. 지금의 청년들은 꿈꾸지 못할 세월이 내게는 쉽게 다가왔던 것 같았다. 나만 챙기지 말고 내 일천한 경험이지만 잘 나누며 살아보자고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영성의 고장 원주의 이른 아침은 치악산과 남한강의 선물인지 맑고 상쾌했다.

 

 신경림 시인 ‘역작’ 후광 깃댄 나루

 

 가볍게 차를 몰아 원주를 빠져 나온다. 목계장터가 목표다. 충주시에 위치한 그 장터는 여느 강나루와 마찬가지로 기능을 상실했다. 운송의 수단이 수운이었을 시절, 이 나라의 장터는 대부분 강변과 해상포구가 중심 기능을 했다. 정선의 아우라지, 경북 예천의 삼강, 전라도 영산포, 서울의 마포 같은 곳이 장시의 기능과 쉼터 기능을 했던 중요한 곳이다. 한데 지금은 대부분 그 기능이 소멸되고 이름으로만 남아있다. 영산포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목계도 그런 곳이다. 정선에서 출발한 뗏목이 정차하는 곳, 이 물길을 따라 물산이 내려왔고 사람이 교류했음에도 발달된 도로망과 교통편과 달라진 물길이 이것을 거두어 갔다. 하지만 목계나루는 사라졌음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바로 이곳 노은면 출신의 신경림 시인의 역작이 있기 때문이었다. 목계나루를 한 번도 가보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내 간절함에는 신경림 시인의 “농무, 새재, 길” 이라는 시집과 “강따라 아리랑 찾아”, “시인을 찾아서” 같은 글속에 담긴 각인된 인상 때문이다. 마치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 라는 시를 읽자마자 거기가 어디지 라고 궁금해 하며 남광주역과 남평역을 서성였던 것처럼 말이다.

 물길이 변화하고 마을도 변해버렸고, 나룻배 하나 들어오지 않는 초췌한 모습이라는 것을 짐작하고도 남지만 그의 시비 앞에서 당당한 목소리로 시라도 읽어야 내 젊은 날의 궁금증과 열망을 내려놓을 것 같았다. 원주에서 족히 30분도 걸리지 않아 목계나루에 당도했다.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지만 나루에는 강배체험관과 게스트 하우스와 카페가 있었다. 일종의 체험장이자 학습장을 꾸며 놓았다. 물론 그 중심에는 목계나루의 옛 영화를 그리워하고 기억하고자 하는 열망과 그 옆으로는 신경림 시인의 역작 ‘목계나루’라는 시의 후광효과를 보고자 하는 힘이 어울려 있었다. 조운의 역사를 둘러보고 한강의 물길이 당시에 얼마나 중요한 삶의 노정이었는지를 알 수 있는 강배체험관은 그 자리에 어우러져 있었다. 체험관 내부에서 강사람들의 땀과 결실과 열망을 읽어보고 강바람을 맞으며 주변을 서성였다. 아무도 찾지 않는 시간의 강변은 옛 바람과 동격일 것 같았다. 그때도 이렇듯 청풍으로 불었을 것이고 거기에 돛을 올리고 바람을 맞으며 밀려오는 강물의 힘을 뒷심으로 감당하며 구비 구비 내려가고 거슬러서 마포에 당도했으리라. 풍진 세상이었지만 그럼에도 협동의 힘과 공동의 열망으로 버티었던 시절이었을 터이다. 그 세월의 한켠을 들여다 본 시인의 입에서 소리 한 구절이 흘러나오는 것은 순전히 강물과 바람에 순응한 사람들의 읊조림을 온몸으로 받아 들였기 때문 아닐까 싶어졌다. 시비 앞에 서 보았다. 목계나루- 신경림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무 /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나루에 /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 민물 새우 끓어넘는 토방 툇마루 / 석삼 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 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천은 변해도 그 산천에 그림자를 묻은 순진무구한 삶은 이렇게 기억의 저장 장치에 불멸로 남아있었다. 시를 읽으며 그와 동시에 운율이 따라 흘렀다. 그것은 다름 아닌 김경주 선생의 ‘죽창가’였다.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 꽃이 되라하네~.

 강변에서 나는 운율에 취해 목계나루와 죽창가를 동시에 따라 읊조리고 노래하고 있었다.

 바람이 다시 불어오니 다음에 가야 할 곳이 윤곽이 떠오른다. “겨울 문의 마을”이 그곳이다. 길은 항상 길 위에서 또 다른 길을 그립도록 한다.

글·사진=전고필<여행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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