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쪽은

▲ “난 고양이이며 앞으로도 죽 그럴 거라는 사실을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난 고양이이며 앞으로도 죽 그럴 거라는 사실을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고양이가 말했다.

 “왜 내가 밤에 어슬렁거리며 다닌다고 놀라는 거야?

 왜 내가 야옹거리며 싸운다고 신경질 내는 거야?

 왜 내가 쥐를 잡아먹을 때 구역질 하는 거야?

 난 고양이라구, 고양이!”

 “내가 어린 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아이가 말했다.

 “왜 나를 엄마와 똑같은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는 거야?”

 왜 내가 안기지 않으려고 할 때 상처를 받는 거냐구?

 왜 내가 웅덩이를 첨벙거리고 다닌다고 해서 한숨을 쉬는 거야?

 왜 내가 아가적 행동을 하면 비명을 지르는 거야?

 난 어린아이라구, 어린아이.”

 “내가 엄마라는 사실을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엄마가 말했다.

 “엄마는 왜 네 뜻을 받아주기만 해야 한다는 거지?

 왜 내게 고양이의 생활습관을 이해시키려 드는 거야?

 왜 어린 아이는 원래 그런 거라고 하면서 가르치려 드는 거냐구?

 왜 나더러 무조건 참고 조용히 넘기라고 하는 거지?

 난 엄마라구, 엄마.”

 - 쉘 실버스타인 `고양이와 아이와 엄마’

 

 플라톤의 저서 `향연’에는 최초의 인류에 대한 아리스토파네스의 연설이 등장한다. 최초의 인류는 둥근 원통모양의 몸통 하나에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네 개의 팔 다리로 빠르게 굴러다니는 남남, 여여, 여남의 종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들은 두려움을 몰랐고 이성적인 동시에 용감했던 것 같다. 최초의 인류가 언젠가는 신을 능가하리라는 두려움 그리고 이들의 완전함에 대한 시기가, 제우스로 하여금 한 몸이었던 그(들)을 둘로 분리하는 계략을 꾸미게 했다. 그 사건 이후로 둘로 나뉜 인간은 자신의 원초적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다니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니 플라톤의 말대로라면 옆구리가 시리다는 12월, 팔짱 끼고 군밤 호호 까서 입에 넣어줄 연인이 있는 사람은 자기 본연의 시원성(始原性)을 되찾아 `완전’하고 `안전’해졌다고 보아야한다. 신도 두려워한 정도의 강력한 힘을 되찾았다고 봐야한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사람은 때로 없던 힘과 기적을 발휘하게 되는 것일까. `그(그녀)’가 본디 `나’였기 때문에.

 그런데 여기, 제짝을 찾고 싶은 그리고 이미 짝을 찾아 둥지를 튼 우리 모두에게 짝 찾기의 또 다른 본질에 대해 들려주는 작가가 있다. 앞서 든 `고양이와 아이와 엄마’, `아낌없이 주는 나무’로 널리 이름을 알린 쉘 실버스타인이다. 사과나무가 사랑하는 소년이 필요로 하는 돈과 집과 배를 위해 가지를 자르고, 몸통을 자르고, 마침내는 둥지만 남았다는 이야기. 늙고 늙은 소년이 호호백발 허리 굽어 나무에게로 오자 자신의 밑동에 앉아 쉬게 할 수 있어 끝까지 행복했다는 이야기. 이런 사과나무는 슬프다. 그러나 그가 쓴 나머지 시와 소설들은 사유하게 하되 유쾌하고 자유롭다. 예를 들면 오늘 등장할 `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쪽은’과 후속편인 `떨어진 한쪽 큰 동그라미를 만나’ 그리고 사격의 달인이 된 사자의 정체성 찾기 프로젝트 `총을 거꾸로 쏜 사자’가 그렇다. 쉘 실버스타인은 세 편의 우화소설을 통해 사랑과 독립, 관계를 맺는다는 것에 관한 신선한 반전과 아름다운 결말을 들려준다.

 

 어느 누구의 조각일 수도, 아닐 수도

 

 `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쪽은’의 주인공은 동그라미다. 어느 날 동그라미에게 고민이 생겼다. 자신이 완벽하지 않은, 그러니까 한조각이 떨어져나간 `이 빠진 동그라미’임을 알아버린 것. 결핍에 몸부림치던 동그라미는 마침내 자신의 잃어버린 한 조각을 찾아 모험을 떠나기로 한다. 처음으로 한 조각을 만났으나 시작부터 어렵다. 몸의 일부임을 확인하려면 조각을 맞춰보아야 하건만 결단코 `당신의 조각만은 아닐 거’라며 맞춰지기를 거부하는 작은 쪼가리. 첫 줄에 퇴짜를 맞은 이 빠진 동그라미, 상심을 극복하고 제 짝을 찾아 데굴, 데굴, 길을 떠난다. 그런데 이 녀석 참으로 재미있다. 몸의 특성상 한 조각이 떨어져 나간 피자모양 원이기에 아무리 빨리 가려해도 덜컹, 덜컹, 천천히 움직일 수밖에 없다. 그 탓에 가다가 구덩이에 빠져 허우적대고 담벼락에 부딪혀 코가 깨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꽃들 중매 서다 지친 나비 불러 등에 태우고, 땅 밑으로 기어가던 풍뎅이와 길동무 우정도 나누고. 앗, 그러다 눈이 맞았다! 구석에 쪼그리고 있던 작은 쪼가리 하나와.

 “야 반갑다”

 “야 반갑다”

 “넌 누군가의 몸에서 떨어진 조각이니?”

 “글쎄 모르겠는데.”

 “넌 그저 하나의 조각이기를 원하니?”

 “글쎄, 어느 누구의 조각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넌 내 몸의 일부가 되고 싶진 않지? 그렇지?”

 “꼭 그렇지도 않아.”

 “우린 서로 맞지 않을지도 모르고.”

 “글쎄”

 -`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쪽은’/시공주니어

 도저한 탐색전. 그도 그럴 것이 `이 빠진 동그라미’는 동안 숱한 퇴짜를 맞았었다. 어떤 조각은 너무 헐렁해 저절로 빠져버렸고 어떤 조각은 너무 꼭 맞아서 부서져 버렸다. 어떤 조각은 너무 날카로워 찔렸고 어떤 조각은 네모나서 아예 들어가질 않았다. 헐겁거나 부서지거나 찔리는 관계들은 인간이 만나 맺는 모든 `관계들’의 형상화이다. 이 빠진 동그라미의 비어있는 틈이 `사람의 마음’이라면, 그 마음 안에 누군가를 혹은 무엇을, 사람은 늘 들이며 산다. 그렇지 않으면 허허로운 것이 인간의 마음이며, 텅 빈 마음인 채로 두어두면 `의미 없다’ 느끼는 것이 인간이지 않던가. 그러나 어떤 존재는 나에게 너무 작아서 그 만남의 뒤가 늘 공허하고, 어떤 존재는 도리어 나라는 그릇이 너무 작아서 마른 크래커처럼 그를 부서져버리게 한다. 또 어떤 만남은 일치점을 찾지 못하고 서로 찌르고 찌르다 `내가 어디까지 악할 수 있는지’를 발견하는 쓰라림으로 마무리되고. 이 빠진 동그라미가 여러 번의 계절 동안 경험한 만남들도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도.

 

 떨어진 한쪽 큰 동그라미를 만나

 

 그러다 꼭 맞았다! 마침내 제 짝을 찾은 동그라미는 꿈에 그리던 소원대로 완전한 원이 되었다. 그리고 더불어 얻은 선물 속도! 동그라미는 그야말로 구르는 바퀴가 된다. 두 발로 걷던 인간이 바퀴를 고안해낸 것은 기원전 4000년경 메소포타미아에서였다. 바퀴는 인류사에 있어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나에게로 오라’는 성경 말씀의 기원도 바퀴에 있으렷다. 바퀴의 발명으로 인간은 일에서의 효율성과 신속성을 높일 수 있었고, 튼튼한 바퀴는 전쟁의 승패를 가름하는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인간이 속도에 취했듯 너무 빨리 구르게 된 동그라미도 자신의 속도를 즐겼을까? 완전해진 동그라미는 꽃이 보여도 향기를 맡을 새가 없다. 나비를 만났지만 무등을 태울 수가 없다. 입이 열리지 않으니 노래도 부르지 못한다. “으음 이게 그런 것이구나!” 동그라미는 찾았던 조각을 슬며시 내려놓고 굴러간다. 이가 빠진 채로 데굴, 데굴.

 오늘도 어떤 이는 있던 옆구리의 조각이 빠져 서럽고, 어떤 이는 `이 조각이 진정 내 조각’인지 마음 갸우뚱거리고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 빠진 동그라미가 하려는 말은 이렇다. 짝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 그러나 내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 짝이든 친구든 찾으려는 시도는 애당초 잘못된 시도이자 방법이라는 것. 스스로의 부족함을 안다는 것은 성숙의 증거이며, 그런 자기를 그래도 품고 세상을 만난다는 건 강인함의 증거다. 그렇다면 홀로인 시간과 함께인 시간을 두루 즐길 수 있을 터. 사랑은 만나서 하나되기가 아닌, 고독과 독립을 쟁취한 사람이 나의 시간 속으로 상대방이 들어올 자유를 허락하고 타인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기를 구하는 상호배려, 이타성이 열리는 공간이다. 서로에게 스며들되 정체성을 잃거나 빼앗지 않기, 사랑의 지속이 어려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 고백하자면 `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쪽은’을 막 읽은 후의 내 첫 감정도 당혹감이었다. `솔로이던 때의 자유와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기껏 찾은 조각을 내려놓고 떠나? 이 무책임한 자, 버림받은 조각을 생각하라고!’ 걱정 말기를, `떨어진 한 쪽 큰 동그라미를 만나’는 나와 비슷한 의문을 갖는 독자에 대한 쉘 실버스타인의 배려이자 대답의 책이다.

 “나하고 굴러갈 순 없어도 너 혼자서 굴러갈 순 있을 거야.” 대답하는 큰 동그라미.“나 혼자서? 나같이 떨어진 조각은 혼자서 굴러갈 순 없단 말야.” “굴러가 보려고 해 보긴 했니?” 물어보는 큰 동그라미.“하지만 난 날카롭고 뾰죽하게 생겨서 굴러갈 수 없단 말야.”

 

 뾰죽한 모서리도 닳으면 구를 수 있어

 

 “뾰죽한 모서리는 닳아 없어지고 모양도 바뀐다구. 어쨌거나, 나 이제 그만 가 봐야겠어.

 어쩜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구.?

 - `떨어진 한쪽 큰 동그라미를 만나’/분도출판사

 `떨어진 한 쪽 큰 동그라미를 만나’의 주인공 `홀로 떨어져 외롭게 있던 한 조각’은 이 빠진 동그라미가 내려놓은 조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한동안 조각은 자신이 누구 혹은 무엇의 일부일 거라 믿으며 누군가 데려가주길 바라고 기다린다. 그러다 어느 순간 털썩 쿵 털썩 쿵! 스스로 움직여보는 작은 조각. 털썩, 쿵 털썩, 쿵 수없는 반복 동안 뾰족하던 모서리는 점차 닳고 닳아 마침내 조각은 데굴데굴 구를 수 있게 되었다. 스스로 원이 된 것이다. 진짜 만남의 시작, 어쩌면 기적은 `지금’부터다.

박혜진 <지혜의숲 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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