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 하나가 도시를 상징하다

 밀양, 그곳은 어떤 곳일까. 특정한 지역에 관한 습득된 정보는 고착화 되어 뇌리에서 모든 것을 주관적 판단으로 내몬다.

 영남루로 통칭되는 밀양의 ABC는 내내 변화가 없었다. 좀 더 보태면 밀양아리랑과 사명대사의 전적이 있는 표충사를 합해서 밀양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 비밀스런 땅은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을 통해 다시 드러난다. 소읍에서 벌어지는 인간관계의 종점, 구원의 세계를 향한 열망과 자기만족을 실감나게 그려냈던 영화. 그런 세계를 거쳐 밀양에 대한 인식은 재탄생했다. 언젠가는 그곳에 가 보리라고. 그런 어느날 누군가의 초대를 받았다. 사례 강의 부탁이었다. 두시간 반을 달려 밀양시장으로 갔다. 지나는 길에 보여준 표충사는 다음 순번으로 미뤘다. 우선은 시내에서의 약속과 영남루를 보는 것이 급한 일이었다.

 밀양강을 끼고 있는 도시는 고풍스러움속에 늙어가는 모습이 선연했다. 언제부터인가 오래된 도시에서 느껴지는 공통점은 그러한 것이었다. 진주를 찾았을 때 촉석루를 담은 강물이 말라가는 것을 보면서, 백마강 낙화암 아래 돛배를 보면서 사람처럼 도시도 그렇게 천천히 늙어감을 선연히 느꼈었다. 그후 나는 어느 길에서건 그 늙어가는 모습의 잔상을 찾아보려 노력해 보는 것이 또 하나의 여행목적이 되었다. 밀양 시내로 진입하는 순간 드러나는 홈플러스를 보면서 그런 생각에 증명서 하나 발급된 느낌이었다. 시내나 주택가도 아닌 곳에 자리잡은 대형마트는 밀양 사람들의 고집스러움에 대한 반어법처럼 해석되었다. 기업으로서는 구매고객 가까이 가고 싶지만 시내를 뚫고 들어가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매장은 열어야 하고, 방법은 고객을 자기 위치로 모시는 것일 것이다. 기존의 시장의 기능이나 가게의 역할을 면밀히 파악한 후, 일종의 “여기 안오곤 못 배길 거야. 비록 우리가 시내로 들어가진 못하지만” 뭐 이런식의 해석을 하게 했다. 불과 2초나 3초도 되지 않아 드는 생각이 그거였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나만의 억측과 고집이 거기 도달한 것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밀양강 낀 도시, 고풍스러움 속 늙어가고

 

 시내 중심가에 옛 관아가 있던 곳에 시장이 들어서고 시장은 다시 건물 내부의 시장과 아케이드로 치장된 외부의 시장으로 나뉘어 있었다. 시장이 이렇듯 나뉘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성업을 이루었으며, 이로 인해 영역이 확장된 것이다. 그런 영화로움 뒤에 오늘의 단면은 양 시장이 근근히 명맥을 이어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부의 시장분들이 갖는 힘은 정말 대단했다. 강의를 하면서 주고받는 이야기 안에서 미래 비전을 설계하는 이분들의 힘에서 느껴지는 것이 그러했다. 삽시간의 두시간을 보내고 시장의 밖으로 나왔다. 독립운동의 고장으로서 자부심이 강하다는 것을 강의 시간에 하나 더 밀양의 키워드로 추가했다.

 햇살이 뉘엿거리는 밀양강가로 가면서 문득 10여년전 밀양문화의집을 운영하시던 관장님의 얼굴과 이름이 떠올랐다. 공무원이었던 그분은 지금 무얼하고 계실까. 못뵌지가 십여년 되었으니 한데 딱히 찾아 뵙는 것도 그렇고 그냥 떠올리기만 했다. 장갑을 끼지 않으면 손이 시릴정도의 날씨에 사람들은 약간 움츠리며 밀양루 근처를 지나고 있다. 일군의 등산객들은 밀양루 게단을 내려오고 있다. 구경 잘했다는 듯이. 연세드신 그분들을 보다 고개를 돌려 보니 낯익은 모습이 보인다. 그 관장님이다. 잠깐 마주쳤는데 모르신다. 확신을 가지고 ‘관장님’하고 부르니 돌아본다. 아구 오랜만입니다. 알아보신다. 기시감의 적중이랄까. 차 한잔 하시자는 것을 거리에서 인사 나누는 것으로 대체하고 영남루에 올랐다. 일반적인 누각이 출입문이 없는데 출입문을 갖추고 있다. 본디의 용도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연원을 보니 이곳은 영남사라는 절터였다. 그 절터에 관아가 들어섰다. 전북의 무장읍성이 떠오른다. 본디의 절을 객사로 만든 흔적처럼 이곳도 절이 폐하자 그 부속건물로 누각을 지었다. 그리고 관아가 들어섰다. 관아에는 손님을 맞이하고 영접하는 객사와 왕과 왕비의 궐패를 모시는 공간인 객사가 필요하다. 그 객사에 잇다은 부속건물로 영남루를 활용한 것이다. 영남의 뜻은 조령의 남쪽을 뜻한다. 밀양을 동서로 지르는 밀양강이 시원스레 보이는 언덕에 자리잡은 누각은 그 자체의 눈맛이 일품이다. 한데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건축의 구조 또한 정말 장엄하면서 무겁지 않게 지어졌다. 여수의 진남관이나 통영의 세병관이 가지고 있는 군대식의 위엄성 보다는 사대부의 활달한 기상을 닮은 건물이다.

 

 영남루 절터에 관아가 들어서다

 

 내력을 보니 김주라는 밀양군수가 진주 촉석루의 건축구조에 감응하여 이곳 또한 그 건물구조와 닮게 만들라고 아전을 내려보내 비슷하게 만들라고 한 것이었다 전한다. 후에 세조때 웅장하게 건물을 올렸지만 임진란으로 불타버려 헌종 10년인 1844년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돌이켜보면 이런 건물이 우리 곁에도 몇 개 남아있다. 우선 남원의 광한루가 그렇고, 화순 능주의 영벽정이 그렇다. 그리고 광주에 있어야 할 희경루가 또한 그 모습이다. 영벽정과 광한루는 그대로 인데 희경루는 사라지고 다시 복원되지 않았다. 지역을 상징하는 역사적 건물이 광주에 있는 것은 드물다. 광주의 역사가 일천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일제 강점기 신도시로 급격하게 성장하면서 역사의 흔적 많은 부분이 소멸되었다. 물론 정유재란으로 인한 오랜 피해도 있었지만. 저 하나의 건물이 갖는 상징성이 도시 전체를 대변하는 힘 앞에서 대단하다는 생각을 가져 본다. 영남루의 본체 좌우로는 날개처럼 부속 건물을 가지고 있다. 한데 지층에 완급을 주어 상승감을 주었다. 아래에서 점차 위로 올라가면서 느껴지는 감정은 더 큰 우주를 대할 수 있는 기대감과 호쾌한 마음을 주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강물을 바라보는 바위 언덕에 자리잡은 영남루는 물과 돌과 정자라는 누정의 이치를 그대로 담았다. 누마루에 앉아 경관을 감상하고 담겨진 글들을 본다. 천하의 인걸들이 출입했던 곳임이 그대로 증명된다. 바위 사면 아래 조그마한 사당이 보인다. 아랑사라고 하는 곳이다. 그 유명한 아랑낭자의 유혼을 달래기 위한 사당이 보존되고 있다. 죽음으로서 정절을 지켰다는 아랑이라는 밀양부사 윤 아무개의 딸을 위한 사당은 많은 이들의 방문을 받고 있고 새로운 스토리텔링의 소재로 활용되고 있다. 아랑을 탐하는 통인의 계략에 휘말려 저항하다 죽게되고 유기된 영혼이 새로 부임한 사또에게 나타나면서 속절없이 신관사또가 죽어나가는 일, 한 배포 좋은 사또가 들어와 억울한 영혼을 달래주고 죄인을 징치하는 이야기는 제주도의 김녕굴 이야기와도 유사성을 가진다.

 

 지층에 완급 준 상승감…호쾌함 북돋아

 

 이렇게 어느 지역을 간다는 것은 그 지역만의 고유한 것들을 보면서 감동을 받기도 하지만 역사적 유사성이나 사람살이의 동질성, 지형과 지질이 가진 지역성 등을 내밀히 받아 들이는 장이다. 또 한편으로는 비교문화의 한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동기이기도 하다.

 신비스러운 빛이 있는 땅과 밀양에서 다른 어느 것도 더 시도하지 못하고 영남루와의 조우를 끝으로 광주로 돌아왔다. 다시 가면 정말 사명대사도 뵙고, 삼복에 얼음이 어는 얼음골도 다녀와야겠다.

전고필 <여행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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