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 선거권’, 학교가 ‘정치판’돼야 할 이유

▲ 지난해 11월12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1차 민중총궐기대회와 함께, 탑골공원에서 진행된 전국 청소년 시국대회 모습.<광덕고 박민홍 학생 제공>
 다들 아시다시피, 대선을 앞두고 ‘선거권 연령을 현행 만 19세 이상에서 18세 이상으로 확대하는 공직선거법 개정안’(이하 ‘18세 선거권’)이 사회적 의제로 떠올랐습니다. 정치권에서는, 여야 모두 원칙적으로 18세 선거권에 찬성 의사를 밝혔으나 정치적 셈에 따라 속내는 제각각인 것으로 보입니다. 정당들의 이견으로 인해 1월 국회에 법안 상정은 좌절되었으며, 2월 임시 국회에서도 어떻게 다루어질지 미지수네요. 정치인들은 이 법안을 둘러싸고 다른 개혁 법안과 모종의 거래를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시민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며 목소리를 높여야겠지요.

 그런데, 저는 뭔가 찜찜합니다. 지금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18세 선거권’ 주장이 혹여 ‘나이 프레임’에 갇혀 오히려 문제의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죠. 만일 18세 선거권이 통과되면, ‘17세’에게는 왜 선거권을 부여하지 않느냐는 물음이 곧바로 나오겠죠. 그리고 16세, 15세는요“ 도대체 몇 살까지 가능한 걸까요? 그 나이는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른바, ‘국제 기준’(Global Standard)만 따르면 되는 걸까요“ 여기서 나이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투표용지를 누구까지 쥐어줄 것인가’ 벗어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한 가운데에서 18세 선거권 주장이 나왔다는 점입니다. 그리하여 지금 18세 선거권 주장의 본질은 ‘청소년 시민권 획득’입니다. 나라가 휘청일 때마다 맨 처음 광장에 달려 나와 촛불을 들고 목소리를 높여 다른 시민들을 불러 모았지만,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자마자 미성숙하다는 굴레를 뒤집어 써야 하는 ‘2등 국민’이 아니라, 혹은 그들의 촛불이 ‘기특’하긴 하지만 무럭무럭 자라서 나중에 때가 되면 비로소 자신의 권리를 제대로 행사해야 하는 ‘유예된 시민’이 아니라, 청소년들은 바로 지금 이곳에서(hic et nunc) ‘시민’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교육은 청소년들이 민주공화국의 시민으로서 갖춰야할 역량을 확산하고 강화해야 합니다. 청소년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제시하는 일, 자신과 다른 생각을 마주하는 일, 개인의 의견을 타인과 함께 공동의 의견으로 다듬어 내는 일, 공동체의 규칙을 함께 만들고 스스로 그 규칙을 지키는 일, 정당한 절차의 결과, 자신의 의견이 채택되지 않더라도 승복하고 공동체의 합의를 존중하는 일 등.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가치를 다양한 내용과 방법을 통해 몸소 겪고 익혀야 합니다.

 이런 교육은 동시에 ‘정치판’일 것입니다. 전문직업정치꾼들의 권모술수가 판치는 정쟁과 이념의 아수라장이 아니라, 근원적인 의미의, 시민들의 활동이 펼쳐지는 장(場)으로서 정치판 말입니다. 근원적으로 ‘정치’(politike)란, ‘공동체의 구성원’(polites)이 그 ‘공동체’(polis)를 ‘돌보고 가꾸는’(politikos) 일입니다. 이에 따라 청소년들은 자신의 교육 공간에서 만나는 다양한 공동체에 적극 참여하여 그 구성원으로서 공동체를 가꾸고 돌보는 모든 일을 통해 민주공화국의 시민의 역량을 배우고 익힐 수 있습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교사들도, ‘정치적 중립’이라는 미명 아래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기계적 침묵을 강요받는 현실에서 벗어나, 한편으로는 그 자신이 시민으로서 목소리를 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교육자로서 균형 감각을 가지고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는 법을 학생들과 함께 가르치고 배울 것입니다. 그리하여 공교육(公敎育)은 비로소 제 이름에 걸맞는, ‘교사와 학생이라는 시민을 성장시키기 위한, 교사와 학생이라는 시민들의 자율적 활동에 의한, 교사와 학생이라는 시민들이 주체로 서는 학교’가 될 수 있습니다. 학교가 이런 정치판이 되어야 마침내 ‘국가’라는 공동체를 가꾸고 돌보는 일까지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투표용지를 쥐는 데 가져야할 역량’ 학습을

 학교가 정치판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교육 공간이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원칙적으로 백번 양보해서 좋은 말이긴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이 가능할까?’라고 반문할 분들이 있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고할 만한 좋은 사례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여러 사례들이 있지만 독일의 ‘보이텔스바흐 협약’을 간단하게 소개해드릴게요.

 1976년, 독일의 좌우 진영의 학자들과 각 단위 정치교육 주체들이 독일의 작은 마을인 ‘보이텔스바흐’에 모여 다음의 세 가지 정치교육의 원칙들에 합의 했습니다. ‘첫째, 정치교육에서 교화 및 주입식 교육을 금지한다.’ ‘둘째, 논쟁이 되는 사안은 논쟁 중인 것으로 그대로 소개한다. 즉, 주요 쟁점과 반대 의견을 모두 소개해 의견 차이 자체를 수용하는 태도를 갖추게 한다.’ ‘셋째, 당면한 정치 상황과 자신의 입장을 분석한 뒤 자율적으로 자신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운다. 그리고 기존 정치 상황을 자신의 이해관계에 부응하도록 변화시키는 능력을 키운다.’

 이 원칙에 따라 독일은 민주시민교육을 진행해 왔으며 오늘날까지 독일연방정치교육원이 운영하는 청소년 매체 ‘플루터’(fluter), 아동 매체 ‘하니사우란트’(Hanisauland), ‘청소년의회’(Jugendparlament), ‘시민학교’(Volkshochschuhle) 등, 다양한 정치교육제도가 운영되고 있습니다. 결국 그 현실 가능성은 우리의 의지와 성실함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광주에도 ‘광주어린이청소년의회’가 올 1월에 출범했지요. 이 활동이 단지 시늉에 그칠 것인지, 아니면 참된 민주시민교육의 새로운 장으로 거듭날 것인지는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일입니다.)

 우리의 문제로 돌아와서 생각해봅시다. 도대체 무엇이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들었습니까? ‘모두를 위한 나라는 어떤 나라이어야 하고, 권력의 주체로서 시민은, 어떤 역량을 갖추어야 하는지’ 스스로 되묻지 않은 시민이 오직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여 그들을 권력의 자리로 밀어 올리지 않았나요? 이런 일을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의 고민이 단지 ‘투표용지를 누구까지 쥐어줄 것인가’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투표용지를 쥐는 데에는 어떤 역량을 가져야 할 것인가?’에까지 다다라야 할 것입니다.

 그 고민의 결과, 교육의 현장에서부터 ‘더 많은’ 민주주의, ‘더 사소한’ 민주주의가 뿌리 내려야 할 것입니다. 18세 선거권, 그것은 학교를 ‘정치판’으로 만드는 지름길이 되어야 합니다. 그 정치판에서 교사, 학생 가릴 것 없이 모두 시민들로 성장할 것입니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일상에 끈덕지게 자리잡고 있는 박근혜-최순실을 탄핵시켰다 할 수 있겠습니다.

추교준

 

추교준은 인문학이 잘 팔리는 시대에 어떻게 하면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인문학이 가능할지 고민하는 사람입니다.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대안학교에서 학생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한 번씩 시민단체 활동가들 어깨너머로 인권을 함께 고민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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