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
 내가 처음 이 생명의 문지방을 건넜을 때의 순간을 나는 알지 못했지요.

 한밤중 숲속의 꽃봉오리와도 같이 나를 이 광대한 신비의 품속에 피어나게 한 것은 무슨 힘이었을까요.

 아침에 내가 빛을 우러렀을 때 그 순간 나는 이 세상의 낯선 사람이 아님을 느꼈던 것입니다.

 이름도 형태도 없는 불가해한 것이 나의 어머니 모습이 되어 나를 그 두 팔로 안았던 것이지요.

 꼭 그처럼, 죽음에 있어서도 그 똑같은 미지의 것이 내게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 생명을 사랑하는 까닭에, 죽음 또한 사랑하게 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그 오른편 젖에서 아기를 떼어낼 때 아기는 웁니다만,

 바로 그 다음 왼편 젖에서 그 위안을 찾아내게 마련이지요.

 -`기탄잘리.95’ 타고르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

 인간의 삶은 유한하다. 그럼에도 언제나 내일이 있을 것처럼 믿고 행동하는 것도 인간이다. 언젠가는 나도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의 하루하루는 내가 마치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처럼 관성적으로 흘러간다. 이런 진리를 깨우치고 있었던 16세기 독일의 화가 한스 홀바인은 `대사들’이라는 그림 속에 죽음을 의미하는 사물을 그려 넣고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부제를 붙였다. 메멘토 모리! 라틴어로 직역하면 `너의 죽음을 기억하라.’

 한스 홀바인의 그림 속 두 사람은 프랑스를 대표해 영국으로 갔던 외교관 장 드 당트빌과 주교 조르주 드 셀브로 당시 두 사람의 나이는 29세와 25세였다. 그런데, 당당한 태도에 자부심과 긍지가 엿보이는 두 인물 사이로 흥미로운 트릭이 숨어 있다. 그림 하단에 15도 각도로 틀어져있는 이미지가 보이는지? 그림을 소장했던 장 드 당트빌은 종종 그림 앞에 서서, 붉은 포도주를 채운 잔을 마셨다고 전해진다. 포도주가 담긴 잔은 불투명해서 마시기 전에는 그림의 숨은 이미지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다 마신 후 투명해진 잔에 그림 하단을 비추면, 잔의 굴곡이 렌즈의 역할을 하게 되어 이미지의 실체가 드러난다. 눈치 챘겠지만 해골이다.

 세속적인 지위와 부 그리고 지식을 소유했던 이 젊은 귀족은 무엇을 위해 자신의 초상화에 해골을 그려넣게 했을까? 사람은 언젠가는 죽을 수 있다는 목숨의 유한함을 자각할 때, 섣불리 방자해지지 않으며 겸허할 수 있다. 실수는 받아들이고 위업 앞에서도 자기를 과장하거나 부풀리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이, 역으로 불멸을 얻는 최선의 방식임을 두 대사들은 알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니 존경 받고 싶은 현대의 명사들이여, 텔레비전에 얼굴을 비출 때마다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 그리하여 불멸을 얻으라.

 

 영원한 생에 대한 인간의 갈망

 오래 전, 네 발에서 두 발로 막 서기 시작한 인간은 변화무쌍한 자연 앞에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도 짧은 평화의 시간과 너무도 긴 불안의 시간, 그리고 때 이른, 예기치 못한 죽음. 알 수 없는 거둬들임 앞에서 인간은 자신보다 더 크고 위대한 존재를 이 모든 사태의 원인으로 상상했다. 그리고 그 존재에게 순종하며 기도했다. 종교의 시작이었다. 이렇듯 종교는 죽음을 극복하고 죽음 이후까지 생을 연장하고자 했던, 불멸을 향한 인간의 목마른 갈망을 보여주는 첫 번째 위대한 사건이며 사태였다. 역사와 문학도 마찬가지이니, 불멸을 향한 인간의 이야기들을 변주하며 지속적으로 들려주고 있지 않은가.

 기원전에 쓰인 페르시아의 대서사시 `길가메시 이야기’는 카리스마 넘치는 왕이자 영웅 길가메시의 불멸을 향한 여정을 들려준다. 그는 친구의 죽음을 목도한 후 불사의 영약을 찾아 세상 끝까지 모험한다. 그리고 마침내 불로초를 손에 넣는 순간, 간교한 꾀에 넘어가 뱀에게 뺏기고 말았다. 그래서 봄마다 뱀은 허물을 벗고 꽃 대님처럼 아름다운 빛으로 다시 한 번 살아가는 것이다. 역사는 어떤가. 천하를 통일한 진의 시황은 불로초를 구해오도록 신하 서불을 동해로 보냈더랬다. 그러나 작전은 실패하고, 제주도의 서귀포(서불이 돌아간 곳이라는 뜻이다.)라는 이름으로 그 흔적만 남았다. 사실, 생을 죽음과 멀찌감치 떨어뜨려 놓으려는 노력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을 분리해보려는 것만큼 허망하다. 몸에서 그림자를 떼어내려고 그림자를 움켜쥐는 허공속의 손짓처럼 집요하고 슬프다.

 가장 기묘한 불멸의 탐구로는 SF소설의 걸작이자 고전인 `프랑켄슈타인’이 있겠다. 의사이자 과학자인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죽은 사람의 조각들을 모아 만든 괴물을 살려내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자신의 피조물에 두려움을 느끼고 괴물을 버려둔 채 도주한다. 자신의 기원을 찾아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뒤를 쫓던 괴물은, 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냉대와 괴롭힘 속에서 진짜 괴물이 되어갔다. 200년 전 책상 앞에 턱을 괴고 소설가 메리 셸리가 상상하던 세계는 21세기 들어 현실이 되었다. 유발 하라리는 저서 `사피엔스’에서 죽지 않는 인공지능을 만들어, 혹은 자신의 복제를 통해 인간이 영원히 생을 연장하는 조물주가 되는 순간의 도래를 예견한다. 그 세계는 인간에게 축복일까, 재앙일까. 그리고 그러한 세계에서 사후의 생을 약속함으로써 유구한 시간을 존속해온 종교는 과연 어떤 역할로 살아남을까.

 

 밀란 쿤데라의 불멸

 `불멸’은 제목 그대로 불멸을 바라는 인간 본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인간이 불멸을 얻는 방법은 죽은 후에도 후세의 기억 속에 남아 살아가는 것이다. 불멸도 큰 불멸과 작은 불멸로 구분된다. 작은 불멸은 생전에 알고 지낸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것, 큰 불멸은 생전에 몰랐던 이들의 머릿속에도 남는 것이다. 큰 불멸을 이야기하기위해 쿤데라는 나폴레옹과 괴테, 베토벤과 헤밍웨이를 소설 속에 끌어들인다. 나폴레옹과 괴테와 베토벤은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들로 세 사람은 실제로도 만난 적이 있다. 나폴레옹은 독일로 진격해 들어갔을 때 자신의 괴테를 초대했고, 걸어 들어오는 괴테를 보고 “저기 사람이 온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나폴레옹을 민중의 해방자로 믿었던 베토벤은 나폴레옹을 위한 교향곡 `영웅’을 작곡했다가 그가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악보를 찢을 뻔한 전력이 있으며. 불멸의 작품을 탄생시키는 예술가가 귀족에게 모자를 벗고 먼저 인사하는 것이 옳은가 아닌가를 두고 베토벤과 괴테가 벌인 신경전은 두고두고 회자되는 이야기로 남았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쿤데라가 우리나라의 오래된 속담을 알았을까. 그랬다면 유교적 공명(功名), 널리 이름을 떨침을 마땅한 생의 도리로 여겼던 조선 선비의 욕망에 고개를 끄덕였을지도 모르겠다. 불멸의 욕망은 동서양을 망라한다.

 소설에는 그밖에도 여러 명의 실존 인물과 허구의 인물이 등장한다. 죽기 전에 이미 불멸의 반열에 이름을 새겨 넣는 행운을 누렸던 대문호 괴테는 예순두 살에 스물여섯 살의 베티나를 만났다. 그러나 베티나가 사랑한 것은 괴테가 아니라 괴테와의 관계를 통해 얻게 될 자신의 불멸이었다. 베티나와 꼭 닮은 영혼의 짝으로 로라가 있다. 자신을 아는 모든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불멸하기를 바라는 로라의 욕망은 언니 아녜스와 형부인 폴의 삶에 파장을 일으키는 요인이다. 잦은 만남과 이별로 실연의 상처를 겪을 때마다, 로라는 밤새 흘린 눈물로 퉁퉁 부은 눈을 가리기위해 선글라스를 쓰고 나타난다. 그러나 실제로 그녀의 선글라스는 눈물을 가리려는 것이 아닌 자신의 고통을 과시하고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다. 나는 이만큼 아파요! 이렇게 아픈 나를 어떻게 외면할 수가 있지요? 라는 요구이자 무언의 몸짓. 아녜스는 이를 이해할 수가 없다.

 “나 역시, 이런 경우 누구나 끝장을 내버리고 싶어 한다는 걸 이해해. 고통을 참을 수 없다는 걸 말이야. 사람에겐 누구나 자살할 권리가 있어. 그건 우리 자유야. 그것이 떠나버리는 하나의 방식인한, 난 전혀 자살을 반대하지 않아. 하지만 로라의 경운 달라. 걔는 떠나고 싶은 게 아냐. 걔가 자살을 생각하는 건 바로 그것이 머무는 방식이기 때문이야. 그의 곁에, 우리 곁에 머무는 방식, 자신을 우리의 기억에 영원히 각인하는 방식, 우리 삶에 큰 대자로 덮쳐들어 우리를 깔아뭉개는 방식 말이야.” - 불멸/민음사 중

 자아의 유일성을 가꾸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로라의 언니인 아녜스는 자신의 자아에서 외적인 것과 빌려온 것을 모두 추려냄으로써 자신의 순수한 본질에 다가가기위해 노력한다. 동생 로라의 방법은 정확히 그 반대로, 로라는 자신의 자아를 좀 더 잘 보이게 하고, 좀 더 두텁게 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덧붙여 그것에 자기를 동화해간다. 쿤데라는 이것을 자아의 덧셈법과 뺄셈법이라고 부르는데 언니 아녜스의 방법은 끝없이 제거해가는 것이다. 끝없이 삶속으로 파고들며 간섭하는 시시콜콜함을 관심이자 애정으로 착각하는 이웃에게 “제발 좀 나를 그대로 나둬 주시오!”라고 외쳤던 쥐스킨트의 좀머씨처럼 아녜스는 자신과 타인의 경계와 침묵을 지켜주려고 노력한다. 그건 다른 말로 한 사람이 온전히 그일 수 있도록 허용한다는 의미이다. 그런 까닭에 끝없이 자신의 관심사와 좋아하는 것, 감정을 공유하고 나누기를 바라는 로라로 인해 아녜스는 지치고 혼란스럽다. 스위스로 날아가 숨고자했던 아녜스는 결국 교통사고로 덧없이 사라지고, 끝까지 남아서 원하던 불멸을 쟁취하는 것은 로라다. 선글라스를 쓴 언니의 패션을 따라하고, 언니의 아름다운 몸짓을 따라했던 로라에게는 사실 본질이라는 것이 없다. 차용을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끝없이 확장한 로라는 짝사랑하던 형부 폴의 사랑을 얻는데 성공하고 아녜스가 죽은 후 폴과 결혼한다. “이제 나를 그만 쳐다보렴.” 고독과 학문 속으로 조용히 침잠하기를 즐겼던 아버지를 닮은 아녜스와, 세속적이었던 어머니를 닮은 로라의 갈등은 필연이었다. 아녜스는 숨기를 바랐고 로라는 늘 자신의 슬픔을 통해, 혹은 기쁨을 통해 세상에 드러나기를 바랐다. 폴은 그를 향해 흔드는 로라의 매력적인 손짓과 미소에 감동하고 전율한다. 그러나 그것은 폴이 아녜스를 알기 전 십대 소녀였던 아녜스의 것이다. 아녜스는 로라가 자기와 똑같이 인사를 따라하는 것을 보고 그 독특한 인사법을 그만 뒀었다. 한없이 비우는 아녜스 한없이 채우는 로라. 나는 어느 쪽인가, 나의 본질은 뺄셈과 덧셈 중 무엇을 지향하는가.

 

 불멸을 향한 몸짓에는 사랑이 없다.

 불멸에 대한 욕망에는 단 두 개의 표점(標點)만 있다. 여기 있는 자아와, 저기 아득히 먼 수평선. 그리고 두 개의 개념만 갖는다. 자아라는 절대와 세계라는 절대. 따라서 이 몸짓은 사랑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왜냐하면 타자나 이웃 등, 이 양극(세계와 나) 사이에 있는 모든 인간은 미리 게임에서 배제되었고, 탈락되었으며, 간과되었기 때문이다. 스무 살에 공산당에 가입하는 소년이나 손에 총을 들고 게릴라에 합류하러 산속으로 가는 소년은 혁명가라는 자신의 이미지에 매혹되었다. 그를 다른 사람들로부터 구분하는 것은 바로 그 이미지이며, 그를 그 자신이게 하는 것도 바로 그 이미지다. 그의 투쟁의 기원에는, 무수한 시선이 집중될 `역사’라는 무대에 내보내기(내가 서술한 그 불멸에 대한 욕망의 몸짓을 실천함으로써)전에, 매우 분명한 색조를 부여하고 싶은 자신의 자아에 대한 불만스러운 격한 사랑이 있는 것이다.

 - 불멸/ 민음사 중

 

 책속에는 영혼도 등장하는데 무려 괴테와 헤밍웨이다. 천국에서 헤밍웨이를 만난 괴테는 죽음 이후에도 불멸에 대한 열망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음을 고백한다. 자기 이미지에 대한 염려, 그건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미숙함임을, 자기 이미지에 무심하려면 죽은 이후에도 50년의 시간이 더 필요함을 이야기한다. “그때가 되어서야 어니스트, 당신도 인간이 멸하는 존재임을 고통 없이 평온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오.” 불멸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사랑받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얼마나 공허한 마음이기에, 타인의 사랑들로 자신을 채우려 하는가. 또 다른 명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밀란 쿤데라는 말했다. “만약 우리가 사랑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사랑받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박혜진 <지혜의숲 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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