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지 않아도 어김없이 오는 봄

 봄이 혈관 속에 시내처럼 흘러 돌, 돌, 시냇가 차운 언덕에 개나리, 진달래, 노란 배추꽃 삼동(三冬)을 참아온 나는 풀포기처럼 피어난다. 즐거운 종달새야 어느 이랑에서나 즐거웁게 솟쳐라푸르른 하늘은 아른- 아른- 높기도 한데-.

 -윤동주 `봄’

 

 웃음, 빈틈으로 퍼지는 유쾌한 역설

 어디선가 듣고 웃었던 적이 있다. 거리의 시위대가 광화문을 지나 가두행진을 벌이고 있을 무렵, 여경으로 짐작되는 여인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타고 울렸다. 법과 질서의 수호를 이야기하며 거리를 떠나 집으로 물러나 줄 것을 요구하는 굳고 딱딱한 목소리 사이로, 행진 중이던 누군가가 불쑥 끼어들어 그녀를 향해 시원하게 소리쳤다. “노래해-! 노래해-!” 파안대소하며 함께 외치는 사람들, 그리고 계속되는 거리행진. 한 순간 이편과 저편이 사라졌다. 허공에서 울리던 꾸짖음과 단죄의 목소리는 갈 곳을 잃고 우물쭈물하다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 공중으로 흩어졌다.

 엄숙함과 무거움은 국가, 정부, 대의 등 질량이 어마어마한 것들의 특징이다. 그러나 너무 크면 날아오르지 못하고 가라앉는다. 유동하지 못하면 썩기 쉽다. 그날, 무거움을 무거움으로 대적하고자 거리로 나왔던 몇몇 사람들의 얼굴로 번졌을 빙그레한 미소들을 나는 떠올린다. 그리고 시간을 초월해 그들과 함께 웃는다. 풍자가 상황의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인간의 이중성을 발가벗겨 한낮의 광장으로 내모는 힘이라면, 해학은 엄혹한 냉기 속에서 그 냉기까지 품어 안고 온기를, 따스함을 나누려는 힘이다. 고통과 분노는 사실이지만 고통과 분노를 표현하는 방법이 꼭 고통스러워야할 필요는 없다. 같은 목표를 추구하되 언제나 조금씩 다르게 하는 것, 그래서 항상 시도이고 과정에 있는 것. “뭐해? 이리 와서 우리랑 함께 놀아!”라고 적에게 손짓하는 것.

 삶을 투쟁으로 보는 사람들은 이것과 저것을 이분화 한다. 삶은 죽음과의 싸움이며 생은 너와 나의 경쟁이다. 성공은 남보다 더 낫게 되는 것이며 이를 위한 실천적 선택이 바로 인맥과 자기 계발이다. 뒤처지거나 앞서거나. 그러나 아이들에게는 관계가 곧 목적이고, 함께 하는 모든 시간이 곧 놀이다. `삶은 진지한 게임이다’라는 어른의 담론 속에는 이기기 위해 자신의 패를 보여주지 않아야 한다는 경쟁심과 강한 사람과 한패를 먹으려는 처세술이 뒤섞인다. 그러나, 아이들이 하는 게임은 다르다. 아이들은 유연하게 규칙을 바꾸고 실수를 용인하고 무엇보다도 항상, 다시 시작한다. 아이들에게 `삶은 진지한 놀이다.’ 투쟁의 자리를 잔치이자 축제로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아이들의 태도이며, 스스로 가진 내적 동력으로 시간의 바퀴를 돌리는 실존의 태도임을 작은 에피소드는 알려준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 이야기할 `봄’의 자세이기도 하다.

 

 기다리지 않아도 어김없이 오는 봄

 

 시인 이성부는 봄이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온다’고 말했었다. 봄이 늦는 것은 봄의 눈길이 이곳저곳에 고루 미치기 때문이다. 불편한 뻘밭 구석도 기웃대고, 홀로 시름하는 썩은 물웅덩이에게도 들르고, 그러다 에라잇 싸움도 한 판하고, 멍든 눈 부비며 지쳐 누웠다가 휘적휘적 더디게, 그러나 올 것이기에 마침내 온다고 시인은 노래한다. 참으로 그렇다. 3월의 첫 아침, 봄을 기대하며 나온 문밖의 바람은 여전히 매섭고 차지만, 바람의 밀도가 누그러졌다는 것을 나는 느낀다. 그래서 `봄봄’을 펴들고 김유정과 함께 봄을 미리 마중해보기로 한다. 와우, 봄이다.

 밭 가장자리로 돌 적마다 야릇한 꽃 내가 물컥물컥 코를 찌르고 머리위에서 벌들은 가끔 붕붕 소리를 친다. 바위틈에서 샘물소리밖에 안 들리는 산골짜기니까 맑은 하늘의 봄볕은 이불속 같이 따스하고 꼭 꿈꾸는 것 같다. 나는 몸이 나른하고 몸살(을 아직 모르지만) 병이 나려고 그러는지 가슴이 울렁울렁하고 이랬다. - 김유정 `봄봄’

 그러니까 김유정의 단편 `봄봄’의 화자는 스물여섯 꽉 찬 노총각 되시겠다. 이몽룡이 단옷날 나풀거리는 치맛자락 속으로 얼핏설핏 비치는 춘향의 속치마를 보고 뜨거운 가슴앓이를 했던 나이가 열일곱이니, 이 분 노총각 맞다. 그러나 총각은 총각이되 장인님이 있는 총각이다. 점순이 열 세 살 되던 해에 데릴사위로 들어와 꼬박 사년 일곱 달을 돈 한 푼 안 받고 일했건만, 예비 장인의 변함없는 핑계는 “이 자식아! 성례구 뭐구 기집애가 미처 자라야할 게 아닌가”다. 그러나 점순이 키는 사년 째 제 자리 걸음, 장모님 키는 점순이 키보다 귓배기 하나가 작으니 장인의 속셈은 모르는 사람 빼고 다 안다. 백지장도 맞들어야 소리가 나는 법, 혼자서 용을 쓴들 예비 장인을 당해낼 도리가 없던 어느 봄. 이 모든 사태의 발단은 봄, 그 비릿하고 설레는 바람 탓이다.

 “밤낮 일만 하다 말텐가!”

 “그럼 어떻게?”

 “성례시켜 달라지 뭘 어떻게?”

 “안 된다는걸 그럼 어떡 헌담!”

 “수염을 잡아채지 그냥 둬, 이 바보야?”

 상을 내려놓는 후 장인의 분부대로 내외하느라 멀찍이 등을 돌리고 앉았던 점순이 얼굴이 빨개지면서 성을 내지 않느냐. 점순이마저 나를 바보 호구로 보다니, 신세가 따분하여 차라리 죽느니만 못하다 생각하며 빈 가마니에 누웠던 나는 장인의 지게막대기에 볼기짝을 맞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부엌 뒤 울타리 그늘에서 꼴을 몰래 엿보고 있는 점순이의 시선에 힘입어, 점순이도 미워하는 `이까짓 놈의 장인님’, 하고 장인님의 바짓가랑이를 꽉 붙잡고 늘어졌는데, 아뿔싸 장인님이 땅에 쓰러져서 눈에 눈물이 피잉 도는 게 아닌가. “할아버지 놔라 놔, 놔, 놔놔.” 그 악다구니에 뛰어나온 장모님은 그렇다 치고, 내 편을 들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점순이는 “에그머니, 이 망할 게 아버지 죽이네!”하고 마냥 우는 게 아니냐. 그 바람에 맥이 탁 풀린 나는 장인님 지게막대기에 머리가 터지도록 얻어맞고야 만다. “너 이 자식! 장인 입에서 할아버지 소리가 나오도록 해?”

 봄은 장인도 몰라보게 한다.

 어수룩한 나와 활발하고 야무진 점순이 사이를 가로막는 건 다름 아닌 장인 그것도 `마름’인 장인이다. 김홍도의 `벼 타작’ 그림을 보라. 긴 담뱃대 물고 막걸리 한 사발 걸친 채 유유자적 힘겨운 노동을 영화 보듯 관망하는 철면피한 인물이 보이는지? 아마도 그가 마름이렷다. 마름은 지주의 권한을 위임받아 소작농들을 관리하던 중간 계층으로, 사회의 계층구조가 만들어낸 탐욕스러움의 화신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두 팔 두 손 불끈 쥐고 한 해의 마무리를 하는 일꾼들의 얼굴엔 순수한 육체성의 노동에서 오는 긍지와, 배곯지 않고 끼니를 때우리라는 소박한 만족이 있다. 이것이 신의 얼굴이다.

 자고로 반찬 투정하는 건 반찬을 손수 만들지 못하는 자의 연약함의 표현이 아니던가. 날마다 같은 일을 반복하는 사람들의 하루하루, 그 시간들을 하찮게 여기는 건 반복에 필요한 근기와 끈기, 첩첩한 시간들을 견딜만한 내공이 그에게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육체성의 강도가 허약한 도시인들은 과거에 대한 불만, 현재에 대한 불평, 미래에 대한 근심이 많다. 몸으로 움직이는 동안은 머리가 비워진다.

 그런 의미에서 김유정의 `봄봄’에 등장하는 나와 점순, 장인은 서로 닮았다. 셋이 싸우는 장소는 논두렁 밭두렁이고 생활이 이루어지는 치열한 현장, 어쨌거나 아웅다웅, 한 울타리 안이기 때문이다. 밥그릇과 사랑이 달린 일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니고 또 무엇이랴. 점순이와 내게 이 봄이 사랑을 통한 한 몸 되기라면, 과년한 딸만 셋 둔 장인에게는 나이 먹지 않고 봄마다 부활하는 땅이 어린 자식이고, 영원히 거둬야할 식솔이다. 그래서 그 사단이 난 다음에도 장인은 나의 머리를 불솜으로 손수 지져주고, 등을 뚜덕이며 “어여 가서 뒷골의 콩밭이나 갈구 오너라.”라는 말이 가능한 것이고 “빙장님! 인제 다시는 안 그러겠어유.” 장인이 주머니에 넣어준 담배 한 봉을 가지고 부랴부랴 나는 일터로 가는 것이다. 그렇게 씁쓸하고 달콤하게, 생은 이어진다. 눈부시게 밝은, 서로의 속살이 뻔히 다 비쳐서 오히려 그 못난 점까지 사랑하게 되는, 말 많고 탈 많은 봄이 어허! 지나간다.

 

 시인 윤동주와 김유정은 서로를 알았을까?

 

 슬픔을 어찌 사랑할 수 있겠는가. 어찌할 수 없을 때 그 어찌할 수 없음을 웃음과 포용으로 얼싸안고 견뎌보는 건 더더욱 아무나 못할 일. 김유정의 단편 속에는 웃음으로 눈물을 닦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여전히 삶은 살만한 것이라고, `너도 어여 살으라.’ 등을 슬며시 밀어주는 투박한 손길이 있다. 김유정의 소설에서 여름도 겨울도 배경도 봄 같은 냄새가 나는 건 그래서다. 그나저나 같은 봄을 이야기했던 윤동주와 김유정은 서로를 알았을까? 1917년 북간도에서 태어나 일본 복강 형무소에서 1945년 세상을 떠난 윤동주가 막 만20살이 되었을 때, 1908년 강원도에서 태어난 김유정은 광주에서 폐결핵으로 눈을 감았다.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체험해 겪어내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투사일 것이며 시대의 그늘을 기억해 글로 남기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시인이자 작가일 것이다. 윤동주와 김유정의 시와 소설은 시간을 견디고 살아남아 혼란의 시기, 영웅과 투사와 전쟁의 뒤편에도 여전히 허리띠 졸라매고 살아갔던 아버지와 어머니들이, 형제와 자매들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이 역사이다.

 윤동주의 `봄’은 김유정의 소설보다 보는 눈이 맑아서 처연하다. 봄이 혈관 속에 시내처럼 흐른다. 젊기에 흐르고 봄이라서 흐른다. 삼동을 참아온 윤동주의 소원은 풀포기처럼 피어나는 것이다. 개나리, 진달래, 노란 배추꽃, 이 산 저 산에 울긋불긋 꽃들 번지는데, 풀포기처럼 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풀은 질기다. 고운 것을 찾는 인간의 눈에야 쓸모없겠으나 베어져 소의 한 끼 식사인 꼴이 되고, 두엄에 섞여 구수한 내 폴폴 나는 거름이 된다. 풀이 되기를 바랐던 윤동주의 마음은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되 가장 숭고하기를 바랐던 별을 쫓는 소년의 눈매를 하고 있다. 우물의 시인, 거울의 시인.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 가만히 들여다보다 말갛게 비친 제 얼굴, 사나이를 미워하며 돌아서는 시인의 눈은 현미경의 눈이다. 마음 깊숙이까지, 무의식의 심연까지 들여다보려는 현미경의 눈. 도저한 자아 성찰. 김유정의 눈은 망원경의 눈이다. 일제강점기 민초들의 삶을 낱낱이 들여다보면서도 웃음과 유머라는 코드를 놓지 않았던 포용의 눈. 생각한다, 나는 현미경을 가진 사람인가. 망원경을 가진 사람인가. 깊이 파고들되 사랑을 잃지 말라. 높이 지향하되 현실의 리얼리티를 잃지 말라. 3월, 김유정과 윤동주가 봄이 되어 속삭인다.

박혜진 <지혜의숲 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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