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간들은, 수천 년 동안 완벽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고 현재의 우리 사회는 경쟁을 기반으로 성장해간다. 경쟁의 범위는 여러 가지다. 최소로는 자신을 이겨내기 위한 나 자신과의 경쟁이 있고 가장 크게 보면 나라끼리의 경쟁이 있다.

 우린 어떻게든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상상할 수도 없는 노력을 한다. 상상할 수도 없는 노력으로 이기려하기 때문에 결국 서로는 상처를 입는다. 이것이 바로 위험사회로 나타난다.

 치열하게 경쟁하는 이 사회에서 ‘자신의 능력으로는 해결이 안 된다’는 판단이 선 인간들은 결국 악을 행하게 되고 그것들이 우리 일상 주변의 위험으로 나타난다. 이것을 이르는 용어들이 작으면 반칙 크면 나라끼리 일으키는 전쟁이다. 과연 우리는 이런 상황을 만들기 위해 수천 년을 문화와 문명을 갈고 닦으면서 발전해 왔는가?

 지금의 우리 사회는, 평등한 사회라는 포장지로 포장돼 있는 야생이다.

 서로가 원하는 걸 쟁취하기 위해 별짓을 다하고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들에게는 큰 상처만 남겨 준 채 치료는 해주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불공정이 법으로 해결되었다고 하지만 요즘 사회를 바라보아라,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법치사회인가? 그렇다면 왜 사회는 계속해서 문제가 발생하는가. 현재의 우리는 못 느끼고 있다. 당연한 것부터가 문제라는 것을. 우리 인간은 남에게 무시당하는 걸 싫어한다. 알면서도 서로를 평가하여 기준을 만들고 인간을 성과로 분류한다. 분류 자체가 사람들을 무시하는 기준이 된다는 걸 알면서도 모른체 한다. 시험이란 것이 당연해 보일지라도 악의 발단이란 생각을 해본적은 없는가? 우린 태어나서 완전한 가치관이 정해지기도 전부터 평가를 받고 평가에 익숙해진다. 배움과 학습을 목적으로 다니는 학교에서부터. 평가에 의해서 인생이 정해진다고 듣는다. 왜 남이 만든 질문과 답에 따라 우리 인생이 정해져야 하는가? 가치관이 성립되지 않은 어린아이들을 상대로, ‘네가 이렇게 하면 나중에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어.’ 달콤한 속삼임을 듣고, 자연스럽게 친구들을 적으로 만들어 가도록,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게 당연했던 듯이.

 사람들은 사회가 이기적인 야생보다 평등하다고 말한다. 야생과 우리 사회를 비교해보자.

 야생에서는 물리적인 힘이 모든 것을 압도한다. 인간은 이것이 공평하지 않다는 걸 알았기에 법을 만들었다. 그리고 물리적인 것으로 등급을 매기는 대신 정신적 수준이라는 걸 만들어 등급을 매기기 시작했다. 왜 정신적 가치로 등급을 매기는 게 평등한가?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태어날 때부터 똑같은 재능과 지능을 가지고 태어나는가? 어째서 지능이 선천적으로 남들보다 떨어진 사람은 뛰어난 사람들보다 더욱 많고 더욱 고통스러운 노력을 해야 하는가? 이것은 공평도 공정도 아니다. 우리는 지금 문명이라는 이름의 ‘야생’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 봐야한다.

이명규(광주 장덕중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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