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은 강력한 정치적 도구다

▲ 볼프강 쉬벨부쉬.

 “담배와 커피가 17세기 이래 특히 정신적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양자의 효과는 서로 이상스런 모순 관계에 있다. 담배는 안정시키고 커피는 자극을 준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이 대립되는 속성들이 서로 배척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이다. 담배와 커피는 서로 보충적이다. 양자를 사용하는 공동 목표는 정신적 노동을 우위에 두고 인체의 기관을 재조정하는 것이다. 두뇌는 부르주아 문화가 인체 중 가장 관심을 갖는 부분이다. 17세기와 18세기에 이 부분만 발전되고 보살핌을 받았다. 신체의 나머지 부분은 머리의 받침으로서, 필요악으로서 기여한다. 머리를 이러한 목적으로 새로 정비하는 과제를 커피와 담배가 각각 독특한 방식으로 떠맡는다. 커피는 두뇌의 자극 수단이자 영양분으로서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담배는 나머지 신체를 안정시킴으로써, 즉 앉아서 하는 정신적 활동에 필요한 만큼 최소한으로 운동을 줄임으로써,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정신적으로 노동하는 인간은 기능을 상실하게 된, 그리하여 역기능적으로 된 신체 에너지를 흡연을 통해서 진정시킨다. 부르주아 이전 시대의 인간은 그러한 에너지를 사냥이나 무술 겨루기 등의 신체적 노동을 통해서 방출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흡연은 대용 행동이다.” -본문 中

 17~18세기 부르주아 사회는 육체노동보다 정신노동을 우위에 두었습니다. 이에 따라 정신을 맑게 해주는 커피는 이성을 증진시키는 음료로서 각광받았습니다. 반면에 담배는 육체가 가진 에너지 중 정신노동에 필요한 최소한의 에너지만 남긴 채 나머지 에너지를 소멸시키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오늘날의 사무직들 또한 업무에 지친 자신을 달래기 위해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웁니다.

 스트레스로 인해 복잡해진 두뇌를 커피로 각성시키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닌 원초적 운동에너지를 담배로 소모시켜 스스로를 일에 가둡니다.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대신 잠을 자거나 운동을 한다면 더 좋을 것 같지만 현실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산업화 과정서 생필품으로 기능

 

 커피와 담배를 비롯해 수많은 기호품들이 산업화를 통해 생필품으로 전락했습니다. 여기서 산업화란 ‘빠른 생산, 빠른 소비’를 의미합니다. 17~18세기에는 커피를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려면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담배를 예로 들자면, 담배를 피우기 위해서는 담뱃잎을 썰고, 썬 담뱃잎을 파이프에 채운 후 불을 만들어 파이프에 채운 담뱃잎에 붙여야 했습니다. 담배를 피우기까지의 과정에서 그나마 여유를 가지며 쉴 수 있었습니다.

 물론 앞서 말했듯이 커피와 담배가 몸에 부자연스러운 화학작용을 일으키기에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것을 진정한 의미에서의 휴식이라 말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이제는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이는데 10초도 걸리지 않습니다. 과거와 같이 시간적인 여유를 가질 수 없기에 요즘의 담배 피우기나 커피 마시기는 본래 그것들이 가졌던 기호품으로서의 지위에서 일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생필품으로 전락한 것 같습니다.

 “노동이 끝난 노동자는 피곤해 손발이 늘어진 채로 집으로 돌아온다. 그는 눅눅하고 음울한, 그리고 깨끗하지 못한, 안락함이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자신의 집을 다시 본다. 그는 기분을 전환시킬 수 있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에게 내일에 대한 전망을 어느 정도는 견딜 수 있게 만드는, 수고를 할 만한 가치가 있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 이미 건강하지 못한 상태, 즉 소화불량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긴장된, 불쾌한, 우울증에 빠진 그의 여타의 생활 여건, 생계의 불안정성, 있을 수 있는 모든 우연한 사고들에 휘둘림, 그의 처지를 안전하게 하기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 등으로 인해서 참을 수 없을 정도로까지 끓어오른다. 오염된 공기와 저질의 음식으로 허약해진 그의 육체는 강제로 밖으로부터 자극 받기를 원한다. 그의 사교적인 욕구는 오직 술집에서 충족될 수 있고, 그가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라고는 물론 아무데도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모든 상황들에도 불구하고 노동자가 음주벽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어야 하는가?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이러한 상황에서는 대단히 많은 수의 노동자들이 음주벽에 빠질 수밖에 없는 도덕적 심리적 필연성이 존재한다.” -프리드리히 엥겔스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카를 카우츠기와 같은 이론가들은 노동자들이 술집에 가는 것은 힘든 현실을 버티기 위한 자연스러운 행위이며 노동자들을 조직해 정치적 변화를 꽤하려면 노동자들을 만나러 술집에 가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빅토르 아들러와 같은 사회주의적 금주론자들은 노동자들이 알코올과 술집을 일체 거부해야 생활이 나아진다고 주장했습니다.

 어떤 입장이 더 바람직한 것인지 아직까지도 확실하지 않지만 노동의 고단함을 잊기 위해서는 가끔 술에 의지하는 것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때문에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곳에서 자신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학습과 활동 그리고 그러한 행위(노동운동)를 조직화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루 8시간 노동, 주 5일제 근무, 최저임금 보장 등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권리들이 과거의 노동자들에게는 이상이었습니다.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나선 이들의 피와 땀 위에서 우리의 권리가 싹텄음을 명심해야합니다.

 

 계급의식에 대한 착각은 공허함으로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철저하게 계급이 나누어진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이 계급은 경제력에 의해 나뉩니다. 하지만 우리는 경제력에 의해 나뉜 자신의 계급을 자꾸 왜곡해서 보려고 합니다. 한 달 수입은 200만 원인데 씀씀이나 소유하려는 상품은 수입이 500만 원인 사람의 그것처럼 행동하려 합니다. 빚을 내서 외제차와 명품을 구입하고 이를 통해 자신이 좀 더 나은 계급으로 살고 있다고 착각하며 만족합니다.

 착각은 착각일 뿐입니다.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계급을 냉정하게 보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즉 제대로 된 계급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 후 계급을 없애기 위해 투쟁을 하든지, 더 높은 계급으로 올라가기 위해 이기적으로 노력하든지 해야지 계급에 대한 착각에 빠져있는 것은 기업들에게 좋은 일만 시키는 꼴이 됩니다. 자신의 능력을 초과해서 소비를 하더라도 만족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것도 갖고 싶고, 저것도 갖고 싶은 공허함에 빠지는 이유는 계급의식에 대한 착각에서 비롯합니다.

 “브랜디는 전통적인 음주 문화에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전통적인 음주 문화는 유기적인 성분의 알코올 음료라고 할 수 있는 포도주와 맥주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이 술들의 알코올 함유량은 그 원료가 되는 식물의 설탕 함유량과 동일한 비율이다. 브랜디는 이 자연의 굴레를 벗어 버렸다. 브랜디는 증류를 통해서 제조됨으로써 알코올 함유량을 자연의 경계를 훨씬 넘는 데까지 끌어올렸다. (중략) 브랜디는 술에 급속화 과정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다른 부문에서의 근대적인 것들의 급속화 과정들과 내면적으로 연결돼 있다. 알코올의 농도가 전통적인 맥주에 비해 10배가 된다는 것은 이제 사람이 지금까지 필요했던 알코올음료의 10분의 1양만 가지고도 취할 수 있다는 것, 또는 지금까지 필요했던 시간의 10분의 1만 가지고도 만취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본문 中

 유럽에서 술이라 함은 전통적으로 맥주와 포도주를 의미했습니다. 하지만 17세기부터 맥주와 포도주보다 훨씬 독한 브랜디가 맥주와 포도주의 자리를 대체합니다. 적은 양으로도 쉽게 취할 수 있기 때문에 가난한 노동자들은 브랜디를 선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고용주들의 입장에서도 노동자들이 브랜드를 마시면 쉽게 취해서 이른 시간에 자기 때문에 다음날 업무에 지장을 주지 않는 술이라며 환영했을 것입니다.

 

 브랜디 전염병, 가공할만한 사회적 재난

 

 “브랜디 전염병이 ‘가공할 만한 정도의 사회적 재난’ 이라고 불렸던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이 시대 수많은 대중의 음주벽에는 단지 하나의 다른 사회적 재난이 반영되고 있다.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로 이농(離農)이라고 칭한 것, 즉 소위 엔클로저 운동(이것도 대토지 소유자들에 의한 토지 몰수를 미화하는 단어이다)으로 인하여 모든 농촌 주민들이 그들의 조상 대대로 내려온 토지에서 추방된 것이 브랜디 전염병의 배후 원인이거나 혹은 그보다는 배양소를 마련했다. 뿌리가 뽑힌 대중들은 도시로 밀려들었다. 그들은 지극히 낯선 세계에 내버려졌다. 전통적인 자기 이해, 과거의 규범과 삶의 형태는 앞으로 더는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 전반적인 방향감각의 상실이 그 결과였다. 브랜디를 마심으로써 이 견디기 어려운 삶의 상황을 최소한 잠시만이라도 잊어버릴 수 있어야만 했다. 브랜디가 제공했던 것은 사회적인 도취가 아니라 알코올에 의한 마비였다. 이와 함께 고독한 음주, 산업화된 유럽과 아메리카에 한정된 음주의 한 형태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에 반해 모든 다른 시대와 문화들에서 음주는 집단적이었다.” -본문 中

 16세기 영국에서는 모직물 공업의 발달로 양털 값이 폭등했습니다. 지주들이 자신의 수입을 늘리기 위하여 농경지를 양을 방목하는 목장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를 ‘엔클로저 운동’이라고 합니다. 농사지을 땅을 잃어버린 가난한 농부들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 도시로 갑니다. 덕분에 고용주들은 싼 값의 노동자를 얻습니다. 고향을 잃은 상실감, 낯선 도시생활, 과도한 노동과 저임금을 견디기 위해 쫓겨온 이들(노동자들)은 독한 브랜드를 마시며 잠시나마 현실을 잊었습니다.

 유럽에서의 브랜디 대중화에는 이처럼 노동자들의 고달픈 삶의 역사가 담겨있습니다. 제사를 지내거나 축제 시 함께 모여 넉넉하게 시간을 두고 즐겁게 마시던 술이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고통을 잊고 힘겨운 현실을 버티게 하는 마취제로 탈바꿈 했습니다.

 한국도 산업화를 거치면서 전통주 대신 희석식 소주가 대중의 술로 자리 잡았습니다. 소주는 본래 전통주입니다. 쌀을 원료로 끓여서 만든 증류식 소주가 한국의 전통주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흔하게 접하는 소주는 알코올에 물을 섞어 만드는 희석식 소주입니다. 증류식 소주는 맛도 좋고 숙취도 적지만 싸지 않습니다. 반면, 희석식 소주는 가벼운 맛에 숙취도 심하지만 저렴합니다.

 

 술에 담긴 노동자들 고달픈 삶

 

 소주(희석식 소주)는 좋게 말하면 노동자들의 애환을 달래주는 술이고, 나쁘게 말하면 부당한 노동 구조를 바꾸는 원동력을 마비시키는 정치적인 도구입니다. 저임금에 과도한 노동이 반복되는 구조를 바꾸려면 앞서 말했듯이 맑은 정신으로 현재를 직시해야 합니다. 하지만 술은 현재를 직시할 힘을 앗아갑니다. 현재의 고통을 잠시 잊게 할 뿐입니다. 다른 생필품에 비해 소주 값의 인상이 더딘 이유도 소주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참○○’은 약 1조 93억 원의 매출을 올렸습니다. 1년간 성인 1명당 42병의 참○○를 마신 꼴입니다. 그런데 어디 소주가 참○○ 뿐입니까. 우리는 참 많은 양의 술을 마시고 있습니다. 하지만 술에 담긴 정치적 의도와 노동자들의 고달픈 삶의 역사는 알지 못합니다. 자연스럽게 형성된 음주문화 같지만 ‘기호품의 역사’를 통해 보셨다시피 그 어떤 문화도 저절로 형성되지 않습니다.

 문화는 ‘특정한 세력’이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형성합니다. 지난번 글에서 말씀 드린 커피문화 그리고 오늘 말씀드린 담배문화, 음주문화 등 문화는 모두 특정한 세력의 특정한 목적에 의해 생성, 변천됩니다. 그리고 그 특정한 세력은 대게 지배세력이거나 지배세력에 기생하며 이윤을 추구하려는 세력입니다.

 내일이면 그 ‘특정한 세력’을 우리 손으로 뽑게 됩니다. 어떤 문화 속에 살 것인지는 결국 우리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투표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김태균<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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