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 왼쪽부터 르네 마그리트 `위대한 가족’, 르네 마그리트 `아른하임의 영역’, 르네 마그리트.

 모든 꽃들이 시들 듯이

 청춘이 나이에 굴복하듯이

 생의 모든 과정과 지혜와 깨달음도

 그때그때 피었다 지는 꽃처럼 영원하진 않으리.

 삶이 부르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음은 슬퍼하지 않고

 새로운 문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도록

 이별과 재출발의 각오를 해야만 한다.

 무릇 모든 시작에는

 신비한 힘이 깃들어있어

 그것이 우리를 지키고 살아가는데 도움을 준다.

 우리는 공간들을 하나씩 지나가야 한다.

 어디에도 고향인 듯 매달려서는 안 된다.

 우주의 정신은 우리를 붙잡아두거나 구속하지 않고

 우리를 한 단계씩 높이며 넓히려 한다.

 여행을 떠날 각오가 되어있는 자만이

 자기를 묶고 있는 습관의 마비에서 벗어나리라.

 그러면 임종의 순간에도 새로운 공간을 향해 즐겁게 출발할 수 있을지니.

 우리를 부르는 생의 외침은 결코 그치지 않으리.

 그러면 좋아, 마음이여

 작별을 고하고 건강하여라.

 - 헤르만 헤세 `유리알 유희’ 중 요제프 크네이트의 시 `단계’

 

 사춘기의 헤세 앓이

 

 매미소리가 폭포처럼 흐르는 7월의 한낮이었다. 점심시간이 끝난 5교시 국어시간, 나의 내면에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 있었다. 세상이 더 없이 고요하였다. 칠판도 지워지고, 선생님의 목소리도 지워지고, 몰려드는 식곤증도 없었다. 의식은 명징하고, 마음은 더할 나위 없이 맑았다. 그야말로 자체 충만, 나를 구분 짓던 다른 것들의 경계가 지워졌다.

 어슬렁어슬렁 도서관에서 집어온 책 한 권 때문이었다. 선생님이 들어오시고 판서가 시작된 후에도 나는 책을 덮지 못했다. 물론 황홀한 몰입의 시간은 수업을 얼마 안남기고 끝이 났다. 나의 담임, 그러니까 국어선생님께서 어느새 순간이동을 하신건지 교과서 아래 순결하게 감춰졌던 책을 `홱’ 낚아채 가셨기 때문이다. 나의 마음을 헤세가 낚아채 갔듯이. 그렇게 나의 헤세 앓이는 시작됐다. 마음에 드는 책을 만나면 그 작가의 다른 책들까지 두루 찾아 읽는 성미는 아무래도 그 때 생긴 것이 틀림없다. 데미안을 시작으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황야의 이리, 크눌프, 수레바퀴 아래서, 싯다르타, 유리알 유희 등을 읽었다. 책속의 무수한 그들 덕에 친구는 적었지만 외롭지 않았다. 말하지 않고도 말하는 법을 배웠다. 책속 인물들과의 대화에는 소리가 필요 없었다. 화장실을 갈 때도 팔짱을 끼고 가는 친한 사이들을 바라보며, 사람 사이의 관계와 우정의 정체가 궁금할 때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읽었다. 그저 생각만 해도 통하는, 그러나 극단적으로 다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게서 내가 배운 건 환대였다. 당신이 나의 자리로 올 때 그 자리를 기꺼이 내주는 것이 우정이며, 그것이 우리가 본질적으로는 서로에게 타자임에도 불구하고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갈 수 있는 이유다. 환대는 이해함 없이 인정하는 사랑의 본질이다.

 그리고 그 세계로 들어가서 살고 싶었던 유리알 유희! “모든 시작에는 이상한 힘이 깃들어있어 우리를 살아가도록 지켜주고 도와준다.”는 문장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나를 일어나게 하고 학교에 가게하고 밥 먹게 하는 힘이 되었다. 나의 사춘기는 헤세라는 나룻배를 타고 흘러갔다.

 

 데미안이 준 선물

 데미안이 나에게 준 첫 번째 선물은 삶의 무의미를 견디는 힘이었던 것 같다. 무의미란 의미 없음이 아니라 아직 의미를 파악하거나 부여하지 못했음의 다른 이름이라는 믿음을 갖게 된 것도 데미안을 통해서다. 그렇다면 내 안의 혼란과 혼동을 즐기거나 견디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무질서, 혹은 의미 없음은 아직 밝히지 못한 질서의 또 다른 이름인 뿐인걸. 왜 공부하는지 왜 먹는지 왜 사는지 당장 모르겠는 건 내가 아직 자라고 있기 때문일 터, 터벅터벅 걷다보면 어느새 집에 와있듯 질문에 대한 대답에 이르게 되리.

 사람은 제 삶의 의미를 찾아야 살아갈 수 있는 존재다. 그래서 여전히 왜 사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고 고려한다. 인간의 존재의미와 인간이 이룩해낸 이 거대한 문명의 의미를 묵고 답하는 종교와 철학은 그래서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고 제 밥벌이를 할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믿는, 혹은 삶에서 의미를 찾아야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인간의 태도에는 이상한 맹목성이 있다. 동물이 의미를 묻는가. 인간을 제외한 동물들은 자족적이다. 고통이 오면 컹컹 짖고, 이길 수 없으면 견딘다. 기쁘면 순순히 웃고, 죽음이 오면 담담히 제 숨을 거둔다. 현재에 온전히 머무르는 것이 동물의 생의 방식. 생각해보면, 태어났으니까 사는 것인걸. 살아야하는 것인걸. 그것이 내게 부여된 목적이자 실존인걸. 그런데도 10대의 나는 간절히 삶의 의미를 찾았다. 왜 태어났는지, 어떻게 살아야할지 알고 싶었다. 교회를 다녔고, 성당에 찾아가 사제관에 계신 신부님께도 물었다. 스님을 찾지 않은 이유는 내가 살던 도시 어디쯤 절이 있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데미안을 읽은 후 나는 밖에서 진리를 찾기를 그만 두었다. 인간이 어떠해야한다는 지침 같은 건 애당초 없다는 걸, 있다고 해도 그것은 도리어 나를 가두는 알의 껍질과 같아서 언젠가는 벗고 나와야 하는 것임을 싱클레어의 방황이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나의 존재의미는 삶 전체를 통해, 오직 내가 나 자신에게 증명해 보여야 하는 것. 오늘, 데미안을 읽은 아이들은 더 강하고 더 외롭다. 자기로 있기 때문일 것이다.

 두 번째 데미안이 내게 가르친 두 번째는 몰입력이었다. 책을 좋아하는 아이들을 보면 몰입력이 대단하다. 책에서 얻는 지식과 정보는, 독서를 통해 아이가 얻게 되는 몰입하는 습관과 태도에 비하면 부차적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사람들이 행복한 상태라고 부르는 경험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고 지적한다. 너무나 어떤 일에 몰입하여 시간마저 잊은 느낌, 행위자와 행위의 경계가 사라져 행동과 의식이 일체가 되는 플로우(Flow) 즉 몰입이라는 공통점이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 불러도 듣지 못하는 아이들은 플로우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사회적 공헌이든 개인적 성공이든, 창조성과 생산성의 바탕에는 플로우가 있다. 몰입해본 아이들은 `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되어가는 상태’인 플로우를 그렇지 않은 아이들보다 점점 더 자주 경험한다. 행복하기 때문이다. 책은 시간을 지우고, 공간을 지우고, 나아가 집중을 방해하는 자잘한 의식들-덜 중요한 일들-을 지우고 눈앞의 과제에 집중하게 하는 소중한 습관을 선물했다. 물론 “빨리빨리 읽어라.”고 채근하지 않았던 어른들께, 데미안을 빼앗지 않고 돌려주셨던 담임선생님의 아량과 미덕에 감사한다.

 세 번째 데미안은 내게 불온성을 가르쳤다. 불온성이란 기존의 가치를 그냥 받아들이지 않고 이렇게 저렇게 따져보고 상상해보려는 의심과 의문의 능력이다. 교회에서 싱클레어를 만난 데미안은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자기 관점으로 다시 보도록 재해석해 들려준다. 가인의 이마에 새겨진 표적은 하나님의 징벌이 아니라 그에게 있었던 어떤 비범함, 꿋꿋함, 일종의 힘과 능력을 나타내는 상징이 아니었을까? 가인처럼 될 수 없어 두려움을 느낀 사람들이 그를 멀리하고자 만들어낸 속임수가 바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아닐까. 언제나 싱클레어, 너의 눈으로 보고 생각하는 법을 익혀야만해. 그것이 우리가 신을 닮았다는 증거야.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알을 깨고 나온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새의 이름은 아브락사스.” 데미안을 읽지않은 사람도 한번은 들어봤음직한 문장에 등장하는 아브락사스는 영지주의자들의 신으로 인류의 창조자, 보호자이면서 동시에 하늘에 있는 더 높은 차원의 세상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매개자이다. <해리포터>에서 가장 강력한 주술이자 주문인 “아브라카다브라!”는 아브락사스를 소환하는 주문이다. 이 주문을 맞고도 살아남은 아이가 바로 해리 포터로 그 증거로 이마에 번개모양 표적이 남은 것이다. 알은 내가 담겨있는 안전한 관성과 관습의 세계. 알을 깨고 나올 때마다 정신의 이마엔 해리포터와 같은 표적이 남고, 의식과 의지의 양 날개는 크고 튼튼해질 것이다. 헤세의 말처럼 그렇게 우리는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것이다. `완성에 이르는 길’은 `자기 자신에 이르는 길’에 다름 아니다.

박혜진 <지혜의숲 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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