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안읍성마을

▲ 어깨동무하듯 둘러싼 뒷산의 능선처럼 완만한 곡선으로 올망졸망 무리지어 있는 초가지붕의 물결. 현재진행형 삶의 터전인 낙안읍성마을.
 <조선 초가집 집웅이 역시 정다운 것이 알어진다. 한데 옹기종기 마을을 이루어 사는 것이 암탉 둥저리처럼 다스운 것이 아닐가.>(정지용 수필 ‘화문행각(畵文行脚)’ 중)

 ‘옹기종기’란 이렇게 이마를 맞댄 지붕들의 풍경에 가장 어울리는 말일 터.

 어깨동무하듯 둘러싼 뒷산의 능선처럼 완만한 곡선으로 올망졸망 무리지어 있는 초가지붕의 물결을 본다.

 대지와 사람이 두루 평안하다는 ‘낙토민안’(樂土民安)에서 유래된 마을 이름 ‘낙안’(樂安).

 

 해마다 옷 한 벌씩 새로 해 입히는 지붕

 ‘초가삼간’이라 하였던가. ‘작고 초라한’이 아니라, 지나친 욕심을 내려놓은 지혜로 다가오는 공간. 어느 집을 들여다보아도 정갈하다. 반드시 있어야 할 것만 적재적소에 정갈하게 배치되어 있다. 물질이 차고 넘치는 요즘 시대에 유행처럼 떠오른 미니멀리즘을 이미 생색없이 구현했다 할까.

 짚단을 실은 경운기가 탈탈탈탈 지나가는데 양쪽 담벼락에 닿을 듯 고샅이 꽉 찬다. 3대째 탯자리를 지키고 사는 강영철(70) 어르신이다. 경운기에서 내리는 것은 내년에 이 집 지붕이 될 짚날개다.

 “그 해에 바로 이슬라문 그때는 딱 추수철이라 바뻐. 일손이 없어. 농한기에 영꺼(엮어)논 것을 미리 쟁개놔.”

 낙안 근동에 짚을 엮어서 파는 농가들이 있다.

 “기계로 훌트고 놔둔 짚단을 그대로 사와서 영끄문 싸. 근디 손틈이 없어. 짚단째 뭉꺼갖고 가져올라문 힘들고.”

 마을 주민들 대부분이 70, 80대다. 농사만으로도 벅차다.

 짚날개 한 장에 1만7천원쯤 한다. 웬만한 초가지붕 하나에는 70∼80장이 필요하다. 큰 지붕은 150장도 들어간다.

 “한 사람이 하루에 15장이나 영꺼. 하래 품삯이 11만원이래. 근디 젊은 사람들은 누가 헐라고도 안해. 기계로도 못허고.”

 마당 가운데 짚날개를 탑처럼 쌓은 것을 짚벼늘, 날개벼늘이라 한다.

 볏짚 한 올은 연약하기 이를 데 없다. 툭 끊어지고 잘 썩는데 다 길어야 어른 키의 반에도 못 미치는 그 지푸라기를 모아 지붕을 만들 궁리를 하였다. 먼 데서 구해오는 귀한 것이 아니라 추수 뒤 들판에 흔전만전한 그것을 지붕재로 채택한 것. 전에 나락은 지붕 잇기에 좋았다.

 “자꼬 씨러진다고 품종 개량이 되고부텀 나락이 키가 적어. 전에 손으로 빌 때는 대를 질게 빈디 지금은 기계로 빈께 키가 짤롸져(짧아져). 옛날에 짚 날개를 한 30장 썼다믄 지금은 한 50장 가져야 돼. 전에는 대가 싱싱해. 인자 콤바인으로 훌터분께 기계가 물고 들어감서 대를 막 쳐불어. 대가 힘이 없고 기양 썩어불어.”

 개량이나 기계화는 시대에서 한발 물러선 초가지붕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붕은 1년에 한 번씩은 꼭 인다. 때는 추수 후 10월 중순부터 12월 사이. 그냥 두면 장마가 지난 후에 썩게 된다.

 “물 들어간 데로 골이 옴폭 파여. 그것을 띠어내고 때와갖고 덮어. 너머 뚜꺼문(두꺼우면) 걷어내. 한 벌 두 벌 정도 걷어내. 문지(먼지)는 펄펄 나고 보통 일이 아녀.”

 강영철 어르신댁 안채는 짚날개 옷을 20벌쯤은 껴입고 계신다 한다. 제일 아래 바닥은 20년 전에 올린 것이다.

 

 “젤 우에다 곱게 야무지게 딴 날개를 올려”

 지붕 이는 일은 아무나 하지 못한다. 잘 이는 기술자는 매해 초겨울에 작업일정이 죽 잡혀 있다. 물매를 잡는 것부터가 만만치 않다. 물매가 급하면 바람과 면하는 면이 넓어지고 물매가 느리면 빗물이 잘 흘러내리지 않아 썩기 쉽다.

 짚날개를 돌리고 나면 그 위에 낭창낭창 탄력이 있는 ‘지새미대’를 둘러 고정한다.

 “야물게 해야제 깐딱허문 날개가 흘러내려.”

 이 모든 작업을 지붕 위에서 한다. 해가 갈수록 지붕 몰랑으로 올라서는 마을 할배들의 나이는 많아진다.

 “밖에서 놉을 사와야 포도시 허제. 마을에도 이슬 줄 아는 사람이 몇 있긴 있어. 애릴 때부터 보고 컸고, 자꼬 허다 보니까 허는 것이제만 손기술이 있다고 해도 무장 심들어. 지붕이 올라가서 보문 솔찬히 까퍼(가팔라). 해마다 이스고 그 우로 또 이스고 허다본께 까퍼져. 걸어댕기들 못해. 아조 오래 된 것은 올라가문 벌벌 떨려서 내려다보도 못해.”

 바람에 지붕이 헝크러지지 않도록 새끼줄(‘고사새끼’라 한다)로 바둑판 모양으로 야물게 둘러매고 나면 지붕 잇기의 화룡정점인 용모름(용마름)을 올린다.

 “젤 우에다 곱게 야무지게 딴 날개를 올려. 그것이 깡깡허고 딴딴해야제 능성능성 물렁물렁허문 안되야.”

 처마에 들쭉날쭉한 짚올을 참빗으로 빗질하듯 가지런하게 맞추어 지스락(기스락)을 자르는 것이 대장정의 마무리였다.

 “초가지붕 이스고 나문 올해 일 다했다 했제. 눈도 훤하고 맘도 훤하고. 그날 밤에는 참 훈훈허다고 험서 애기들 잠잔 얼굴을 딜다봤제.”

 해마다 옷 한 벌씩을 새로 해 입히는 지붕. 새로 이어 성성했을 때는 당당하게 새맛을 풍기고, 시간이 흐르면 비바람과 햇볕에 숨을 죽여 다소곳한 겸양의 미덕이 빛나는 지붕.

 이 나라 고샅고샅에 머리를 대고 있던 초가지붕이 사라진 것은 1960년대부터다. 1967년 5월26일자 경향신문 기사에 따르면 <농어촌 초가지붕을 앞으로 10년내 현대화하기 위한 농어촌지붕개량촉진법 시행령에 따라 농어촌의 초가지붕을 암석 시멘트 및 슬레이트로 대치하기 위해 농가 1호당 개량소요액의 50%인 1만원을 연 9%로 융자해 주기로 했다. 1백30만 농가 중 이미 40만호의 지붕을 개량했고 나머지 90만호를 매년 9만호씩 개량한다는 계획>이 추진된 것이다.

 새마을운동과 함께 시작된 지붕개량의 열기 속에 초가가 급속히 사라져갔지만 낙안마을 주민 상당수는 슬레이트나 기와로 지붕 개량을 할 만큼 형편이 넉넉지 못했다. 시멘트 보수를 한 집이 일부 있긴 하였으나 ‘복원이 용이하다’는 평가를 받아 ‘전남 승주군 낙안면 낙안마을’은 1983년 사적 302호로 지정되었다.

 낙안읍성 복원계획이 발표됐을 때 주민들은 옛 생활로 돌아가는 것은 문화적 후퇴이며 관광객의 구경거리가 될 수 없다고 완강히 반대했다. 그러나 당시 이진희 문공부 장관이 이곳의 집 한 채가 서울의 빌딩 한 채와 맞먹게 될 것이라며 주민들을 설득했다고 한다.

 

 인정도 옛사람의 다수운 속내 그대로

 남내리 마을회관 토방엔 할매들 신발이 오순도순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점심상을 마악 물린 할매들이 밥때를 놓친 사람들을 짠해 하며 누룽지를 끓여 차린 밥상 앞에 숟가락을 쥐어준다.

 성가실 정도로 외지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관광지에서 여전히 오늘 내 앞에 온 그 사람에게 기꺼이 귀인(貴人)이 되어주는 인정이다. ‘울고 왔다 웃고 간다’는 낙안마을. 지붕만 옛 지붕이 아니라 인정도 옛사람의 다수운 속내 그대로다.

 “초가집으로 시집와갖고 초가집에서 늙으요.”

 한평생 초가지붕 아래 삶이었노라는 김춘희(71) 할매.

 “평생 지와집 한번 못살았어. 긍께 원이 되제.”

 인위적으로 조성된 박제된 민속촌이 아니라 400년 넘는 세월과 생활의 때가 자연스레 묻어 있는데다 전선을 모두 땅에 묻고 두꺼비집 등 전기시설도 모두 집 뒤쪽으로 옮긴 낙안읍성 마을은 1990년 즈음부터 TV드라마와 영화 등의 촬영지로 각광받았다.

 “배우들도 겁나 많이 와. 젊었을 직에는 굿 본다고 많이 갔어. 옆에 섰다가 엑스트라로 출연도 많이 허고.”

 유우순(82) 할매도 하루 품삯 3만원씩을 받고 엑스트라 배우 노릇을 솔찬히 했다.

 “우리는 딱 한복 입고 낭자허고 수건 씨고 따라댕기제. 뭐 짊어지고 이리 가라 글문 이리 가고, 저그서 오라 글문 저그서 오고. 근디 영화 어디에 나온지 자식도 못 알아봐, 하하.”

 동네 남자들은 패랭이에 짚신을 신고 수염을 붙이고 사극 속의 장꾼이나 행인으로 분장해 촬영 순서를 기다리기 일쑤였다.

 사진 찍는 사람들의 발길이 일년 열두 달 이어지는 곳이니 부지불식간에 모델이 되는 일도 허다하다.

 “콩 타작 허니라고 마당에 앙거서 뚜들고 있으문 서이 너이 와서 한허고 뚜드리라고 그래. 그러문 한허고 뚜들고 있어. 냉정허게 ‘인자 다 뚜 들었으니 가씨요’ 그 소리를 못내놔.”

 구경꾼들이 무시로 내 집 대문을 밀고 들어오고 내 집 마루에 앉아서 쉬었다 가는 마을.

 “대대로 살아온 집이라 사는 것이제, 애로가 많애. 여름으로 옷을 못 벗고 문을 못 열어. ‘들어오지 마세요’ 써붙여 놔도 기언치 들와.”

 사적으로 지정되고부터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이제 우리는 옷도 한복만 입어야 하느냐는 문의에서부터 집을 손도 못대게 하니 며느리를 얻어도 방 한 칸 늘릴 수 없고 어린 딸이 자라 시집갈 나이가 되었어도 한 방을 쓰고 있다는 호소, 수돗물도 끌어들일 수 없고 텔레비전 안테나도 못세우고 방이 낮고 좁아 새로 나온 가구도 가전제품도 못 들여놓는다는 수많은 불편들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을 조율하면서 살아온 세월이다.

 “방이라는 것이 남자어른이 똑바로 못서는 그런 높이라. 옛날 집은 ‘기들고 기날고’ 헌다고 그래. 글케 지붕이 야차왔어. 인자 전에 비하문 높아졌어. 지금은 화장실, 주방 정도는 조금 편리하게 쓸 정도로는 살지. 그래도 조깨만 높이 조깨만 널룹게 허고자운디 그것을 못허지. 쪼끔 편리하게 살자고 까대기라도 댔다 허문 돈을 삭감해.”

 보존관리비라는 명목으로 호당 연간 600만원의 지원비를 받는다. 사생활을 포기하고 불편을 치르는 대가를 돈 얼마로 환산하겠는가.

 “우리가 나가불문 안동이나 제주도 민속마을같이 껍데기뿐이라고 그런께 못 나가고 살제.”

 비가 오면 초가지붕 처마끝에서 떨어지는 ‘지스랑(지스락) 물’. 볏짚이 썩었다치면 그 불그스레헌 ‘썩은새물’을 맞은 옷은 영 물이 안빠진다. 초가지붕을 이고 사는 집마다 짚풀이 썩는 것이 골칫거리.

 “장마철에 볏짚이 썩으면 싸내기라는 벌레가 생겨. 내금이 고약해. 지내만 가도 그 음식은 못 먹어. 전에는 다 그런 고생을 허고 살았어.”

 모두 초가이던 그때 그 시절 신문광고란에 ‘오래가’라는 ‘신제품’이 눈에 띈다. 1963년10월14일자 동아일보 3면 하단 광고다.

 <신발명 단일약제 초가지붕 방부제 ‘오래가’/ 수요가에게 드리는 말씀// 여러분의 이익을 위하여 본 ‘오래가’의 사용을 자신있게 권장중에 있사오니…>

 썩고 새는 초가지붕으로 인한 미담기사도 눈에 띈다.

 <대구 명덕국민교 총각인 김동식 교사는 대명동 27구에서 자취하면서 6년간 줄곧 1학년만 담임, 불우한 아동을 돕고 있는데 작년 2월 자기반 이영태군의 문병차 가정방문했을 때 지붕을 못 이어 비가 새는 것을 보고 봉급을 몽땅 털어 초가를 이어주었다…>(1963년 7월18일자, 동아일보 ‘미스터 미담’ 중 )

 

 낙안마을의 연중 중대사는 변함없이 지붕 잇기

 마천루가 즐비한 21세기, 202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려는 계획에 어쨌든간에 협조를 잘 해야 할 것이라고 입을 모으는 어르신들이 사는 마을. 낙안마을의 연중 중대사는 변함없이 지붕 이기다.

 “김장은 암것도 아녀. 딴동네는 그 고민이 없제.”

 오양례 할매가 털어놓는 낙안 주민의 고충이다.

 택일도 잘 해야 한다.

 “바람 불문 그런 난리가 없어. 지푸라기가 천지사방으로 날리고….”

 혼자서는 도무지 어림도 없는 지붕 이기는 온 마을이 품앗이로 함께 했다. 옛날엔 장정이 없는 과부집이나 홀로 사는 노인집을 필두로 동네의 지붕 이기가 시작되었다. 지붕을 올리는 일은 노동이자 마을공동의 놀이였다.

 “벼늘이 3층이라도 유지뱅이 하나가 제일”이라는 속담을 알려준 신정호(77) 남내리 이장님은 열일곱 살에 아버지를 따라 낙안마을에 들어온 이래 마을을 떠나본 적이 없다. 마을의 노인들을 스승으로 보고 듣고 배운 것이 많다.

 “아무리 밑에서 잘 이어도 유지뱅이(위를 뱅뱅 틀어올린 짚더미) 잘못 덮으문 비가 새불어. 솜씨 따라 터럭 한 끝에도 큰 차이가 있어. 옛날 이야기도 있잖애. 아부지하고 아들이 짚신을 삼아서 장에를 가. 아부지것은 천원을 받은디 아들것은 800원배끼 못 받아. 근디 아부지가 비법을 안 갈쳐줘. 돌아가심서 남긴 말이 ‘털털털털털’ 그러고 가셨어.

 ‘털을 따듬아라’ 그 말씀이여. 아들것은 털이 우수수 곱지 않았던 것이여.”

 그와 마찬가지라 한다.

 “초가지붕은 날개 돌아가는 것이 우푹지푹 울통불퉁 허문 안되야. 매끈허니 민첩해야 해. 처마끝은 일자로 정갈해야제. 내년 이맘때 되문 워넌히 표가 나. 비오고 바람 불 때마다 점점 차이가 생겨. 그것이 공력 차이여.”

 시방 그런 공력을 가진 사람들이 팔십 줄에 들어선 노인들이다. 젊은이들은 다 객지로 나간 마을. 앞으로 또 지붕을 이어야 할 초겨울에 이 지붕에 올라설 사람은 누구일지, 낙안읍성 초가마을의 주인은 누가 될 것인지.

 “지붕 건사하고 살기가 영판 고상이여”라면서도 “지붕 새로 영거 놓고 쳐다보문 아농하니(‘안온’이거나 ‘아늑’일 것이지만 할매의 입말은 그렇게 들린다) 좋아”라고 말하는 이들의 수고와 정성이 있어 그곳의 초가는 오늘 첩첩하고 다숩다.

 

 현재진행형 삶의 터전, 낙안읍성

 성 둘레 1407m, 높이 4m, 너비 3~4m의 낙안읍성(樂安邑城·사적 제302호). 성벽이라는 방어시설을 갖춘 성곽도시이자 조선시대 대표적인 지방계획도시였다. 일반적으로 읍성은 외부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서 산등성이에 축성하는 것이 보통인데 낙안읍성은 평지에 축성된 야성이다. 낙안은 평야가 많아 왜구들의 침략이 매우 극심했기 때문이다.

 1397년(태조6년) 토성으로 축조됐다가 1424년(세종6년) 석성으로 개축됐으며 그후 1626년(인조4년)부터 3년간 이곳에서 군수를 지낸 임경업 장군이 성곽을 중수했다.

 1908년까지 존속했던 낙안군의 중심지로, 주변 지역을 관할하는 지방행정도시였다. 낙안읍성엔 현재 동헌 관아 향교 객사 장터 등이 복원되었으며 초가지붕으로 마을을 이룬 주민들이 삶이 이어지고 있다.

 성내에 100여 세대 230여 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국내 읍성 가운데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됐다. 사립문과 낮은 담을 오가며 텃밭을 가꾸고 집집이 장독대엔 된장이 그득하고 텃밭엔 허리 굽혀 푸성귀를 가꾸는 어매들의 일상이 있는 현재진행형 삶의 터전이다.

글= 남인희·남신희 ‘전라도 닷컴’ 기자/사진=최성욱<다큐감독>



※이 원고는 월간 `전라도닷컴’(062-654-9085)에도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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