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나 보고 있는 거야? 내 얘기 듣고 있어?
나의 눈과 귀, 더디지만 성장하고 있다

▲ 그날 오후, 우리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하찮은 농담만 주고받다 그대로 헤어졌다. 그리고 그 언덕을, 장님 버드나무가 무성한 채로 그냥 방치하고 만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
 B와 나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났지만 친구였다. 세상은 따분한 일투성이었으나, B와 함께일 때면 난 여러모로 즐거웠다. 우리 둘은 언젠가 함께 춘천으로 여행을 갔다. 그때 난 아홉 살이었으므로, 비교적 어른이었던 B가 늘 나를 돌보고 챙겼다.

 우리는 갈 때도 올 때도 기차를 탔다. 일은 돌아오는 기차에서 터졌다. 도착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울리고 우리는 짐을 챙겨 문 앞에 섰다. 기차가 역에 정차하자 문이 열렸다. B가 먼저 내렸다. 날 안아 올려서 내려주기 편하도록. 바로 그 순간 문이 쾅! 하고 닫혔다. 순식간에 나는 기차 안에 홀로 남겨졌다.

 엄청난 공포가 나를 덮쳤다. 나는 기차가 떠나가라 울어대기 시작했다. 온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영원같은 몇 초가 흐르고, 눈앞의 문이 다시 열렸다. 울음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기장 아저씨가 듣고 기차를 다시 세운 것이다. 난 얼른 내렸다. B가 달려와서 날 와락 끌어안았다. 황혼이 붉게 타는 기차역에 서서 우리 둘이 한참을 부둥켜안고 있었다. 나는 서러워서 울었고, B는 미안해서 울었다.

 B와의 추억들 중 대부분이 어렸을 때라, 아무튼 이 일이 가장 또렷하다. 저녁 어스름의 쓸쓸함이 아직도 내 가슴에 멍처럼 남아있다. 내가 열일곱 살 때 B가 죽었다. 발인하던 날 저녁 하늘엔 노을이 지지 않았다. 먹구름 낀 회색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나는, 줄담배 태워 늘 연기가 자욱하던 B의 방을 생각했다.
 
▲아픔을 끌어안고 보듬는 건 어렵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말이야, 전혀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거야. 하지만 그걸 느끼게 되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려. 그렇게 됐을 때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귀마개를 하고 깊은 바다 밑바닥에 잠겨 있는 것처럼 말이야. 그런 상태가 한참 동안이나 계속돼.”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라는 단편소설이다. 주인공에게는 조카가 있다. 조카는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 난청 치료를 받는 조카를 병원에 데려다 주면서 문득 그는 옛날 일을 떠올린다. 친구와 함께 친구의 여자 친구를 병문안 갔던 일. 그때 그녀는 시를 한 편 쓰고 있었다.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에 관한 이야기였다.

 언덕 위에 작은 집이 있다. 그 집에는 한 여자가 자고 있다. 집 주위로 장님 버드나무가 무성하다. 장님 버드나무는 여자를 깊은 잠에 빠뜨린다. 나무에 살고 있는 파리가 꽃가루를 묻혀 귀로 파고들어가 여자를 잠들게 하는 것이다. 파리는 여자의 몸속에 들어가 우적우적 살을 먹는다. 한 남자가 그녀를 구하기 위해 숲을 헤쳐 들어가지만, 여자의 육신은 이미 파리에게 모조리 먹혀버린다.

 “장님 버드나무는 겉으로 보기에는 작지만, 뿌리는 땅속 깊은 곳까지 뻗어 내리고 있어.” 하고 그녀는 설명했다. “실제로 어느 정도 자라면, 장님 버드나무는 더 이상 위로는 뻗어가지 않고, 아래로 아래로만 뻗어가는 거야. 마치 암흑을 양분으로 삼기라도 한 듯 말이야.”

 아픈 곳을 들여다보고 끌어안아주는 일은 어렵고, 힘들고, 귀찮다. 그게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그래서 단물만 쪽쪽 빨고 말겠다고? 이기적이야….’ 누구나 사는 게 외롭고 힘들다. 그래서 내 말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엄청난 위로고 힘이다. 하지만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사랑하는 사람에게조차 이해받지 못한다면? 그 순간 나는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받고 온 우주에 혼자 남겨진다.

 그걸 알면서도 우리는 가끔 재수 없게 구는 것이다. 시니컬한 의사들처럼 비슷한 질문을 하고, 비슷한 검사를 하고, 비슷한 처방을 내린다. 상대의 진심을 알면서도 모른 척 하거나 혹은 아예 관심조차 없다. 말에 뼈를 실어 던져도 물컹한 살만을 발라내 듣는다. 골든타임을 놓친 우리는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 뼈들을 발견한다.
 
▲장님이 암흑천지 세상을 알아가는 법
 
 ‘…그녀는 그의 손가락들과, 그리고 그 손가락들이 자기 얼굴 위에서 어떻게 움직였는지 떠올렸다. 그 시에서 그녀는 그때 자신이 무엇을 느꼈는지, 그 맹인이 코와 입술을 만졌을 때 마음속으로 무엇이 지나갔는지 말하고 있었다.’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 ‘대성당’이다. 주인공의 아내에게는 오랜 친구가 있다. 그는 장님이다. 아내는 책을 읽어주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장님과 친해졌다. 둘은 오랜 시간 우편으로 테이프를 주고받으며 교류해왔다. 장님은 죽은 처의 친척집을 방문하는 길에 오랜만에 그녀의 집을 찾아온다. 남편인 주인공은 그 상황이 달갑지만은 않다. 어쨌든 셋은 밥을 먹고, 쉬고, 대화를 한다.

 TV에 대성당이 나오자 주인공은 장님에게 묻는다. “대성당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감이 있습니까?” 그는 장님이 대성당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장님은 솔직히 모르겠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주인공에게 대성당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지 않겠냐고 제안한다. 주인공은 잘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자 장님이 종이와 볼펜을 가져오라고 한다. 둘은 함께 대성당을 그리기 시작한다. 이윽고 주인공은 생애 가장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놀랍다고 느낀 것은, 장님이 암흑천지인 세상을 더듬더듬 알아가는 법이었다. 그는 일단 귀 기울여 듣는다, 정성껏. 그런 그에게 상대는 마음을 열고 진심을 보여준다. 그는 그렇게 얻어낸 진심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상대를 쉽게 재단하지도 않으며, “저 사람 내가 좀 알아” 하고 뻐겨대지도 않는다. 그런 다음에 장님은 직접 겪어본다. 함께 밥을 먹거나, 대화를 나누고, 얼굴을 만져본다. ‘실은 저 사람, 누구보다 또렷이 보고 있는 게 아닐까.’

 ‘사랑하는 사람의 눈 속에 비친 자신을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여인을 상상해보라 … 그녀의 마지막 생각은 이랬을 테지. 이 사람은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데 나는 무덤으로 직행하고 있다고.’

 다시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로 돌아온다. 치료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조카는 주인공에게 ‘아파치의 요새’라는 영화의 한 장면을 얘기한다. 서부의 요새에 새로 장군이 부임해온다. 이를 고참 대위가 맞이하는데, 요새 주변에는 인디언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중이다. 도착하자마자 장군은 대위에게 말한다. ‘이곳으로 오는 중에 인디언을 몇 명인가 보았다’고. 그러자 대위의 대답은 이렇다. “괜찮습니다. 장군께서 인디언을 보았다는 건, 바꿔 말하면 인디언은 거기에 없다는 뜻입니다.”

 조카는 이어 말한다.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동정을 받을 때마다 왠지 그 대사가 떠오르는 거야. 인디언을 보았다는 건, 바꿔 말하면 인디언은 거기에 없다는 뜻입니다. 라고 말이야.”
 
▲“눈과 귀가 있다고 보고 들을 수 있는 건 아냐”
 
 어린 나이에 난청이 돼버린 조카, 아내의 얼굴을 평생 몰라야 했던 맹인. 이들은 쉬운 동정의 대상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눈과 귀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 확신하면서 이들을 불쌍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잘 듣고 또렷이 보는가? 단지 입만 살아서 제 말만 떠들어대진 않나? 눈과 귀가 있다고 모두가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디언을 봤다고 인디언이 정말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듯이.

 얼굴 바로 앞에서 문이 쾅 닫힌다. B를 태운 기차가 경적을 울리며 출발한다. 나는 아직 아무 말도 못했는데. 어쩔 줄 모르며 황혼이 붉게 타고, 혼자 남겨진 나는 엉엉 운다. 미안해서. 외롭고 무서웠을 그의 마음을 이제야 헤아려본다. 당신이라는 이름의 거대하고 아름다운 건축물…. 난 그 안의 많고 많은 방들 중에 쓸쓸히 불 꺼진 회색 방 하나를 발견하지 못했다.

 “우리는 지금 대성당을 그리고 있어. 나하고 이 사람이 함께 만들고 있어. 그렇지, 좋아. 자네가 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할 수 있잖아? 이젠 순풍에 돛을 단 격이네. 무슨 소리인지 알겠나? 조금만 더 하면 우리가 여기에 뭔가를 진짜 만들게 되는 거야.”

 눈을 감고 종이 위에 선을 그어 나간다, 펜을 쥔 손을 꾹꾹 눌러가며. 깜깜한 암흑 속에 얼굴이 하나 있다. 익숙한 듯 낯선 눈, 코, 입을 구석구석 만져본다. 정말 내가 알았던 당신이 맞나?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입술이 무슨 말을 하려는 듯 달싹인다. 나는 내 구불구불 귓바퀴 속에 감싸인 어둡고 축축한 동굴, 그 입구를 열고 당신의 말을 기다린다.

 이윽고 눈을 뜨고, 나는 원래의 세계로 돌아온다. 내가 다시금 살아가야할 세계. 거기에 이미 당신은 사라지고 없다. 가슴 한 구석이 여전히 시리지만, 나는 내가 아주 작은 진화의 과정을 거쳤음을 느낀다. 이렇게나 더디게 성장하고 있다, 나의 눈과 귀는.
김연우 <조선대 국문과 2년, 청년인문학 소피움 연구원>

[드림 콕!]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광주드림을 구독하세요

저작권자 © 광주드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