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보는 세계는 진짜가 아니야

▲ 키르히너의 ‘마르셀라’.
 철망 밖 풍경이려니 했는데
 그 너머 한구석 고양이 한 마리
 울타리 안 풍경이군!
 내가 내다보는 줄 알았는데
 들여다보고 있었네.
 고양이한텐
 바깥이고 안이고
 들여다보고 내다보고
 그런 생각 없겠지.
 바라볼 뿐.
 
 너무 많은 생각이 오가서
 턱,
 머리끝부터 꼬리뼈까지
 트래픽 잼에 걸려있을 때
 내 고양이를 본다.
 한 번에 한 생각
 혹은 아무 생각 없는
 오솔길 같은 눈망울을
 들여다본다.
 아니, 내다본다.
 - 황인숙, ‘고양이가 있는 풍경사진’
 
▲고양이는 단맛을 모른다
 
 나는 시인 황인숙 만큼 고양이를 좋아한다. 시의 마지막 연처럼 고양이의 마음으로 세상을 내다볼 수 있다. 정말이다. 그런 나도 고양이가 단맛을 모르는 줄은 정말 몰랐다. 나에게 고양이는 깊은 달콤함, 예를 들자면 뜨거움과 강렬함을 풍기는 상상 속 장인(匠人)의 초콜릿 차 맛이다. 당연히 혀에 대어본적 없으나 고양이를 보고 있으면 혀에 그 맛이 전해지는 것만 같다. 그런 내게 단맛의 공감각을 풍기는 고양이가 단 맛을 아예 모른다는 건, 당황이다. 알아보니 육식을 하는 고양이와 호랑이, 표범 같은 동물에게는 단맛을 뇌로 전달하는 미각수용체가 없단다. 사실 인간의 혀가 맛을 느끼도록 진화한건 생존을 위해서였다. 먹을 것과 잠자리를 구해 하염없이 걸었던 인간의 원시 조상들에게 단맛은 삶의 맛, 쓴맛은 죽음으로 드러났을 터. 그 진화의 결과가 아직 우리 입에 남아 달콤한 것에 그토록 끌리고 쓴 맛에는 오만상을 찌푸리게 되지 않았던가.

 단맛이 나지 않는 야생의 고기를 먹었던 고양이 조상에게 단맛은 알아봤자 필요 없는 쓸데없는 감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고양이가 반려동물로 길들고 사료와 익힌 고기를 먹게 된 현재도 고양이는 여전히 단 맛을 모른다. 어디 고양이뿐이랴. 나는 인간계의 고양이. 미각이 둔한 나는 너무 짜거나 너무 맵다는 기준의 스펙트럼이 꽤 넓다. 심지어 살짝 쉰 나물도 나만 모르고 잘 먹는다. 맛집에서 감탄사를 터트리는 동료와 친구를 멀거니 보면서 “맛있어? 얼마나 맛있어?”하는 정도가 고작이라니. 한마디로 나의 미각의 움벨트는 딱 두 가지다. 딱 맞는 맛 아니면 싱거운 맛. 단맛을 모르는 고양이처럼, 나 또한 맛을 즐기지 못하는 것이다. 빈약한 맛의 움벨트!
 
▲고양이의 세계, 개의 세계
 
 같은 장소, 그러나 나의 개와 나는 서로 다른 세상에 있다.

 움벨트(um-welt)는 생리학자 야콥 폰 웩스쿨이 ‘동물과 인간세계의 산책’에서 처음 언급한 용어로 각각의 생명체들이 ‘주관적’으로 느끼는 ‘현실로서의 세계’를 말한다. 주관적으로 느끼는 현실로서의 세계. SF영화의 광고멘트 같지만 우리가 보는 현실은 모두 주관적으로 구성한 ‘현실들’이라는 말이 현재까지는 진리에 가깝다. 우리는 보통 현실은 객관적이며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이 주관적이기에 세상이 이렇게도 저렇게도 보인다고 믿는다. 그러니 너의 마음을 명경(明鏡)같이 닦아 저 밖의 객관적 현실을 파악하라. 그러나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란 없다. 서로 다른 세계가 서로 다른 수만큼 ‘현실’로 존재할 뿐.

 앞에 놓여있는 빨간 포인세티아 꽃 화분을 나의 개와 함께 바라본다. 그러나 빨강을 구분하는 원추세포가 없는 개에게 빨강은 노랑으로 지각된다. 상상해보라, 노란 산타 옷을 입은 산타클로스라니. 노란 립스틱을 칠한 주인님이라니. 그러나 그것이 개가 보고 있는 진실한 세계다. 그 옆에 개구리를 등장시켜볼까? 개구리왕자에 등장할 법한 영리한 개구리라도, 포인세티아 화분이 저절로 움직이지 않는 한 화분의 존재를 알 길이 없다. 개구리는 움직이는 것만 감지하는 시각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것이 개구리가 보는 세계다. 되뇌어본다. 내가 좀 전까지 손에 쥐고 있던 한 잔의 코코아는 짙은 갈색인가, 갈색으로 보이는 것인가. 작업실 창밖으로 길쭉길쭉, 오늘 따라 뻘쭘하게 늘어서있는 저 아파트들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너무 나갔다고?

 인간은 너무 크거나 너무 작은 것은 감각하지 못한다. 사실, 어제 나의 심장을 쿵쿵 뛰게 만든 영화는 24컷의 필름이 1초 동안 빠르게 움직인 결과였다. 인간은 초당 15회 이상의 컷 끊김은 파악하지 못하는 인식체계를 가졌다. 내가 안심하고 길을 걸어 출근할 수 있는 건 465.1m/s의 속도로 자전하는 지구의 움직임을 감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의자에 앉아 일에 집중할 수 있는 건 내 눈이 나노미터보다 작으며 수천 억분의 1초 단위로 휙휙 움직이는 벽 분자, 책상 분자의 움직임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세계의 모습은 하나가 아니며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세계는 나의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온 정보를 뇌가 해석해 보여준 결과다. 세계는 ‘나의 뇌가 구성하는대로 존재하는’ 세계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무수한 ‘나’들만큼, 종들만큼의 세계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이 구성하는 세계가 그들의 현실이다.
 
▲안다는 건 무엇인가?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을 집대성해 비판철학의 문을 열었던 칸트는 철학계의 야콥 폰 웩스쿨이었다. 그의 유명한 한 마디 “대상이 인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이 대상을 결정한다.” 그전까지 사람들은 인식이 대상과 일치해야한다고 가정했다. 그래서 내가 보고 내놓은 결과가 과연 참에 가까운지 아닌지를 두고 다퉜다. 그러나 칸트는 묻는다. ‘인식이 대상과 일치해야 한다’는 이 가정으로 인해 도리어 앎의 범위를 넓히려는 시도가 무너져온 것은 아닌가? 반대로 대상이 우리의 인식과 일치해야한다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내가 좋아하는 동화 ‘오즈의 마법사’ 속 에메랄드시에는 주민이라면 반드시 초록안경을 써야한다는 규칙이 있다. 초록안경을 써야하니 세상 모든 사물이 초록일밖에. 인간과 뭇 생명체가 서로 다르게 가지고 태어나는 감각이 바로 이 초록안경, 우리의 인식능력이 아닌가. 현미경을 동원하든 망원경을 동원하든 우리는 감각이란 초록안경을 벗고 세상을 관찰하기 어렵다.

 그리고 감정은 세상을 보는 또 다른 인식능력이라서 마음이 그리는 욕망과 꿈에 의해 우리는 세상을 본다. 볼 빨간 사춘기 소녀들과 길을 걸으면 화장품가게와 옷가게를 지나칠 때 발걸음 더뎌지고, 먹고 돌아서면 배가 고픈 소년들과 길을 걸으면 벌름거리는 코만 봐도 햄버거가게와 피자가게가 어디쯤 있다는 걸 딱 알게 되는데. 그렇게 몸과 맘은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볼지 구성한다. 인식이 대상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니 나의 몸을 닦고 나의 사유를 키우라. 감각이 날선 칼처럼 벼려지면 바람과 물, 흙과 공기와 친구가 된다. 상식과 관습을 넘어 스스로 사유하려하면, 그동안 보이지 않던 상상과 관념의 세계가 현실로 드러난다. 칸트처럼.
박혜진 <도서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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