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녘에 날아오른다

▲ 미네르바(헤겔).
 높은 곳은 어둡다.
 맑은 별빛이 뜨는 군청색 밤하늘을 보면 알 수 있다.
 
 골목에서 연탄 냄새가 빠지지 않는 변두리가 있다.
 이따금 어두운 얼굴들이 왕래하는 언제나 그늘이 먼저 고이는 마을이다.
 평지에 자리하면서도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높이는 전망이 아니다.
 흙을 담은 스티로폼 폐품상자에 꼬챙이를 꽂고 나팔꽃 꽃씨를 심는
 아름다운 마음씨가 힘처럼 빛나는 곳이다.
 
 아침노을을 가장 먼저 느끼는 눈부신 정신의 높이를 어둡다고만 할 수 없다.
- 허만하 ‘높이는 전망이 아니다.’
 
 지혜는 어떻게 오는가.

 헤겔은 ‘법철학’에서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녘에야 날아오른다.’고 썼다. 미네르바는 아테나의 로마식 이름으로 전쟁과 지혜를 관장하는 여신이다. 전쟁과 지혜는 어떤 연결고리를 갖는가. 전쟁은 상이한 가치관의 충돌, 신구(新舊)의 부딪힘, 차지하려는 욕망과 지키려는 욕망 사이의 난투이다. 알렉산더가 침략을 통해 그리스와 페르시아, 유럽과 아시아의 문화를 융합한 헬레니즘의 시대를 열었듯 지혜 또한 서로 상이한 이질성의 경계에서 다른 무엇을 만들어내는 에너지이다. 전쟁에도 지혜에도 지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오늘날 기술로 집약되는 지식이, 합치되 그 결과가 미칠 해악과 영향을 고려하지 않고 질주한다면 지혜는 인간과 생명·자연이라는 근원의 관점에서 결과를 미리 살피며 과정을 점검한다. 전쟁터에서는 내 편의 이익이 정의다. 지혜의 입장에서는 인류의 행복이 정의다. 책상머리에 앉아 습득해야할 내용이 지식이라면 그 지식을 대체 어디에 써먹어야 유용할지, 그리고 어떻게 익히는 것이 옳을지 골똘히 궁리하는 건 지혜다. 지혜는 경험과 시간이 켜켜이 쌓여 축적된 후에 온다. 그러나 그저 꾹꾹 눌러 담기 만해서는 백과사전을 지혜의 보고로 여기는 것만큼이나 곤란하다.

 높이를 모두가 선망하는 저 이데아의 하늘과 혹은 빽빽이 들어찬 마천루에서가 아니라, 변두리 달동네옥상 나팔꽃씨를 심는 거친 손에서도 찾을 줄 아는 비판적 사유로부터 지혜는 온다. 그래서 지혜는 미네르바가 데리고 다닌다는 성조 부엉이를 닮았다. 부엉이는 황혼녘에야 난다. 아침의 모든 시작이 소망의 알을 품고 낮의 애씀과 부침, 헛된 기대와 실망들을 지나 하나로 갈무리되는 황혼녘, 체념과 포기로 등이 내면을 향해 무겁게 구부러드는 저녁에야 하나의 깨달음으로, 성찰과 성장의 모습으로 지혜는 온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지혜는 생의 전환점이 된다. 인간이 바라는 높이는 전망에 있지 않다. 그것은 오히려 땅과 가까운 곳에서 어제와 마찬가지로 부대끼며 하루를 살아낸 당신과 나의 눈동자 속에 있다. 지혜란 성인군자의 평온과 안분지족(安分知足)에 있지 않다. 지혜란 황혼을 지나 다시 캄캄한 생의 어둠속으로 기꺼이 걸어 들어가는 그 용기에 있다. 그래서 그대의 지혜는 전쟁을 닮았다. 그리하여 아침의 호령과 오후의 한숨, 나부끼는 승리의 함성과 패잔병의 고해가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될 때 지혜는 싹튼다. 그 모든 것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한 지혜는 마침내 삶 자체에 대한 사랑, 운명애(Amor fati)가 된다.
 
 이제 세계가 어떠해야만 하는지를 가르치는 데 대하여 한마디 덧붙여둔다면,
 어쨌거나 철학은 이를 위해서는 항상 너무 늦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세계의 사상으로서의 철학은 현실이 그 형성과정을 종료하여
 확고한 모습을 갖추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시간 속에 나타난다.
 개념이 가르쳐주는 것을 역사는 또한 필연의 과정으로 나타내주기도 하거니와,
 현실이 무르익었을 때 비로소 이념적인 것이 실재적인 것에 맞서서 나타나는 가운데
 이 실재하는 세계의 실체를 포착하여 이를 지적인 왕국의 형태로 구축한다.
 철학이 회색의 현실을 회색으로 그려낼 때 생명의 형태는 이미 낡아져버렸으니,
 회색에 회색을 덧칠한다 해도 생명의 형태는 젊음을 되찾지 못하고 다만 그 진상이 인식되는 데
 그칠 뿐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깃들 무렵에야 비로소 날기 시작한다.
- 프리드리히 헤겔, ‘법철학’

박혜진 <도서비평가>

[드림 콕!]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광주드림을 구독하세요

저작권자 © 광주드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