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린 야시장, 길거리 음식 잔치

▲ 길거리 음식 천국 스린 야시장.
 대만의 밤, 남국의 밤은 어떨까라는 기대감은 모두에게 있었다. 이미 야시장이 갖고 있는 명성은 국제적으로도 인정을 받고 있는 터이라 의심의 여지없이 그 밤을 기대했다. 우선 스린 야시장에 가기 전에 타이빼이 아트 빌리지에 들렀다. 몇 번 와본 기억이 있어 성큼 안으로 들어갔더니 작가들의 입주 교체 시기였다. 이곳은 타이빼이 중심가에 위치한 곳. 미술인을 위해 전문적으로 운영하는 레지던시 공간으로 세계의 작가와 큐레이터들이 장기 입주하여 창작활동을 펼치고 있다.

 운영방식 중에 눈에 들어왔던 것은 무작정 작가들에게 창작 지원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입주지역과 대만에 대한 인식 수준을 높이고, 시민 학생들과 협업을 하거나, 지역 문화예술교육에 공헌할 기회를 부여한다는 것이었다. 테라스에서 친구들과 이같은 특이점을 이야기하고 밖으로 나왔다.

 푹푹 찌는 더위는 조금씩 퇴각하고 있었다. 이제 야시장으로 차를 달린다. 많이 달라졌을까 라는 기대감을 갖고 시장에 도착했다.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야시장은 저녁 7시쯤, 우리는 한시간 정도 먼저 도착했다. 각 모둠별로 일정한 돈을 나눠주고 야시장에서 저녁도 먹고 이것저것 진기한 체험을 하라는 의도였다. 청년들은 모둠을 이뤄 즉각 흩어졌고, 늙은 우리들만 남아 서서히 장내를 돌기 시작했다. 아직 시작되지 않은 탓에 시장의 풍경은 마치 서울의 광장시장을 보는듯한 느낌이었다. 대인시장을 예를 들지 않고 서울까지 출장한 것은 대인시장에는 이렇듯 상시적으로 손님을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대부분 맛집…버스킹·이벤트는 없어도 

 하여튼 2층이 개방된 시티투어버스도 손님을 내리고 가고 관광버스가 연신 도착하기 시작했다. 상인들의 손길도 덩달아 바빠지기 시작한다. 매일을 한결같이 하는 일임에도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시지 않는다. 노동이라는 것, 몸을 써서 일한다는 것이 한층 더 소중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송산이나 화산의 문화지구에서 경험했기 때문에, 이 맹염에 부지런을 떠는 상인들이 더욱 더 신성하게 보였다. 가게는 비교적 큰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좁디좁았고 그 좁은 것을 해소하고자 가게가 도로 한켠으로 나온 것도 있었다. 전반적으로 이런 가게형 노점과 길거리 음식이 시장 분위기를 압도했다.

 시장을 다니는 모든 이들의 손에는 무언가의 먹을 거리가 쥐어져 있었다. 남도의 맛, 어머니의 맛에 길들여진 나는 벌써 3일째 제대로된 밥을 못먹고 있는데, 우리 청년들을 비롯해 손에 먹을 것을 쥐고 있는 모든 분들이 경외의 대상이 되었다. 의류·신발·액세서리·잡화 등의 매장들은 비교적 덩치 큰 규모로 손님을 끄는데 반해 소형 점포는 대부분이 맛집이었다. 그리고 그런 맛집의 태반이 화기를 다루고 있었다. 그러니 시장내에는 그야말로 거대한 잔치판이 형성된 것처럼 음식 내음이 코를 찔렀다. 그런 이곳에서 행여 버스킹이라도 있나, 쇼라도 있나, 이벤트라도 있는가 호기심을 가지고 두바퀴를 돌았지만, 스린 야시장은 먹고 소비하는 것이 일등인 시장이었다.

 이런 대규모 시상이 돌아가는 구동 원리는 무엇일까 자못 궁금해졌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물어 볼 사람이 없다. 몇몇이서 노점 카페로 들어가서 그 이유를 탐문해 본다.

 우선은 이곳의 교통이 정말 사통팔달의 환경이라는데는 이견이 없었다. 커다란 차선으로 차들이 즐비하게 다니는 곳이란게 금방 눈에 들어온 것이다. 두 번째는 역사다. 100년이 넘었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형성되어 지금까지 대만인 뿐만 아니라 세계인의 관심을 받을 수 있도록 발전해 온 것이다. 거기에는 이곳만의 저렴하고 맛있는 음식이 일조를 했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상인들의 친절함을 꼽았다. 시장을 도는 내내 인상을 찌푸린 광경을 한번도 목격하지 않았다는 것을 예로 들었다. 특유의 인내력과 자부심으로 이 커다란 시장을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위적인 부양을 하고 있는 대인시장과는 참으로 많은 면에서 비교가 되었다.
 
▲사통팔달, 역사, 친절함…

 세시간 가량의 스린 야시장 경험을 마치고 우리 모두는 또 차에 올랐다. 숙소로 향한다. 지칠 법 한데 모두 시장의 기운을 받아서인지 성성하다. 오늘 밤은 보장암에서 못다한 이야기를 들려주실 쭝짜오 선생이 함께하는 대화 마당이 열릴 예정이다. 마을의 가게에서 샀던 것들과 시장에서 샀던 주전부리 등을 모아 테이블을 셋팅하고 이야기 마당을 펼쳤다. 아시아 연극인들의 모임을 위해 중국으로 필리핀으로 일본으로 홍콩으로 다녔던 이야기와 광주에서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쭝짜오 선생의 이야기에 모두들 귀를 쫑긋한다. 우리는 이미 송산과 화산에서 예술인들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 경험을 했던 터였다. 아시아의 민중극을 모아내려 야심차게 출발했던 광주가 그 사업을 계속 승계하지 못해 어렵게 서로 만나고 있는 현실적 문제 앞에서 다시금 문화중심도시 광주시민으로서의 미안함과 책임감을 느껴 본다.

 문화의 중심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우리의 우월적 문화로, 혹은 아닌척 하면서도 내재된 욕심을 숨겨두고 한줄로 모아보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상대방의 역사와 지리와 환경속에서 꽃피운 문화의 양식을 존중하고 대접하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수용하고 나누는 것이 문화도시의 속성이어야 할 것이다. 프랑스가 알제리를 통치할 때 알제리의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그 많은 식민지의 자원을 포기할 수 없는 프랑스인들은 한목소리로 알제리를 계속 통치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때 사르트르는 알제리는 알제리 사람들로 살아야 할 권리가 있다며, 이들의 독립투쟁에 자금을 지원하고 독립시위에 참여한다. 프랑스 사람을 죽이는데 이 돈이 쓰이는 것을 안 각료들은 드골 대통령에게 사르트르를 체포해야 한다고 조언을 한다. 하지만 드골은 이렇게 말한다. “두게. 그도 프랑스야!”

 다양성의 문화를 담아낼 수 있는 그릇으로서 문화도시가 존재해야 하는데, 아직 광주의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아시아의 정체성에 대한 구분 자체도 모호하고, 심지어 광주 안에 있으면서 광주와 남도를 너무나 등한시 한다는 것이 문제로 보여졌다. 거기에 심한 소외감과 박탈감을 느낀 분들은 오히려 자신의 주장을 전당 안에 탑재해야만 된다고 여기고 있는 현실의 상황이 너무나 암울하게만 느껴졌다. 화기애애하면서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돌아보게 만든 담화의 시간이 가고 배웅하려 나오니 빗줄기가 심상치 않다. 대만이 태풍의 가장자리에 놓이게 된다는 사실을 아침 뉴스를 보고 알았는데, 정말 방향을 선회하지 않고 이렇게 오면 어쩌지 하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 장개석 총통 기념당 앞에서

 이른 아침 생생해진 잔디를 보며 다시 기운을 차린다. 오늘의 일정도 만만치 않다. 중정기념당과 2·28 평화공원, 고궁박물관, 용산사, 보리파오역 사거리 등을 가야 한다. 그리고 밤에는 배움여행 결과를 모둠별로 발표를 하고 이른 아침에 대만을 떠나는 것이다.

 대만 즉, 타이완은 중화민국이라는 국호를 가졌다. 이런 국호를 만들고 대만을 통치한 절대적 권력 중심에는 장개석 총통이 있다. 1887년 태어난 장개석은 1975년 89세의 나이로 죽게된다. 현재 대만을 만든 초석이 바로 그에게서 비롯되었다고 추앙을 받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독재자로 존재하는 양면성을 지닌다. 아주 어렸을 적 초등학교에서 장개석이 죽었다고 묵념을 올렸던 기억이 아직 내게 남아있다. 아마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와 이심전심이었을 터였을 것이다. 하니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머리를 조아렸던 몇 번의 기억이 남는 것일 것이다.

 베트남의 패망이라고 사이렌을 울리고 모였던 적, 박정희가 서거했다고 모였던 적, 전두환이 대통령 최초로 민박을 한 담양군 고서면 성산마을에서 헬기를 타고 청와대로 가기 위해 학교 운동장에 모여 박수와 손사래를 흔들었던 기억, 독재의 기억은 그래서 너무도 씁쓸하기만 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들은 그 앞에서 꽃놀이패를 해야 했었고, 좀 알더라도 나설 수 없는 시대의 울분이 있었으니. 하여튼 장개석을 기념하는 국립중정기념당은 그 규모와 위세에 놀랄 수 밖에 없다. 90년대 초반에도 감탄을 했지만 이번에도 또 그 규모와 그에 대한 대만인들의 관대함에 놀랐다. 정시에 이뤄지는 근위병들의 교대식은 어김없이 이번에도 이뤄졌다. 정 중앙에 물경 25t 에 달하는 무게의 청동 동상이 근엄한 모습으로 대륙을 향해 앉아 있었다.

 80년대를 관통했던 내게 이 아이러니는 늘 여길 가야 하나 망설이게 하는 화근이었다. 다만 이 기념당을 보고 그 끔찍했던 대만의 4·3 항쟁이라 할 2·28 평화 기념관에 가는 것이니 역사의 극명한 대비가 이뤄질 것을 기대하는 것이고, 대만 민중에게 덜 미안할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었다. 장개석의 나이로 쌓아올린 89개의 대리석 계단을 올라 청동상과 근위병의 교대식을 보고 내려오는 이들의 발걸음이 경쾌한 것을 보니 이들도 나처럼 그의 역사를 무시하는 것 아닌가 싶다. 왕희지의 글씨인 자유광장이란 현편을 뚫어져 응시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이제 대만 민중의 역사를 만나러 가야 한다.
전고필 <여행전문가·대인예술시장 감독, 대한민국 테마여행 10선 8권역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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