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어있다는 것은 결코 없는 것, 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비어있다는 것은 그 무언가에 어떤 것이라도 채울 수 있는 가능성,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인간은 백지 상태로 태어난다는, 후천적인 자극, 교육이나 양육방법, 인간관계에 따라 성장한다는 존 로크의 주장에 동의하지만, 완전히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오직 후천적이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모든 인간이 같은 크기의 백지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즉, 선천적으로 특정 분야의 크기가 클 수도, 작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같은 교육을 시켰을 때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도 성립할 수 있다는 말이다. 존 로크와 핀커의 주장 모두 인간의 일생 전체에 대한 주장이지만 나는 지금 순간순간에 대해 주장해 보려고 한다.

 나는 우리의 뇌가 셀 수도 없이 많은 백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 번씩 많은 일이 닥쳤을 때,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고 수용할 수 없는 상태가 될 때가 있다. 나는 이런 상황들을 나의 백지가 가득 채워졌다고 말하겠다. 마치 엔트로피가 증가할 대로 증가해 아무 생각도 못하게 된 상황같이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진정시키고 생각을 다시 할 수 있다. 백지 속에 적힌 것들이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기억으로 남는 것에 대해서. 나는 백지는 다시 쓰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새 백지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생각할 수 있는 여유, 백지가 있기에 생각할 수 있고, 우리의 존재도 우리를 존재할 수 있게 하는 빈 공간이 있기에 가능하다.

 타블라 라사, 빈 칠판에 우리는 매일매일, 매 순간마다 조금씩 무언가를 채워나가고 있다. 0에서 우리는 시작했다. 내 안의 0, 빈 칠판에 무언가를 새겨나갈 때마다 0이라는 수에 변화가 생긴다. 양수든 음수든, 좋은 것이 될 수도 있고, 좋지 않은 것이 될 수도 있다. 어떨 때는 안 좋은 상황이 연속되더라도 그 때문에 좋은 경험이 될 수도 있다. 마치 음수에 음수를 곱하면 양수가 되듯 말이다. 내 타블라 라사는 조금씩 채워진다. 아직은 한참 남은 듯하지만, 나의 타블라 라사를 후회 없이 채워가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다.
이지윤<장성 삼계중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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