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을 담아서 떠나다

 밤이 되었다. 태퐁 탈림의 영향으로 비가 추적추적 내리지만 우리는 얼른 씻고 주방으로 모두 모였다. 3일간의 강행군을 이제는 정리해야 할 시점이다. 대만의 9월은 무척이나 뜨거웠지만 함께 여행길에 올랐던 벗들끼리의 우정도 그만치 뜨거워짐을 느꼈었다. 3개의 조로 나누어 각각의 여행과 조별 여행을 병행하게 했던 터라 이제 두어 시간 정도 발표 준비를 하고, 이를 바탕으로 각각의 다른 시각을 공유하는 마당이 진행되는 것이다.

 심사위원으로는 멘토 두 명과 동행한 광주광역시청 주무관, 여행의 길잡이가 되어준 가이드, 유망주 사무국장 등이 되었다. 노트북과 에그가 바삐 돌아다닌다. 핸드폰에 찍었던 사진이 노출되며 그만의 시선이 드러난다. 내가 여길 보고 있었을 때 그니는 저곳을 보았다는 것이 입증되는 순간이다. 그렇게 정해진 시간이 되어 발표가 진행되었다.
 
▲여행은 결국 자기를 탐색하는 것
 
 한 조의 시선은 손에 가 닿았다. 이문재 시인의 시가 낭송이 된다. 손의 백서를 통해 이 조에서는 송산과 화산 문화지구에서 보았던 문화적 충격들을 깊게 이야기 한다. 작금에 손이 있는 곳이 어디인가? 손은 정성이 있는 곳이 아니라 모든 기계나 소유물의 근처에 있다. 그러다 보니 타인을 배려하고, 세상에 온기를 부여하는 곳에서 빛을 발하는 손은 사라졌다. 그런 스마트하고 첨단인 사회에서 오히려 꼼지락 거리는 손의 위상을 재발견하고 이 온기를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주체로서의 예술가와 생활 기술자들이 깊게 각인된 발표를 들었다. 박수가 멈추지 않는 발표였다.


 다른 조에서는 2·28 평화기념관의 울림을 이야기 한다. 모두 광주에서 온 사람인지라 광주의 5·18민주화 운동과 비교가 되는 것이다. 여행이 그런 것이다. 나를 떠나서 왔지만 종국에 발견된 것은 나로 다시 치환되는 여정이라는 것, 때문에 인류학자인 레비스트로스도 그런 말을 했다. 여행이란 황야를 탐색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나를 탐험하는 것이라고. 태생적으로 광주에 있는 한, 5월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는 영혼들. 그 안에 저 젊은이들의 생각도 함께 있었다. 5월을 당사자들의 고민이라고 여기지만 대만까지 건너온 90년대 생들의 가슴에도 대만의 처절한 제노사이드를 보고 느껴지는 것을 광주 안에 이입하고자 하는 마음이 드러난 것이다. 평화공원에서 원형의 수구에 손을 얹으며 들었던 그 역사 안에 인입된 듯한 생각이나, 왜 광주는 이다지 멀게 묘지가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이나 5월의 역사 속으로 쉽게 진입하지 못하는 보이지 않는 차단의 벽까지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영화 택시운전사로 더한층 촉발된 5·18에 대한 역사인식의 지평이 넓어진 이 기회를 활용할 방안까지 제시되었다. 가슴 아픈 역사의 상흔을 우리 식으로 배움의 공간으로 맞이할 준비를 하자는 이야기로 함께간 모든 이들의 공감속에 두 번째 조의 발표가 끝났다.

 세 번째 조는 화산 1914나 송산문창원구의 공간을 보면서 옛 공간을 새 공간으로 대체하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장소성에 기인한 삶의 터무니를 담아낸 대만의 저력에 대한 교감을 이야기했다. 우리에게도 5월 당시 적십자병원이었던 곳, 전남방직 같은 공장 건물이 있지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고 이런 공간들을 깨끗이 잊어버리고 싹 쓸어낸 후 새롭게 무언가를 지어내는데 익숙한 모습은 더 이상 아니라는 것이다.
 
▲“광주, 눈앞 보물 놓치고 있다”는 안타까움
 
 전국의 수많은 공간들이 도시재생이나 창조공간으로 되살아나고 있는데 우리 광주는 바로 눈앞의 보물도 놓치고 있음에 대한 안타까움이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이렇게 3개조의 발표를 듣는 동안 내 자신도 많이 놀랐다. 무늬만 배움 여행일 줄 알았는데 저렇듯 세세히 들여다보면서 또 내가 처한 현실과 비교하며 발전방안을 모색하는 여행이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비는 좀 더 세차게 내려지기 시작했고, 저마다의 발표를 토대로 한 생각의 공유시간은 깊어갔다. 아침에 과연 비행기가 뜰 것인지는 의문이지만 그래도 공항 현지에서 운항 상황을 알아야 하니 애써 해산하고 아침 일찍 만나기로 했다.

 이른 아침 저마다 짐을 꾸려 프론트로 나온다. 밤늦게 해산을 했지만 더 깊이 이야기한 그룹이 있었는지 모두가 모여지지 않는다. 단체여행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개별 행동은 다른 약속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아픔을 준다. 누군가는 방 열쇠를 찾지 못해 안절부절 하기도 하고, 하여튼 본디 출발하기로 한 시간 보다 30분이 늦어진 가운데 공항으로 우리는 떠나왔다. 전광판을 보니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는 결항이고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는 아직 문제가 없었다. 어제 오후 태풍의 진로가 일본 규슈 지방 쪽으로 변경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던 참이라 별 무리가 없는 항해가 될 듯 했다. 그렇게 우리는 순조롭게 비행기에 탑승하고 대구에 도착해서 순대국밥 한 그릇씩 먹고 버스를 타고 광주로 돌아왔다. 4박 5일의 여정이 큰 탈 없이 수많은 질문과 깨달음을 주며 마감되었다.

 그 9월에 다녀온 대만을 가지고 해를 넘겨 9번째까지 연재를 해 왔다.

 처음에는 3번 정도로 마감을 지을까 생각했지만 공간 공간에서 받은 공명이 컸다. 그래서 사족 같은 이야기 꾸꿈스런 이야기를 담아 여기까지 온 것이다.


 열댓 명이 함께 한 여행은 각자가 꿈꾸고 갈구하는 것이 다른 집합들이지만 한데 어울려 5일간을 다른 시선으로 보았다. 하지만 그들 내부의 유전자에는 남도 사람이라는 공통분모가 함께 했었다.

 그런 여행에서 몇 가지 질문들이 남았다. 중소기업 중심으로 살아가는 대만이라는 국가의 젊은이들은 한국을 어떻게 볼까 라고 물었는데 우리는 헬조선 이라고 하고, 그들은 헬로우 조선이라고 표현한다고 했다.
 
▲대만의 젊은이들, 그리고 우리를 향한 질문
 
 4년제 대학을 나온 대만 친구들의 초봉이 140만원 안팎인데 반해 우리는 200여만 원이 넘게 출발하고 있으며, 인상폭도 넓다는 점이었다. 그럼에도 한국에서는 살기 팍팍하다고 하는데 대만 친구들의 시선에는 한국은 살아볼 만한 곳, 가봐야 할 곳으로 버킷 리스트에 있다는 점이었다.

 두 번째, 이들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일본은 어떤 존재일까? 50여년을 넘게 통치한 일본을 그들은 우리처럼 강하게 적대시 안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대만에 문명을 전파해 주었고, 근대화를 시켜 주었다고 여기고 있었다. 우셰사건처럼 원주민을 학살하고 많은 전쟁 물자를 공급하고 병참기지화 했지만 의외로 일본에 대한 우호적인 시선이 많았다는 점은 늘 의문이 들었다.

 세 번째는 정치적 지형에 관한 것이다. 대륙과 대만 사이의 관계속에서 이것을 접하는 대부분의 시민들은 무감해 했다. 대륙은 대륙이고 우리는 우리다 라는 의식들이 많았던 것이다. 일부 진보적인 사람들은 통일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극소수에 달했다. 한국의 정치를 바라보는 시선은 어떨까 또한 궁금했다. 그들은 한국 국민을 존중했다. 1992년 수교단절 때 느꼈던 배신감이 어느 정도 해소 되고, 국민의 힘으로 촛불의 힘으로 민주정부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자신들이 접해온 역사와 비교하며 부러워하고 응원하고 있었다.

 한국의 문화에 대한 소견도 물어 보았지만 자세히는 알지 못했다. 광주 비엔날레나 올림픽 같은 대형 이슈는 알지만 생활 속의 문화나 민속 등은 상대적으로 교류가 많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많은 질문과 대답 속에서 대만 행은 오로지 이 글과 마음에 남기게 되었다. 이제 내 조국을 더 깊이 보는 여행을 떠나야겠다.
전고필<대인예술시장 감독, 대한민국 테마여행 10선 8권역 PM>

[드림 콕!]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광주드림을 구독하세요

저작권자 © 광주드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