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절집의 수문장 할머니 할아버지

▲ 나주 불회사 입구. 수문장 할머니 할아버지인 석장승들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새로워질 것 없는 일상의 나날이 지난다. 이 나이쯤 되면 모든 것이 익숙해지는 것이 맞나 보다. 길거리에 나부끼는 수많은 정치인들의 플래카드나 한 표 달라고 애원하고 읍소하는 선거운동원의 구호와 율동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너무나 시끄러워져 버렸지만 정작 내 마음은 고요하다. 귓전이 따갑도록 들려오는 선거차량의 무모함이 종료되었지만 지난 며칠간은 내 세금이 저기에 쓰이는 것조차도 안타깝게도 느껴졌기도 했다.

하지만 털어버렸다. 순정하게 참으로 순정한 도시답게 모두의 표가 한곳으로 모여지는 것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기를 수없이 해왔던 물 아래 호남 사람이라서 그러한지도 모른다.

정권이 바뀐 지 1년이 되도록 지난 세월의 수모와 아픔과 조직적 해악을 아직 해결하지 못하고 모든 시야는 평화와 번영이라는 희망 속으로 포용되며 마치 거대한 선이 미세한 악을 감싸서 선한 것으로 만든 것인 마냥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일게 하는 이 정권이 못마땅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들 어쩌리. 필부필남으로 태어나 한 세상 또 걸으며 사는 것이거늘 저기 내 것이 아닌 것에 대해 주목하고 열중한다고 무에 달라질 것인가. 스스로 그런 자책의 시간을 지냈던 것이 지난봄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선거는 뻔하게 되어 버렸다.
여장승인 상원주장군.
 

 ▲주나라 당나라 장군이 버틴 이력
 
 심사가 뒤틀리고 짱짱한 오기만 득세할 때, 하지만 그것이 혼자서 느끼는 자괴감일 때 그럴 때 나는 숲을 찾는다. 오래된 늙은 숲이거나 사람의 손길을 많이 탄 새로된 숲이거나, 다만 이런 숲에 깃들이면 터무니 보다는 나이테가 더 정겨워 보인다.

풍찬노숙을 하면서도 결코 날씨의 변덕을 사람의 손길을 탓하지 두런거리지 않는 숲. 차는 나주 다도의 불회사를 향한다. 내비게이션이 없었을 적 광주에서 불회사로 가는 길은 당연히 운주사를 거치고 중들이 장을 섰다는 중장터를 지나며 운주사, 불회사, 개천사, 보림사, 운흥사 등의 스님들이 펼쳤을 작은 장터를 떠올리는 것이 당연지사였는데 이제는 간편하고 빠른 길을 일러주는 기계에 익숙해져 남평을 거쳐서 간다.

예전에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길이 나 있어 편리해 보이지만 그런 길들은 강과 산과 뜨락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의 삶과는 닿아있지 않고 그저 어느 구간과 구간 사이의 신속한 연결만을 위해 존재하는 탓에 맛대가리가 없다.

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해찰하는 것은 좋지 않지만 길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삽시간이라 할지라도 눈동자를 돌려 주변의 환경에 눈길을 주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그런 눈길 주는 것조차 내비게이션이 독점하게 되어 버렸다.어찌 되었든 차는 다도에 들어선 댐을 지나 불회사의 초입에 당도한다. 일주문을 지나 계곡의 가장자리에 차를 둔다.

 이제부터는 걸어야 제 맛이다. 길 양옆으로 삼나무들이 도열해 있다. 이들이 뿜어내는 피톤치드와 계곡으로부터 스며드는 음이온이 몸과 마음을 서늘하게 한다.
남장승인 하원당장군.


하지만 이로 만족하지 않는다. 조그만 더 들어가면 왼편으로 비자나무가 산언덕을 따라 밀식해 있다. 오래된 나무, 오랜 세월 민중의 해충을 구제해 주었다는 나무는 주목나무나 구상나무처럼 늘 푸르렀고 느티나무처럼 수관이 넓어서 그 아래 잠이라도 한잠 자면은 아주 꿀잠일 것 같은 인상을 주는 나무다.

잠시간 그런 생각을 하다가 이 절집을 지키는 늙은 수문장을 만난다. 앞서 들어설 때 만났던 일주문은 아직 세월의 켜가 묻지 않아 이질감이 있지만 이 절집의 수문장인 할머니와 할아버지 장승을 만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게다가 그 생긴 모습이 얼마나 정감 있는지 단박 내 고향의 할아버지 할머니를 뵙는 듯한 기분으로 전환한다. 수문장이니 무섭게 계시는 것이 맞을 것인데, 그 장승을 조성하던 시기가 숙종 연간이라고 하는데 몇 차례의 전란이 끝나고 평화가 지속되던 시절인지라 그래서인지 온화하기 그지없다.
 
 ▲ 대웅전 산자락에 안온하게 얹혀있어
 
 그 시절에 그려진 그림중의 하나가 생각난다. 한 선비가 나귀를 타고 가다가 떨어졌는데도 얼굴에는 당혹함이나 조급함이 한 치도 담겨있지 않고 오히려 웃음을 머금고 있다. 뒷전에 있던 동자만 허둥지둥 하는 그런 그림이었다.

한 시대의 태평함을 상징하는 ‘진단타려도’라고 하는 공제 윤두서의 그림인데 1715년 그려지고, 숙종이 여기에 시를 썼다고 한다. 그처럼 화평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왕의 의지이리라.
대웅전 법당.


하여튼 이 시기에 조성되었다는 부안의 장승에서도 그런 태평연월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 다르지 않다.

 불회사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운흥사에도 이런 장승이 있다. 1719년 조성한 것이 명문화 되어있는데 어쩌면 이것을 만들었던 불모 또한 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정이 나온다.

게다가 동네나 사찰 어귀에 장승은 본디 나무를 거꾸로 세워 뿌리가 위로 가게하며 세웠다고 하는데 여기는 돌로 만들어 영원불멸하게 조성했다.

당대에 등장한 신흥지주세력이 자신의 부와 명성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의 일종으로 참여한 증좌라고도 전한다.

하여튼 장승의 가슴에 새겨진 장승의 이름을 가지고 돌아가신 고 강현구 선생님과 통화를 한 적이 있다.

주장군이나 당장군이라고 쓰게 됨으로서 마치 조선이 끝까지 중화사상을 가진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조선은 청정한 지역으로 본디 잡귀들이 없었는데 중국 아미산에서 발원한 잡귀들이 압록강을 건너서 들어와 버렸어. 걔들의 원산지가 중국이야. 하니 원산지 출신의 무서운 장군들이 그들을 잡아들이고 징치할 수 있으니 주나라 장군과 당나라 장군이 여기 있으니 오지 말라 그렇게 표기한 것이야”라는 대답을 주셨다.

나는 그때 그 아름답다는 아미산이 잡귀의 소굴이라는 말에 놀라고, 귀신에게도 신토불이가 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었다. 두 분의 어르신을 뒤로하고 개울물 소리를 들으며 경내로 다가간다.

 두 군데의 돌무더기에서 홍교나 나무다리가 있었음직한 흔적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며, 대웅전으로 간다.

이제 막 중창불사를 마친 대웅전은 그 규모가 크지도 작지도 않으며 산자락에 안온하게 얹혀 있다. 대웅전 기단 아래에 있는 당간지주를 보았는데 대웅전 건물의 뒤편을 가니 기다란 함이 있다.

오 이것은 와불을 모신 함이 맞구나 싶어진다. 귀한 것을 친견하게 된 기쁨이 몰려온다. 합장삼배를 하고 대웅전 내부를 둘러본다. 내부와 외부를 떠받치는 기둥 사이로 용의 꼬리가 보인다.

밖에는 그럼 용의 머리가 있을 것이다. 반야용선, 불국토를 향하고 있는 배가 바로 이 대웅전임을 상징하는 조각이다.

 마찬가지로 대웅전 내부에도 두 마리의 용이 주존불을 옹위하고 있다. 조용히 법당의 마루에 앉아 본다. 화려한 내부의 천장에서는 꽃비가 내릴 듯 하다.

빼꼼하게 고개를 앞으로 내민 본존불은 비로자나불로 온 우주에 빛을 비추듯 어느 곳이든 부처가 주석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연화세계이니 당연히 연꽃과 물고이와 용과 게 등이 가득한 광명천지와 같은 법당이다.

비로자나불은 종이나 천으로 만들어 옻칠을 하고 금물을 들여 놓은 것으로 경주 감포쪽의 기림사에서 만난 적이 있는 매우 드문 예를 지닌다.

 대웅전 내부에서 문살을 보니 햇빛이 투과하며 창살에 새겨진 꽃들이 숨 쉬는 듯 하다. 오늘 날의 기술로 복원했음에도 세월이 지나면 조선 순조때 만들어진 대웅전 못지않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든다.
불회사 전경.
 

 ▲“세상 누군가 만날 때 꽃은 피어…”
 
 법당을 나와 뒷켠으로 간다. 법당의 뒤는 동백나무 숲이 우거진 곳이다. 이미 꽃은 지고 없지만 푸르른 동백은 여전히 탱탱하게 생기를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 사찰에 동백 숲을 지닌 곳을 떠올려 본다. 구례 화엄사 각황전 뒤편의 효대로 가는 길에 있는 작은 동백숲, 그 유명한 선운사의 동백숲, 광양 옥룡사의 동백숲, 다산초당 가는 길 백련사의 동백숲 등이 대표적인 곳이라 할 것이다.

그런 동백숲에 들면 이원규 시인의 동백꽃을 줍다 라는 시가 슬며시 떠오른다. 시인이 보길도 부용동과 예송리에 갔다가 동백숲에서 영감을 얻어 지은 시는 “이 세상의 누군가를 만날 때 꽃은 피어 새들을 부르고, 이세상의 누군가에게 잊혀질 때 낙화의 겨울밤은 길고도 추웠다.” 라고 노래하고 있다.

 순환의 세상, 누군가를 호명하고자 해도 쉽사리 떠오르지 않는 이름 앞에서 망연한 내게 동백숲과 한편의 시가 위로해 준다. 절 위쪽으로 차밭이 형성되어 있지만 거기까지는 가지 않고 산문을 나온다.

인도의 고승 마라난타가 영광의 법성포로 들어와 제일 먼저 창건한 절이 불갑사라고 하고, 뒤를 이어 불회사를 창건했다고 하니 불교의 해로유입설에 대한 논쟁을 지니고 있지만 어찌 되었든 그 역사는 찬연할 것이다.


나무가 울울하면서 사철 푸르름을 간직하도록 인공의 배려가 스며든 불회사에서 나는 삼나무와 비자나무와 동백의 숲, 그리고 그 사이로 흐르는 맑은 계곡에서 한껏 세상을 놓아 버린 거사가 되어 있었다.

 이제 하산이다. 덕룡산에 차가 많아서 지어진 이 고장의 지명이 다도라고 한다. 예부터 스님의 참선 수양을 위해 차를 키워왔음이 지명 안에 담겨져 있는 것이리라.

그런 차의 고장에 갔으니 속세의 나는 차를 타고 다도면 소재지로 나간다. 거기에는 다도의 맑은 물로 빚어낸 다도 생 막걸리 곡차가 있으니.
 전고필 <대인예술시장 감독, 대한민국 테마여행 10선 8권역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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