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떠나고 텅 빈 세상, 그리움엔 많은 말이 필요
노을 진 저녁의 작별인사, 그 후 죽음처럼 깊은 잠
 

▲ 그림자는 어쩔 수 없이 남게 되는 게 아닐까. 가슴을 콕콕 찌르는 아픈 그 애를 누구는 차라리 친구 삼고 누구는 평생 못 본 척 외면하겠지.
 여름밤엔 소름이 솔솔 돋는 무서운 얘기가 제격이지. 보름달이 환하니 불은 켜지 말자. 게다가 딸기가 올라간 맛있는 초코케이크도 있고. 밤새 수다 떨기에 더없이 완벽하군. 그러니까 거기 너! 귀 막지 말고 잘 좀 들어봐. 얼마 전에 문 닫은 우리 집 앞 구멍가게 말야. 주인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장사 접는다던. 근데 며칠 전에 봤다니까 글쎄? 해가 중천에 뜬 대낮에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짚고 횡단보도 앞에 꼿꼿이 서있는 거야. 그 광경이 묘하게 현실감 없고 꿈같은 데다, 누굴 기다리는 듯한 얼굴이 오싹해서 식은땀이 줄줄 나더라니까. 어때? 으스스하지? 아 몰라 그만! 네가 잘못 본 거겠지. 겁먹었구나? 흐흐.

 포크로 딸기 하나를 으깨자 식탁 가득 싱그럽고 달콤한 향이 퍼진다. 이거 피 같아. 빨간 과즙으로 하얀 접시 위에 그림을 그린다. 너 혹시 내 이름 쓰냐? 뭔 시답잖은 소리야. 아무튼 그거 알아? 한국 귀신은 한(恨)을 품고 일본 귀신은 원(怨)을 품는대. 한국 귀신은 사또부터 찾아가서 겁만 살짝 주고 억울한 사연 늘어놓기 바쁜데, 일본 귀신은 누구 하나 걸려라 벼르다가 걸린 사람 까무러칠 때까지 괴롭힌다네. 제일 무서운 게 말 안 통하는 미친놈이잖아. 아무리 그래도 귀신은 사람 못 죽여. 왜냐고? 죽인 사람도 곧 귀신이 되는데 지나가다 마주치면 어색하니까! 크크. 나도 그 농담 들어본 적 있어. 그럼 그들은 왜 오는 걸까? 왜 우리 눈에 띄는 거지?

 “나는 가끔 렉싱턴의 유령을 떠올린다. 케이시의 오래된 저택의 거실에서, 한밤중에 시끌시끌한 파티를 열고 있던 정체를 알 수 없는 숱한 유령들에 관한 일을. 그리고 덧창을 굳게 닫은 이 층의 침실에서, 예비적인 사자(死者)처럼 계속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고독한 케이시와 그의 아버지에 관한 일을.”
 -무라카미 하루키, 렉싱턴의 유령.

떠나는 사람에게 필요한 건 없다. 하지만 남겨진 사람에겐 많은 말이 필요하다. 말을 해줄 사람은 이미 떠났고 여긴 소리없는 텅 빈 세상. 영화 ‘고스트 스토리’.
 
▲ 렉싱턴 저택 한밤중의 유령 파티
 
 소설가인 주인공은 케이시라는 남자와 만나 친해진다. 건축 일을 한다는 그는 렉싱턴에서 혼자 살고 있다. 깊은 숲 같은 정원이 딸린 크고 오래된 저택에서. 어느 날 출장을 가게 된 케이시가 주인공에게 며칠간 집을 봐달라고 부탁한다. 홀로 그곳에 머물게 된 주인공. 그날 밤 그는 거실에서 와인 몇 잔과 크래커를 먹으며 집필을 하다 이층 침실에 올라가 잠에 든다. 한밤중에 잠을 깬 그의 귓가에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일층 거실이다. 희미한 음악소리, 가벼운 웃음소리, 샴페인 잔을 부딪치는 소리. 방에서 나와 계단을 내려가니 한층 더 선명하다. 왁자지껄한 것이 파티가 한 참 무르익어가는 중.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 아무도 올 리가 없는데.

 케이시의 장난일까, 아니면 그의 친지들이 온 걸까. 추측하던 그는 문득 깨닫는다. 저들이 어디로부터도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을. 저들은 현실의 사람들이 아니라 ‘유령’이다. 오싹해진 주인공은 방으로 돌아와 침대 속으로 파고든다. 빗소리에 잠을 깬 다음 날 아침, 거실 어디에도 파티가 열린 흔적은 없다. 읽던 책도 소파 위 그대로, 크래커 부스러기도 그대로. 그 일이 있은 뒤 주인공은 집으로 돌아왔고 한동안 케이시를 만나지 못했다. 어느 날 산책로에서 우연히 마주친 둘은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주름과 흰머리가 더 늘어 보이는 케이시에게 주인공은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문득 케이시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털어놓기 시작한다.

 어머니는 케이시가 열 살 때 돌아가셨다. 아직 젊고 건강하실 때였고 불의의 사고였다. 아버지나 아들이나, 아내 혹은 엄마가 어느 날 갑자기 훌쩍 사라져버릴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아무런 정신적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장례를 치르고 케이시의 아버지는 몇 주 동안 줄곧 잠만 잤다. 캄캄한 방에서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땅속에 묻힌 돌처럼 꿈쩍 않고. 어쩌다 한 번씩 일어나 말없이 물을 마시고 음식을 아주 조금 먹었다. 어린 아들은 큰 저택에 홀로 버려졌다는 생각에 두렵고 불안한 기분으로 아버지의 머리맡에서 잠든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어떤 종류의 사물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 그것은 다른 형태로 나타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거지. …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어. 내가 지금 여기서 죽는다 해도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나를 위해 그렇게 깊은 잠을 자주지는 않을 거야.”
 -무라카미 하루키, 렉싱턴의 유령.

산 자나 죽은 자나 사람은 바람을 품을 수 있기에 무서운 존재. 그의 깊은 잠은 곧 망자를 향한 사무치는 그리움, 그래서 잠은 죽음으로 통하는 문이다.
  
▲“단지 잠이 계속 왔고 그래서 잠을 잤을 뿐”
 
 세상은 색채와 빛을 잃었다. 단지 잠이 계속 왔고 그래서 잠을 잤을 뿐. 남자는 따스하고 포근한 암흑 속에서 모든 게 녹아 없어질 때까지 자고 또 잤다. 깨어 있을 때는 멍한 머리통을 톡톡 두드리며 이렇게 중얼거렸을 테다. ‘영원히 자도 괜찮을 것 같아.’ 하지만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새 거실에선 시끌벅적 파티가 벌어진다. 저들을 불러들인 건 세상 모든 게 재미없어진 외로운 잠자는 사나이. 세월이 흐르고 아버지마저 돌아가셨을 때, 케이시는 숨이 멎은 아버지의 얼굴이 그때 잠자던 모습 그대로라고 느낀다. ‘누구도 나를 위해 그렇게 깊은 잠을 자주지는 않을 거야.’ 사무치는 한 마디.

 산 자나 죽은 자나 사람은 바람을 품을 수 있기에 무서운 존재. 그의 깊은 잠은 곧 망자를 향한 사무치는 그리움이요, 그리하여 잠은 죽음으로 통하는 문이 된다. 간절하고도 강렬한 기대를 들어주는 것이 이 세상엔 분명 있다. 무당도 목사도 아닌 무언가가 귀신같이 내 바람을 알아듣고는 화로에 불을 지피고 파티를 연다. 이층의 캄캄한 방 안에서 온 생을 바칠 기세로 잠에 빠져드는 남자, 그는 죽음의 강을 건너 그리운 사람을 만나고 돌아오나? 아니면 단지 죽음처럼 꿈 없는 새까만 잠일 뿐? 어쩌다 깨어나면 그는 일층으로 터덜터덜 내려간다. 아무런 흔적도 없는 거실. 그래도 모른 척 차가운 바닥에 웅크리고 누워 온기를 찾는다.
 
 “할아버지. 아까부터 내 눈에는 그림자가 하나 더 보여요. 아이들의 수보다 그림자가 더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요.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없지요? … 모르겠어요. 아까는 분명 아무도 없는데 그림자만 뛰어다니더라고요. 아이들의 뒤를 쫓아가고 있었어요.”
 -미야베 미유키, 그림자밟기.

  
▲ 아이들은 11명인데, 그림자는 12개
 
 열 사흗날 밤 아이들이 그림자밟기를 하고 논다. 까만 밤이지만 보름달은 밝고, 까르르 웃음소리에 사방이 왁자지껄. 그런데 이상하다. 아이들은 분명 열한 명인데 그림자가 열두 개. 혼자서 비밀을 눈치 챈 기치조라는 소년이 멀찍이 떨어져 구경하던 동네 할아버지 사지로에게 달려가 떨리는 목소리로 제가 본 것을 속삭인다. 소년의 얘기를 들은 사지로가 유심히 보니 그의 눈에도 밟히기 시작한다. 무리에서 살짝 떨어진 곳에 웅크린 작고 동그란 소녀의 그림자가. 달빛아래 할아버지와 소년이 함께 얼어붙는다.

 종이 세공 일을 하며 입에 풀칠하고 사는 늙은 사지로는 가족도 친지도 없다. 결국 마을의 오캇피키 마사고로에게 이 이상한 일을 털어놓고 지혜를 구한다. 마사고로가 조사하여 알게 된 일의 곡절은 이랬다.

 이십년 전 마을에 이사와야가라는 유복한 상인 집안이 있었다. 그 집의 3대째 주인과 부인 오유이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마중물이 되기를 기대하며 입양한 양녀는 세 살 고아였다. 이름은 오후미. 그러나 세 살짜리가 다섯 살이 되어도 아이는 들어서지 않았다. 그 사이 주인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고, 여자는 사내아이를 낳아 집안의 후처로 들어왔다.

 전처와 양녀는 짐짝처럼 한 데 묶여 별채로 내쳐졌다. 오유이는 갈 곳 잃은 분노를 모두 오후미에게 쏟아 부었다. 미친 여자의 눈에 비친 내 모든 불행의 원인. 다섯 살짜리는 벗어날 지혜가 없다. 집안 식구들은 방관하며 아이를 방패막이로 삼았다. 별채에서 오후미는 혼자 노래를 부르고, 혼자 공을 차고, 혼자 소꿉놀이를 했다. 그리곤 달빛 아래 손을 움직여 강아지를 만들고 새를 만들고, 이내 자기와 똑 닮은 그림자 친구를 만들었다. 오후미는 어느 겨울날 부젓가락으로 모진 매를 맞다 숨을 거뒀고, 얼마 안가 오유이도 화로에 얼굴을 파묻고 불타 죽었다. 오후미는 모든 설움 뒤로하고 부처님 곁으로 떠났다. 그림자만 홀로 남겨두고.

 그러고 보니 언젠가 이런 다짐을 한 적이 있더랬지. ‘일기장은 모조리 불태우고 죽을 거야.’ 터무니없지만 누구나 깨끗이 사라지리라는 욕망을 품곤 하잖아.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아무리 애를 써도 그림자는 남겠더라. 그림자는 말야, 어쩔 수 없이 남게 되는 게 아닐까? 비좁고 추운 별채 다다미방 같은 세상에서 출구 없는 외로움을 느끼며 사는 우리 뒤편에 어느새 응달이 진다. 뒤 돌아보면 나와 똑 닮은 작고 까만 아이가 웅크리고 있어. 자꾸 눈에 밟혀 가슴을 콕콕 찌르는 아픈 그 것을 누구는 차라리 친구 삼고 누구는 평생 못 본 척 외면하겠지.

 야속한 건 삶의 시곗바늘은 모두에게 짜기 마련이라 보상 같은 죽음이 너무 빨리 찾아와. 그래서 우리는 그 아이의 깊은 설움을 제대로 풀어주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말아. 한동안 홀로 맴돌다가 어느 날 나를 깊게 기억하는 사람한테 속절없이 들키고 말겠지. 이 얄궂은 장난엔 생전에 내가 품었던 기대와 삶에 대한 미련이 가득 담겨있을 테고. 그래. 기어이 생이 끝날 때 우리가 남기고 가는 건 이름도 재산도 아닌 이런 작고 외로운 그림자야. 그 녀석을 보고 무서워도 안 무서운 척 보듬어주고 울어주는 사람. 때가 되면 저승으로 잘 보내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우리 인생은 행복한 결말일 거야, 그치?

생이 끝날 때 남기고 가는 건 작고 외로운 그림자다. 그림자를 보고도 안 무서운 척 보듬어주고 울어주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우리 인생은 행복한 결말이야.
  
▲ “떠나는 사람에게 필요한 건 얼마 없어”
 
 오후미가 부처님 곁으로 돌아간 뒤 홀로 남겨진 그림자는 쓸쓸히 숨어 있었다. 그 후 오랜 세월 지난 어느 달밤, 마을 아이들이 시끄럽게 노는 소리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모든 것을 알게 된 마사고로와 사지로, 기치조는 그림자를 오후미 곁으로 보내주기로 한다. 다시 열 사흗날 밤, 사람 셋과 그림자 하나가 강변으로 간다. 기치조는 떨리는 목소리로 힘차게 노래를 부르고, 오후미의 그림자가 박자에 맞춰 폴짝폴짝 따라간다. 작은 나뭇잎 배에 예쁜 종이인형 두 개를 싣자 그림자도 배에 탄다. 노을 진 강의 붉은 물결을 따라 배가 떠나간다. 사지로가 울먹이며 마지막 인사를 전한다. ‘조심해서 가렴. 곧 할아버지도 갈 테니. 그 때 또 인형 만들어주마.’

 떠나는 사람에게 필요한 건 얼마 없어. 떨리는 목소리로 부르는 힘찬 노래, 예쁜 종이인형 두어 개, 또 인형 만들어주마 하는 약속 한 개. 그것들이 돌다리가 되어 넋을 실어 보내고 모든 설움도 강물에 씻겨 내려가지. 하지만 애석하게도 남겨진 사람에겐 많은 말이 필요해. 말을 해줄 사람은 이미 떠났고 여긴 소리 없는 텅 빈 세상. 어느 외딴 저택 캄캄한 방에는 한 남자가 죽음처럼 밀봉되어 있고 거실에선 아무것도 상관없다는 듯 유령들의 시끌벅적 파티가 벌어져. 먼 옛날, 늙은 노인은 몇 발자국 안 남은 죽음을 덤덤히 기다리다가도 달이 환한 밤이면 작은 종이인형을 만들며 눈물짓지. 귓가에 들리는 이건 오랜 그리움의 노래야.

 포크로 으깬 딸기가 그새 접시에 말라붙어있다. 곧 날이 밝을 거야. 아쉽지 않니? 너무 빨리 끝나버렸어. 아직 더 놀 수 있고 얘깃거리도 산더민데 말야. 징글징글하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미련이 남았나보다. 어쩔 수 없지. 내 미련은 몽땅 당신의 소유다. 어느 외딴 골목에서 혼자 놀고 있는 그 애를 보거든 잘 돌봐주길. 됐다 싶으면 예쁘게 노을 진 저녁에 작별인사를 건네며 씩 웃어줘. 우리 이제 영영 만날 수 없을까? 누구도 답은 모르네. 그때 내가 본 것이 정말 너였는지 그림자였는지 유령이었는지, 아니면 단지 응축된 기억의 덩어리였는지. 비밀은 수많은 밤이 지난 후에야 풀리겠지. 그래도 오늘 밤은 정말 즐거웠어. 보름달, 초코케이크, 무서운 얘기, 그리고 너희들. 다 놀았으니 이제 진짜 가자.
김연우 <조선대 국문과 3년, 인문학공간 소피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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