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의 어떠한 책도
 너에게 행복을 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살며시 너를
 네 자신 속으로 돌아가게 한다.
 
 네게 필요한 모든 것은 네 자신 속에 있다,
 해와 별과 달이.
 네가 찾던 빛은
 네 자신 속에 있기 때문에.
 
 오랜 세월을 네가
 갖가지 책에서 찾던 지혜가
 책장 하나하나에서 지금 빛을 띤다,
 이제는 지혜가 네 것이기 때문에.
 - 헤르만 헤세, ‘책’
 
▲책속에서 사귄 아이 어니스트
 
 골똘히 책을 읽는 아이들을 이상한 경외감에 사로 잡혀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때가 있다. 빛 환한 가을 창가에서 아이가 책을 읽는다. 부드럽게 굽은 등, 희고 둥근 볼에 번진 여린 홍조. 책에서 아이가 만나는 건 아이가 보고 싶은 세상이고, 되고 싶은 미래일 것이다. 설명해주지 않으면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설명해줘도 모른다고, 하루키가 말했던가. 보고 듣고 만지는 모든 것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건 결국 우리 자신이다. 내가 동경하는 나, 내가 피하고 싶은 나, 내가 그리워하는 나.

 어렸을 때 읽고 우연한 기회로 다시 만나게 된 ‘큰 바위 얼굴’. “어머니, 어머니! 저 죽기 전에 꼭 그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큰 바위 얼굴을 향해 손뼉을 치던 어니스트를 나는 얼마나 만나고 싶어 했던가. 어니스트가 큰 바위 얼굴을 동경했듯 나는 어린 이 소년을 단박에 사랑하게 되었다. 물론, 그래서 소년 어니스트처럼 사려 깊고 다정하며, 의젓하고 이해심 풍부한 어린이로 성장했느냐고? 모를 일이다. 다만 내게는 이 아이가 학교에서 만나는 친구들만큼이나 생생하게 그리고 생기 있게, 살아있었다.

 미국 뉴햄프셔 프랑코니아 노치 주립공원에 가면 아직도 어니스트가 사랑한 큰 바위 얼굴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큰 바위 얼굴’하면 러시모어산에 있는 역대 미국의 대통령 두상을 떠올린다. 그러나 러시모어산 작품은 보글럼의 지휘 아래 수백 명의 작업자들이 4년간 공들여 만든 인위적 산물이다. 반면 어니스트가 무한한 신뢰와 애정을 품고 바라보던 큰 바위 얼굴은 빗방울이 깎고 바람이 어루만져 만들었다. 지금은 주립공원이 된 뉴햄프셔주 프랑코니아노치에 있는 큰 바위 얼굴 사진을 본다. “언젠가 한 아이가 태어나 그 시대의 가장 위대한 인물이 되리니 어른이 된 아이의 얼굴은 큰 바위 얼굴과 똑같을 것이다.”

 아직도 자연이 선물한 이 오묘한 조화를 목격하며, 인디언 대부터 내려온 예언을 믿고 있는 무구한 아이가 있을까. 어니스트가 그랬듯 자애로우면서도 엄격한 미소를 가진 큰 바위 얼굴에 살아갈 날들의 태도를 묻고, 대답에 귀를 기울이는 아이가 있을까. 너새니얼 호손이 소설을 발표한지 150년이 지났으나 사진속의 큰 바위 얼굴은 여전히 싱긋, 웃고 있다.

 예언은 세 번 실현되었고 두 번 물려졌다. 이재(理財)에 밝아 미다스의 손처럼 무엇이든 돈으로 바꾸는 능력이 있던 개더골드가 황금마차를 타고 나타났을 때도 큰 바위 얼굴은 한결같은 낯빛으로 환호하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시류를 읽는 눈과 수에 대한 명민한 감각이 그에게 있었다. 그러나 개더골드의 육신이자 영혼이었던 재산이 사라지자, 사람들은 인색한 상인이 큰 바위 얼굴과 전혀 닮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한다. 두 번째 예언의 주인공은 올드 블러드 앤드 선더. 전쟁터에서 일생을 보낸 후 번쩍이는 훈장을 달고 마을로 금의환향한 장군으로 굳센 의지와 불굴의 힘이 그에게는 있었다. 그러나 아직 이라고,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고, 청년이 된 어니스트에게 큰 바위 얼굴은 속삭였다. 세 번째로 나타난 사람은 정치인. 부자의 돈과 전사의 칼 둘을 합한 것보다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한 건 그의 혀, 올드 스토니피즈의 언변이었다. 그러나 어니스트는 이 담대한 남자의 유창하고 유려한 말솜씨에서, 능력은 많으나 고귀한 목적이 결여된 사람의 허무와 공허만을 읽는다.

어니스트가 동경한 큰 바위 얼굴.|||||
 
▲바람이 이뤄지려면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아웃라이어(Outliers)’에서 말콤 글래드웰은 ‘1만 시간의 법칙’을 주장했다. 한 가지 일이나 분야에서 큰 성과를 내려면 최소한 1만 시간 동안의 학습과 정진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1만 시간은 하루로 따지면 평균 3시간, 일주일에 20시간씩 10년의 기간이 걸린다. 상인으로 승승장구한 개더골드도, 병사들을 호령하며 전장을 누볐을 올드 블러드 앤드 선더도, 대통령이 될 요량으로 선거유세에 나선 올드 스토니피즈도 부와 권력과 인기를 거머쥔 성공한 사람들이며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기 위해 수만 시간의 경험과 훈련에 몰두했을 것이다. 그러나 돈과 권력과 인기는 그 자체로 좋은, 선한 가치는 아니다. 셋은 어떻게 어디에 사용하느냐에 따라 수많은 사람을 살상으로 이끄는 무기가 될 수도, 인류를 불행에서 구하는 약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자체로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그것을 추구하는 것만으로 선이 되는 가치는 무엇인가. 행함이 곧 과정이며 목적인 가치는 무엇인가.

 어니스트는 여전히 그 골짜기에 살았고 중년이, 이어서 노년이 되었다. 부지런하고 소박한 그의 삶과 경험에서 우러난 말들은 듣는 사람의 삶을 움직였고 새 삶을 만들어냈다. 어니스트가 행한 선의의 행동들은 주위를 변화시켰고, 이 겸손한 사람으로 인해 세상은 매일 점점 더 좋아진다. 언제나처럼 농사일로 생계를 꾸렸으나 종종 사람들의 부탁으로 골짜기 공터에 그의 말을 듣기위한 자리가 마련된다. 그리고 어느 황혼, 어니스트가 언제나처럼 이웃과 이야기를 나누기위해 연단에 섰을 때, 저무는 태양의 황금빛 속에서 멀리 이마에 안개의 백발을 드리운 큰 바위 얼굴이 어니스트를 본다. 어니스트, 바로 네가 나였단다. 나는 너보다 오래, 너를 기다려왔다.

 어른보다 아이들에게 더 큰 가치를 배울 때가 많다. 나이 들수록 그렇다. 아이들은 순간에 몰입하고, 앞뒤 재지 않고 좋아하며, 이익과 손해를 계산하지 않고 솔직하다. 그래서 종종 근엄한 어른들에게 훈계를 듣지만, 돌아서면 몽땅 잊어버리는 순수가 예쁘다. 그래서 아이들은 요구도 많고 탈도 많은 어른들을 오늘도 사랑해준다. 사실 인간사의 복잡함과 고됨 중 다수는 이리 감추고 저리 재고 돌려 말하는 데서 오는 오해와 곡해와 시비에서 오지 않던가. 몽테스키외의 말이다. “우리는 인생이 다 흘러가 버린 다음에야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배운다.”
박혜진 <문예비평가>꿈, 인내심,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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