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왜 고양이와 개는 우리와 영화를 보지 않을까’(이상욱, ‘몸과 인지’,전남대학교 출판부, 2015)라는 흥미로운 제목의 논문을 접했다.

 인지과학적 관점에서 보면, 영화는 오직 인류의 인지에 적합한 매체로 발달했을 뿐, 개와 고양이의 인지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만약 영화가 개와 고양이에게 적합한 매체였다면 그들에게 인상적인 냄새나 소리 등의 기술을 접목한 양상으로 기묘하게 변모되었을 것이다. 그들의 장난감이 후각이나 촉각 등을 통해 그들 인지에 최적화되어 자극을 전달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무튼 고양이와 개는 우리와 함께 영화를 보지 않는다. 습성부터 너무 다르다. 정해진 시각에 출퇴근하지도 않으며, 경제 불황을 걱정하거나 미래를 계획하지도 않는다. 어쩌면 너무 똑같다. 같이 사는 인간이 집에 늦게 들어오면 불안해하며, 고마운 일에는 성의껏 보답하며 호감을 표시한다. 인간은 그 복잡한 간극을 이해하며 조율해야 한다. 나는 그것이 이 땅에서 (가장 고차원의 지성을 가졌다고 믿는) 인류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범절이라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대전동물원에서 퓨마 ‘뽀롱이’가 탈출했다가 4시간 30분 만에 사살 당하는 일이 있었다. 인간의 유희를 위해 만들어진 동물원을 폐쇄해야 한다는 목소리와 종(種) 보전 등 동물원의 순기능을 무시할 수 없다는 목소리가 부딪혔다. 철창 안에 갇혀 지내던 동물들을 전부 다시 야생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목소리와 동물원의 환경을 ‘관람 편의적’이 아니라 동물의 생태에 맞춰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뒤따르고 있다. 분명한 것은 지금처럼 동물원이 동물의 삶과 괴리되어 유지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치동물원의 사정도 엇비슷하다. 쇠창살 대신 전면 유리창으로 된 공간에서 원숭이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목숨만 부지한 채 전시되어 있는 뱅갈호랑이와 멀찍이 떨어져 사진을 찍는 것이 과연 동물과의 교감일까?

 다윈은 ‘종의 계보(the descent of species)’를 통해 종이 항상 고정되어 있다는 편견에 반박했다. 그런데 이 진화 개념은 느슨한 비유로 바뀌어 자연 상태의 ‘적자생존’의 논리로 우리 사회를 해석하게 했다.(Deepak Chopra, ‘Have Human Beings Stopped Evolving?’, Huffington Post. https://www.huffingtonpost.com/entry/have-human-beings-stopped-evolving_us_58cfe967e4b0e0d348b345b2 / 번역 동물해방물결 http://donghaemul.com/view.php?type=data&idx=29)

 사회에서도 경쟁을 통해 강자만 살아남고 약자는 도태된다는 ‘진화 비유(the evolution metaphor)’는 차별과 불평등을 손쉽게 정당화한다. 인종차별주의자는 어떤 인종이 특히 더 낫다고 믿으며, 성차별주의자는 여성을 나약하고 열등한 존재로 규정하며, 자유 시장의 광신자들은 빈곤을 나태함의 상징으로 여긴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적자생존에 서로를 내맡기지 않고 사회진화적 논리를 벗어나는 장치들을 마련할 줄 ‘안다’. 타인의 자유를 해치는 일을 법적으로 규제하며, 병든 사람들을 자연에 내맡기지 않고 돌보는 것처럼 말이다.

 하고 많은 종 가운데 인류가 가장 우수한 지성을 가진 존재라면, 비인간동물을 대하는 지배적 관계 혹은 적대적 관계들을 재설정해야 한다. 먼 이국땅에서 살고 있는 펭귄이나 넓은 바다에서 이동하는 돌고래를 가둬놓고 ‘관람하는’ 것보다는 우리 주변에 살고 있는 동식물이 어떻게 살다가 죽는지에 대한 관심이 더 절실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종차별 철폐의 시대를 걷고 있다.
은별

 ‘은별’님은 술과 커피를 좋아합니다. 나의 기쁨과 사회적 고통의 간극을 어떻게 좁힐 수 있는지 게으르지만 계속해서 물어보고 싶습니다.

[드림 콕!]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광주드림을 구독하세요

저작권자 © 광주드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